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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꺾음 팔작지붕 건축물을

 

만들어 봤습니다. 전통건축을 매우

 

좋아하시는 분들은 어느정도 아실거에요.

 

 

 

고구려 또한 꺾음지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꽤나 크다는 것을요...!!

 

 

고구려 토성벽과 꺾음지붕 건축

 

 

 

고구려는 이런저런 자료를 보다보면

 

일단 꺾음지붕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되고 있습니다.

 

 

 

특히 꺾음팔작지붕 양식은 나름대로

 

있었을 확률이 많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고구려 꺾음 팔작지붕

 

양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고구려 꺾음 팔작지붕에 대하여 -

 

 

 

전통건축 , 특히 삼국시대 건축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관심 가져본 지붕 양식이

 

바로 이 꺾음지붕 건축물 일겁니다.

 

 

 

꺾음지붕 양식이란 한개의 지붕을

 

모종의 이유로 2개로 나누어서 ...

 

 

 

여전히 한개의 지붕이지만, 통짜가 아닌

 

2단으로 꺾은 지붕을 가르킨다고 보시면 됩니다.

 

( 비슷한 양식으로 눈썹지붕이 있습니다 .)

 

 

가장 유명한 꺾음지붕 건물 자료인 일본 호류지 소장 옥충주자 ( 다마무시노즈시 , 7세기 추정 )

 

 



고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중에 하나며

 

700년대 이전까지는 자주 사용한 지붕으로

 

추정합니다.

 

 

 

한개의 지붕을 일부러 2단으로 꺾어만든

 

꺾음지붕, 꽤 낮설게 느껴지는 지붕이죠?

 

아무래도 한국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꺾음지붕은 유독 우리나라만 자료가

 

많이 부실해서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지

 

동아시아 전반에서 많은 자료가 발견됩니다.

 

 

사천성 목마산 애묘출토, 동쪽 한나라시대 집모양 명기 1~2세기. 가장 오래된 꺾음지붕 자료다.

 

 

 

 중국에서는 2세기 한나라 가형토기 부터

 

존재가 확인되는 지붕 입니다.

 

 

 

꺾음팔작지붕만 놓고 보자면

 

그 자체로 팔작지붕의 프로토 타입 입니다.

 

 

 

꺾음 팔작지붕이 탄생한 이유인

 

맞배지붕의 단점 + 우진각 지붕의 단점

 

이 두가지를 보완하기 위한 지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맞배지붕의 장점과

 

우진각 지붕의 장점을 합친 굉장히

 

실용적인 지붕이라는 뜻 이죠!

 

 

 


그래서 지붕이 2단으로 구성되어있고

 

윗쪽은 맞배지붕으로, 아랫쪽은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게 일반적 입니다.

 

 

 

( 근데 팔작지붕 형태만 사용된건 아닙니다. )

 

 

둔황석굴 296굴 , 북위 건축물 그림, 꺾음팔작지붕이 제대로 보인다.

 

 

 

중국쪽은 2세기 한나라 가형토기부터

 

발견되기 시작해서, 오호십육국 시절

 

북위 6세기 둔황석굴 벽화까지는

 

 

자주 / 쉽게 확인 되지만

 

그 이후 7세기 당나라 시절부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고식지붕 이랍니다.

 

 

 

중국쪽에서는 7 ~ 8세기 부터 일반적인 통짜

 

팔작지붕이 강세를 보이면서, 꺾음팔작은

 

사실상 멸종하게 되는거 같더라구요.

 

 

옥충주자는 한반도와 관련있는 꺾음지붕 건축 자료로 평가되는데, 그 이유가 그림의 인물들 복식이 한반도계 복식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호류지에서 소장중인

 

옥충주자 ( 다마무시노즈시 , 7세기 )

 

이게 가장 오래된 꺾음팔작지붕 자료 입니다.

 

 

 

한국의 시대로 치자면

 

삼국시대 후반 ~ 통일신라 초기 자료이고

 

나름 한반도계 물건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옥충주자에 그려진 인물들 복식이 한반도계

 

복식과 유사한 점 때문에..... 옥충주자 자체가

 

한반도 백제계 물건이 아니냐?

 

 

 

그래서 옥충주자 건축 양식은 백제계

 

건축 양식 아니냐? 라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은 꺾음팔작지붕 양식이 거의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역이고 활용도 자주한다.

