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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도심 가장 중심에

있기 때문에,역사적으로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짧게나마 청계천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청계천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의 백운동 계곡이

발원지며, 청계광장 부근 쪽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이 합쳐지며 중랑천까지 물이

이르는 길이 13.7km의 하천입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그냥 개천(開川)

이었습니다! '냇가를 파내다' 라는 의미

이구요~!!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죠.


청계천이란 이름은 이런 저런 설이

많은데요, 백운동 계곡의 물줄기를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구요,



혹은 영조때 공사가 잘 마무리 되자

영조가 직접 나와서 확인을 했는데,

개천을 깨끗히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

이라는 글귀가 청계천으로...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네요.


확실한 건 일제시대때 완벽하게 청계천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 입니다.


옛 문헌에는 이 하천은 서울 물길의

주류를 이루면서 우리나라의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가는데,


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물기운이므로, 한나라 도읍지에 있는

명당수가 되는 개천이라 하였다네요.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준설 등

치수사업 대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의

하천인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양쪽에 둑을 쌓았으나 비가 많이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네요.


하여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인 개천도감(開渠都監)

을 설치하고, 그후에 큰 공사를 했어요.


양쪽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드는 등 여러가지를 했고,

이때 동원된 민간인들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군인들 52800명 이었다네요.


***


그 후 딱히 없다가 세종대왕때 다시

개천 정비에 여러가지 노력을 많이

기울이셨고, 시행 하셨다고 합니다.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이라고

하는 '상설시장 건물 단지'의 뒷편에

도랑을 파낸 뒤,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키는 공사를 했다네요~!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네요,


또한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언제든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준설이 거의 없었다 합니다.

1669년, 서울에는 인구가 대략적으로

 19만명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사람이 모이고

나무를 많이 사용했기에, 나무들이

없어지면서 비만 왔다하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였고, 청계천도 더욱

오염되갔다고 합니다.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다시

준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영조 28년 1월에, 실제로 개천의

주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모두들

개천 준설에 찬성 했다고 하네요.



하여 일당을 받으면서 일을 할

인부들을 모아서 준설을 하였고,

하천 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인공산인 가산을 쌓았습니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인공산이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20만명의 인원이 57일 동안 석축

쌓기, 개천 넓이와 수로 직선화를

작업했고, 그곳에다가 버드나무를

심어서 지반을 탄탄히 했다네요.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에다

기록했고,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에,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부터~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습니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이

지금의 일직선 모양으로 잡혀졌습니다.


흙 산이었던 가산은 일제시대때, 도시

근대화로 인해 사라졌고, 현재는 그저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만 남아있죠.



그 이후 일제시대, 일제는 '제1기

하수도개수계획 (1918~1924)'

수립, 이때 세종로부터 마장철교

5.9 km 구간과 배수가 불량한

17개의 지천을 개수하였어요.


1925년 10월부터는, 또다시 일제는

제2기 하수도개수계획을 수립했고

백운동천이 신교동부터 도렴동까지

1395m 구간을 복개를 했다 합니다.


 또한 동시에 옥류동천,누각동천,

사직동천 271m 구간 부분을 복개

공사를 해서 길을 만들었다 합니다.


1926년에는, 남대문로1가 부근의

'광통교'에서부터 주교까지 전부

복개하여, 유원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1935년에는, 청계천을 싹 다 복개,

도로와 고가철도를 건설하는 별별

계획 또한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이듬해에 모든 청계천을 복개하여

지상에는 전차를 놓으며, 지하에는

지하철을 놓은 방안도 있었다네요.



허나 실제로는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까지의 구간만.. 복개되었다죠.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 "대경성계획"

이라는 것을 1934년에 계획했고

청계천을 복개하기로 한것입니다. 


그 위에 도로로 만들고 고가철도를

넣어서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이동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나 몇몇

부분까지만 복개후, 결국 독립했죠!



그 후 계속 방치되다 광복후

1954년, 5265만 환을 투입해

하수도 개수를 추진했고, 그뒤

1955년에, 광교 상류 135.8m를

일제 이후 처음으로 복개 합니다.


그후 1958년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 복개를 완공했으며,

 이 기간동안 '교와 동대문 까지'

오간수문 다리까지 복개 했습니다.


그 후 1965년~1966년까지 또한

오간수문 다리~제2 청계교까지 복개,

1978년에 마장철교까지 복개를 했습니다. 


그 유명한 청계 고가는 1967년 8월 15일날

공사, 1971년 8월 15일날 완성되었다네요.



그 후 2003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7월 1일부터, 복개되어 숨어있던

청계천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만드는,


복개를 다 뜯어내고 개천을 들어내는

복원 작업을 해서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습니다.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의

2.50 km 구간은 일제시대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은 없다 합니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물을

끌여들여서 시작점인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

방류하는 형태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


아무튼 서울이 도성이 된 이후,

끊임없이 보수하고 모습이 변한

청계천..지금은 정말 좋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 했죠. 상당히

긴 역사가 있어서 놀랍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퍼가실땐, 출저를 꼭 표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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