 

 

 

꺾음지붕이 8세기 즈음

 

부터는 사실상 멸종하게 되는

 

한국, 중국하고 전혀 다르게.....

 

 

 

일본은 꺾음지붕 계열을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사용하는 되게 특이한 국가입니다!

 

 

 

꺾음지붕은 일본명으로 2가지 입니다.

 

표준어 등록 / 전문 용어는 [ 시코로야네 ]

 

평균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 시코로부키 ]

 

 

일본식 꺾음지붕인 시코로야네를 적용한 일본 동대사 준명당

 

 

 

시코로야네는 표준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전문 용어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한국명으로는 [ 아옥근 ] 이라고 합니다.

 

시코로야네 = 錏屋根 : 아옥근

 

 

 

= 투구 목 가림 [아]

 

= 집 [옥]

 

= 뿌리 [근]

 

 

일본 사천왕사 중문은 꺾음지붕 건축물 복원사례중에서 매우 유명하고 우수한 사례다.

 

 

그러나  꺾음지붕 계열을

 

부를때 좀 더 대중적으로는...

 

 

 

시코로부키 라고 하는듯 합니다.

 

한국어로는 [ 철즙 ] 이라고 부릅니다.

 

 

 

錣葺 = しころぶき = 시코로부키

 

錣 바늘 철 / 葺기울 즙 = 철즙

 

 

 

둘다 꺾음지붕을 뜻하며 , 둘다 사용되는

 

단어 이므로 아무거나 사용하고 싶으신

 

단어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근데 아마 전통건축에

 

관심있는분들 조차도 보통

 

삼국시대 우리나라 자료중에...

 

 

 

꺾음지붕 or 꺾음팔작지붕의

 

확실하고 정확한 자료가 있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 일겁니다.

 

 

 

그 만큼 유독 한국에서는

 

자료가 아예 없는 수준인게 바로

 

꺾음지붕 or 꺾음팔작지붕 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꺾음팔작지붕을

 

암시하고 있는 건축 벽화가 딱 하나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3호분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누각. 지붕을 2단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꺾음지붕으로 추정 가능하다.

 

 

 

삼국시대 고구려 꺾음팔작지붕

 

자료중에서 가장 확실한 자료는

 

바로 이 누각 그림 입니다.

 

 

 

이 누각 그림은 고구려 벽화 고분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 누각 입니다.

 

 

 

이 건물 지붕이 어째서 꺾음팔작지붕을

 

암시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해석해볼게요.

 

 

 

그러니까 저 그림에서 관찰해야할

 

핵심적인 내용을 바로 이것 입니다.

 

 

 

지붕을 보시면 2단으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맞배지붕 내림마루가 암키와하고

 

분리되어 있고, 암키와는 수직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림마루와 암키와가

 

교차하는 지점을 ㄱ자 모양으로

 

그렸고, 지붕을 2단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니까 2층 지붕 가장 모서리 부분이

 

평기와하고 내림마루가 분리되었고

 

암키와가 수직으로 표현됩니다.

 

 

 

아랫쪽 우진각의 추녀마루 기왓골에

 

맞배지붕 끝부분을 맞춰야 하는 방식을

 

현한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안악3호분 지붕이 꺾음지붕을 표현한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 아닐까 합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렇듯

 

고구려 안악3호분 누각 그림의

 

표현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알 수 있죠?

 

 

 

고구려 또한 꺾음 팔작지붕 양식이

 

일단은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을...

 

그나마 추정이라도 할 수 있어요.

 

 

 

백제보다 오히려 고구려 건축에서

 

더 확실한 꺾음지붕 양식이 발견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 입니다.

 

 

 

 

안악3호분 누각이 꺾음 지붕을 표현한걸로

 

생각되는 두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안악 3호분에는 누각 말고도 여러가지

 

건물 그림을 그렸는데, 대다수가 우진각

 

지붕 입니다. 그리고 그림들을 관찰해보면...

 

 

 

안악 3호분 2층누각 하고 다르게

 

지붕을 2단으로 나눈 표현도 없고

 

대체적으로 ㄱ로 꺾은 표현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안악3호분 누각도가

 

꺾음 지붕을 표현한 건물이 맞다고 생각해요.

 

 

사천성 목마산 출토 동한 명기 /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곳이 딱 붙어있다.

 

 


고화질 사진을 찾기가 힘들어서

 

일단 적당한 사진으로 확인해보면...

 

 

동한 애묘출토 꺾음팔작지붕 한나라

 

가형토기 또한 윗층 내림마루를...

 

 

필자가 주장하는 방식에 매우 가깝게

 

설치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지붕 합각 / 너새기와 위치를 보면 )

 

( 너새 합각기와 부분은 ㄱ자 모양이 될수밖에 없는 상황 )

 

 

 

 

그래서 이렇게 맞배지붕층 내림마루를

 

ㄱ자 모양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무작정

 

추정 / 상상까지는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건물터 중에서 꺾음 지붕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실하게 발견된건 아니라서

 

100% 무조건 있었다 ! 라고

 

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벽화 그림이 있으니까

 

고구려도 꺾음 지붕을 사용했을수도 있다!

 

라고 추정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구려 건축물의 꺾음지붕은

 

지금 한국의 기와지붕하고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지붕입니다. 왜냐하면...

 

 

 

저번 게시물에서도 설명했지만

 

고구려 시절은 수키와를 겹겹

 

포개서 쌓는 방식,

 

 

스페인 기와 방식으로 기와를 시공해서

 

지금의 한옥 지붕하고 느낌이 꽤 다릅니다.

 

 

실제로 정릉사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키와. 보통 토수기와 라고 부르며 고식타입 이다.

 

 

 

스페인 기와식으로 만든 수키와는

 

보통 토수 기와라고 부릅니다.

 

 

주로 삼국시대때 자주 사용되었던걸로

 

추측되고 있고 , 실제로 삼국시대 사찰

 

혹은 건물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삼국시대 수키와는 스페인 기와마냥

 

포개는 방식으로 수키와를 쌓는게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도 고구려 유적지 연천 호로고루 기와들. 고구려 토수기와며, 포개듯이 쌓은게 실제로 확인되었다. 출저 네이버카페 : https://cafe.naver.com/photo291ad

 

 

 

이런 토수기와 계열은 7세기 즈음

 

부터 슬슬 일반 기와로 교체되기

 

시작해서, 고려시대 즈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는 그런

 

수키와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건물하고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지붕

 

모습이 다르게 느껴진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수키와를 쌓는 방식 하고...

 

 

고구려의 수키와 쌓는 방식이

 

약간이지만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안악3호분은 중국에서 귀하하신

 

동수선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만,

 

 

 

고분 자체는 북한 황해남도에 있는 고분 입니다.

 

우리나라 한반도 내부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죠.

 

 

 

 

그래서 아마 동수선생이 귀화하시면서

 

꺾음지붕 건축양식이 평양이나 황해도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정이 가능 합니다.

 

4세기 후반에는 그래도 꺾음지붕 양식이

 

확실히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 또한 토성을 만들어서 사용했다. 대표적인 고구려 토성으로는 청암리토성이 있다.



이번 고구려 건축물의 단청은

 

안악 1호분 단청을 적용했습니다.

 

 

안악1호분은 4세기 말, 그러니까

 

300년대 후반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서는 매우

 

오래된 고분중에 하나랍니다.

 

 

고구려 안악 1호분의 첨차, 기둥, 주두 그림. 소로및 주두가 라운드 처리된 모습이고 편수깎이 기둥처리도 보인다.

 

 

 

제가 만든 고구려 꺾음지붕 전각의

 

첨차 / 기둥 / 주두및 창방 단청은...

 

 

 

안악 1호분 고분벽화 최대한 보이는

 

그대로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설명에 있지만 다른 고분하고 조금

 

다르게... 소로나 주두가 각진 모습이

 

아니라 모서리에 라운드 처리가 되었고,

 

 

 

기둥 가장 윗부분에 편수깎이라는

 

전통 라운드 처리가 되어있는 모습입니다.

 

날으는 물고기는 비어 , 옆에 말은 천마 혹은 기린이라고 한다.



 

안악1호분의 원형 무늬와

 

불꽃 무늬도 사용해봤습니다.

 

 

 

참고로 저 원형은 고구려 태극무늬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건물의 흰벽체는

 

그냥 안악 1호분 벽체 전체가 하얀색 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건물벽 색상은 하얀색으로

 

칠하는게 당연해서 하얀색 벽으로 만들었습니다.

 

 

 

불꽃무늬 아랫쪽에 연꽃그림과

 

모서리에 고구려 여의두문이 있습니다.

 

또한 모줄임 천장에는 보상화문 그림이 있어요.

 

 

고구려 여의두문은 보뺄목에 적용해봤고

 

고구려 보상화문은 추녀 정면에 사용해봤습니다.

 

 

필자는 안악1호분 건축자재와 단청을 최대한 이용하여 건물을 만들었다!

 

 

 

안악 1호분은 발굴한지 너무 오래되서

 

제대로 된 사진자료 거의 없습니다...

 

초고화질 몇장 존재하는게 전부에요.

 

 

 

그래서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초고화질 원본 사진이 매우 드물어서...

 

 

 

그나마 쉽게 이해하시라고

 

안악1호분 고분벽화 모사도를 같이 올립니다.

 

제가 그린 단청및 건축양식이 한눈에 보이죠...!?

 

 

 

 

- 평양시 출토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해보기 -

 

 

 

 

그런데 치미가 처음보는 고구려 치미같죠?

 

고구려가 저런 치미를 사용했다라는 사실!

 

혹시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일제가 평양에서 발굴한 고구려 치미. 위치는 자세하게 알려져있지는 않다.

 

 

 

일제가 한창 고구려 유적 들쑤시고 다닐때

 

평양에서 이런 모양의 치미편을 찾아냈습니다.

 

 

 

치미 몸통 부분인데요, 몸통은 빗살무늬로 장식했으며

 

뿔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흔적이 확실히 남아있습니다.

 

 

 

몸통부분이 너무 확실하게 남아있고,

 

뿔도 있던게 아주 확실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하기 꽤 쉬운축에 속하는 치미 입니다.

 

 

 

 

백제 부소산사지 치미 ( 추정 서복사 치미 ) / 서성훈 선생 복원품으로 추정 , 1978년 복원

 

 

왜 추측이 쉽냐고요?

 

바로 백제치미 때문입니다.

 

 

 

윗쪽 몸통 부분에 대각선으로

 

빗살무늬를 그려 장식했고, 뿔이

 

붙어있던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저런 모습은 국내에서는 일단 백제치미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백제 치미하고

 

평양 출토 치미편이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나요?

 

 

 

일단 몸통 두께도 비슷하고

 

치미 뿔 부분 두께도 비슷한걸로

 

추정되고, 빗살무늬도 거의 똑같고요...

 

 

 

 

 

 

최근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재복원한

 

부소산 출토 , 서복사 추정 백제 치미도

 

굉장히 비슷한 외형을 보여줍니다.

 

 

 

이 두 치미는 몸통 두께부터 뿔 두께까지

 

거의 비슷한 것으로..... 그냥 눈으로만 봐도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한 수준 입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치미를 재현및

 

복원한 것이고, 패턴을 2가지로 추정이

 

가능해서 2가지 패턴으로 제작 해봤습니다.

 

 

일제시대 출토, 평양 대동시 고구려 치미파편을 각종 교차검증으로 필자가 재현한 모습이다. 2가지 타입으로 만들어봤다.

 

 

 

치미를 2가지 타입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가지는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타입

 

다른거는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아예 없는 타입

 

 

이렇게 2가지로 만들어봤는데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타입 -

 

 

 

 

 

우선 치미 날개와 몸통쪽에

 

띠가 한줄 붙어있는 타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평양출토 고구려 치미는 몸통부분만

 

발견되었어도 그 모습이 뭐랄까요,

 

 

 

엄청나게 전형적인 6 ~ 7세기 시절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치미 모습이라

 

추정이 그나마 매우 쉬운 편입니다.

 

 

 

그 교차검증 자료들 중에서 치미와

 

몸통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자료들을 볼까요?

 

 

일본 7세기 치미, 호린지 치미파편. 몸통과 날개부분에 띠 한줄이 부착되어있다.

 

 

 

 

이 치미는 일본 사찰, 호린지에서 출토된

 

7세기 치미로 추정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죠?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한줄 부착 되어있어요.

 

 

 

이 치미는 백제계 치미로 추정하는데요, 백제계

 

치미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부소산사지 치미 ( 추정 서복사 치미 ) / 서성훈 선생 복원품으로 추정 , 1978년 복원

 

 

 

 

위에서 본 치미죠? 부소산 출토

 

서복사 추정 치미 입니다. 더 뭐...

 

솔직히 설명이 필요 한가요?

 

 

 

몸통과 이어지는 부분에 띠가 부착

 

되어있습니다. 다만 2줄의 밴드타입

 

으로 부착되어있습니다.

 

 

 

몸통에 빗살무늬 + 날개부분 띠 부착

 

이 두가지 조합이 백제 치미의 특징 입니다.

 

 

미륵사 동원승방지 출토 치미, 통일신라 8 ~ 9 세기

 

 

 

그리고 미륵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절 치미도 이런 양상을 보여줍니다.

 

 

비록 통일신라 시절 만든걸로 추정되지만

 

몸통쪽 빗살무늬가 약간 남았으며 날개와

 

몸통쪽에 띠 한줄이 붙어 있습니다.

 

 

일본 아스카시대 치미들. 대다수가 빗살무늬와 띠가 붙어있다.

 

 

 

그 외 다수의 일본 아스카시대 치미들

 

모습을 보면 빗살무늬 + 띠한줄 부착

 

이 모습의 꽤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다른점이라면 치미의 뿔이 백제 치미들

 

보다는 훨씬 얆다고 보시면 됩니다.

 

 

공주시 출토, 주미사 치미 ( 통일신라 추정 )

 

 

 

그리고 충청도 공주시에서 출토된

치미가 하나 있습니다. 이 치미는

주미사 라는 사찰의 치미 입니다.



사찰 자체는 백제 사찰터로 추정하고

치미는 통일신라 시기로 추정합니다.



백제 ~ 통일신라 치미인데

 

그 모습이 매우 삼국시대 치미스럽죠?



공주 주미사 치미는 위에서 보이는

 

삼국시대 치미의 특징이 전부 보이는

 

삼국시대 타입 치미 입니다.

 

 

 

몸통에 빗살무늬와 날개와 몸통이

 

만나는 구간에 띠 한줄을 부착했습니다. 

 

 

 

그러나 동그란 무늬가 있죠?

 

저 동그란 무늬를 보통 연주문 이라고 하는데요.

 



여튼 저 연주문 때문에 통일신라 치미로

 

추정이 가능하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평양출토 고구려 치미파편 몸통부분

 

 

 

일제가 출토한 평양 대동시 출토 고구려 치미는

 

일본 치미하고도 매우 비슷한 모습입니디만,

 

 

 

다만 일본의 치미들하고 다르게 뿔 부분이

 

백제 치미처럼 많이 두꺼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치미는 일본 치미보다는

 

백제 치미하고 훨씬 비슷할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죠.

 

 

 

 

고구려 치미도 몸통에 뿔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치미파편이 있습니다.


솔직히 확실한 치미 뿔은 아니지만


그 모습이 뿔이랑 나름대로 비슷해서

 

추정 정도는 해볼 수 있는것이죠.

 

 

치미가 몸통만 발견되어서 이 모습이 100% 세세하게 고증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얼추 전반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으로 추정할수 있다.

 

 

 


비록 완전한 모습의 치미가 출토된건

 

아니지만, 이렇게 여러가지 자료를 토대로

 

교차검증이 매우 쉽게 되는 치미 입니다.

 

 

 

이렇게 500 ~ 600년대 삼국시대

 

치미들은 날개와 몸통쪽 띠를 부착했다는점,

 

그리고 빗살무늬가 대체적으로 같이 있다는 점,

 

 

 

또한 고구려 사람들이 일본으로도 많이 넘어가서

 

고구려 문화를 전파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치미에 띠 한줄을 부착한 타입을 제작한 것 입니다!

 

 

 

-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없는 타입 -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없는 모습이...

 

 

훨씬 확실한 모습이고, 실제 모습에 가까울 가능성이

 

한 2배 이상 높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 이유를 봅시다!

 

 

고구려 정릉사 출토 치미 날개편. 왼쪽이 날개편이고 오른쪽이 몸통부분인데 띠가 없다.

 

 

이런 빗살무늬 장식 치미중에서

 

몇 안되는 고구려 치미중에 하나인

 

정릉사 출토 치미파편 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 없읍니다...!

 

 

 

왼쪽이 날개편이고 오른쪽이 몸통인데

 

띠가 없죠? 네. 고구려 치미는 날개쪽에

 

띠가 없는 타입이 확실하게 발견된 겁니다.

 

 

 

고작 아주 약간의 날개 부분과 몸통 부분이지만...

 

몸통과 날개쪽에 띠가 아예 없는 치미라는건 확실합니다.

 

 

왼쪽은 중국 대동시 출토 업성유적 / 오른쪽은 예청 유적출토 6~7세기 치미



 

중국쪽 치미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북위 치미로 추정되는 대동 삼국지

 

업성유적 출토 치미와...

 

 

 

예청시 출토 북위 추정 치미 또한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한줄도

 

안 붙어있는 모습 입니다.

 

 

일제가 출토한 고구려 날개편 , 평양 주안동 출토라고 하는데..... 딱 그 내용만 있는 치미다.

 

 

 

그리고 평양 출토 고구려 치미파편중에

 

날개 부분만 발견된 경우가 있는데요,

 

 

이게 떨렁 날개 부분만 발견된거라...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날개 부분에...

 

 

띠가 특별히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날개편 자료도 참조를 했습니다.

 

 

평양대동 출토 치미펴판 원본. 윗쪽 주안동 출토 치미날개편하고 셋트로 소개되고 있다.

 

 

 

참고로 주안동 출토 치미하고 셋트로 소개된

 

치미가 바로 평양 대동 출토 치미몸통 입니다.

 

 

 

평양 대동출토 치미는 날개편 자료가

 

하나도 없거니와... 주안동 치미하고

 

셋트로 소개되고 있기도 해서...

 

 

 

어짜피 치미 날개 모양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그래서 이번 치미를 만들때 대동치미 몸통하고

 

주안동 치미 날개편을 조합하여 치미를 만들었어요.

 

 

고구려 정릉사 치미 파편을 기준으로 평양대동 치미와 각종 백제 / 일본 / 중국자료를 모두 참조하여 만든 타입이다.

 



고구려 정릉사 출토 치미 날개편부터

 

고구려 주안동 치미 날개편 이라던가...

 

그외 중국 오호십육국 시절 치미들만 봐도...

 

 

 

몸통과 날개가 접합하는 부위에

 

띠가 없는 모습이 꽤나 일반적이라서

 

이런 사실들을 정상 참작하여 제작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재현 / 복원한 치미 모습은

 

100% 완벽하고 세세한 고증으로 만든건

 

아닙니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치미가 몸통만 발견되어서 , 제가 만든 치미

 

모습이 100% 세세하게 고증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차검증및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제가 재현한 모습이 100% 완벽하진 않아도

 

치미의 전반적인 모습은... 이정도 모양 일거다!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고구려 석탑에 대하여 : 팔각 칠층 석탑 재현해보기 -

 

 

 

 

고구려는 남아있거나 발굴된

 

석탑이 일단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삼국시대 기록에 고구려

 

석탑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삼국시대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고구려는 7층 8각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구려 영탑사 7층 팔각 석탑

 

 

 

삼국시대 기록과 각종 자료를

 

토대로 필자가 상상으로 재현한

 

고구려 칠층 팔각석탑 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석탑에 대한

 

기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고구려 석탑에 대한 기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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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 제 3권 : 제4 탑상(塔像第四) -

 

고려 영탑사(高麗靈塔寺)  : 보덕이 신인을 만나 영탑사를 세우다.

 

 

 

고구려 승려 보덕 선생이 강연을 끝내고

 

고구려 성의 서쪽 대보산(大寶山) 동굴

 

아래에 이르러 참선을 하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말하길,

 

“ 이 땅에 와서 살라 "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땅 앞쪽에

 

불교 지팡이 석장을 올려놓고

 

그 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땅 아래를 파보면

 

팔면칠층석탑(八面七層石塔)이

 

거기에 있을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을 듣고 보덕 선생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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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불교사찰, 영탑사를 상상재현 해봤다.



 

 

그러니까 삼국유사 기록에

 

7층 8각 석탑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고구려 영탑사 라는 기록 입니다.

 

 

 

고구려 석탑 기록에 나오는 고구려

 

사찰인 영탑사는 대보산에 있다고 했죠?

 

 

 

실제로 북한에 대보산은 존재하며

 

평안남도 평양시 서쪽에 대보산(大寶山)

 

이라는 산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평양성 서쪽에

 

대보산이 있고 거기에 영탑사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평양 서쪽에 대보산이

 

있어서 삼국유사 기록이 나름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될듯 합니다.

 

 

 

 

 

그러나 추정은 추정일뿐, 아직까지

 

북한 대보산에서 고구려 영탑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석탑의 부자재 같은거도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실제로 석탑이 발견된적은

 

아직 없지만, 기록만큼은 확실히 있는 상황이에요.

 

 

만일 통일을 한다면, 이런식으로 평양 대보산 공원에 팔각 칠층석탑을 재현해봐도 좋을듯하다.

 

 

 

그런데 저는 어떤식으로 추정하여

 

고구려 영탑사 7층 석탑을 저러한

 

모습으로 재현했을까요!?

 

 

 

일단 8각 7층 석탑이란 기록을 토대로...

 

 어떤 석탑을 기준삼아 외형을 추정하여

 

재현한 것 입니다.

 

 

고려시대 사찰인 영명사 5층 팔각석탑. 10세기 중반 즈음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저는 탑을 만들때 바로 이 석탑을

 

기준으로 추정재현 했습니다.

 

 

 

석탑의 이름은 영명사 8각 5층석탑.

 

900년대...... 그니까 10세기 중반에

 

조성된 고려 석탑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구려 석탑에 영향받은 팔각석탑

 

아니냐라는 의견이 존재하는 석탑인데요!

 

 

 

이유는 설명글에 적어놨지만

 

고려시대 사찰인데 사찰부지에서...

 

 

고구려 초석같은 고구려계 건축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서 그렇답니다.

 

 

 

 

또한 일제가 수리하다가 주변에서

 

옥개석 하나를 더 발견했는지,

 

 

 

석탑 수리후에는 6층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영명사 팔각석탑은 5층이 아니라

 

7층 석탑이 아나냐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 기록에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석탑 기록이 있는 상황에서...

 

 


영명사 석탑은 6층 까지 증축된 상황이라

 

충분히 7층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며!

 

사찰 경내에 고구려 건축물 유구들이 발견됬습니다.

 

 



그래서 고려 영명사는 사실

 

392년 광개토대왕이 창건한 9개

 

사찰중에 하나일 가능성도 매우 높은 상황이고...

 

 

 

영명사 5층 석탑이 사실 7층일

 

가능성도 있다라는 가설 등등....

 

 

 

영명사 8각 5층석탑은

 

고구려 석탑에 영향받은...

 

 

고구려계 석탑일 가능성도 쬐끔은... 있어서

 

영명사 8각 5층 석탑을 최대한 참조해서 만든겁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7층 탑이 유행한걸로

 

추정되는데, 하필 고려 영명사 5층 석탑은

 

팔각인데 7층일 가능성이 있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완벽한 고구려 석탑은

 

아직까지는 단 한개도 발견되지 않아서

 

자세한 모습은 모르는 상황이지만...

 

 

 

삼국유사 기록도 존재하고

 

나름 고구려 석탑에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석탑이 존재하므로....

 

 

 

삼국유사 기록 + 고려시대 석탑

 

이 두가지를 참조하여 ,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 석탑을 재현해봤습니다...!

 

 

필자가 재현한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 석탑의 부속구는 이 금동장식들을 활용해봤다.

 

 

 

고구려 영탑사 7층 석탑의

 

상륜부 장식은 실제 고구려

 

금동 장식들을 사용해봤습니다.

 

 

고구려 탑모양 금동장식. 보는 시각에 따라 상륜부를 표현한 것으로, 혹은 탑전체를 포현한 것으로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참고로 고구려 금동장식 중에서

 

7층탑 모양을 하고있는 이러한

 

자료들도 존재한답니다.

 

 

 

이 7층탑 모양의 금동장식은 탑 윗쪽에

 

장식하는 뾰족한 첨탑인 상륜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냥 7층탑 전체 외형을 축소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그런 자료 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팔각 석탑 만들때 전체 외형및 상륜부 디자인은

 

바로 이 고구려 탑모양 금동제품을 참조해서 만들었어요.

 

 

북한이 복원한 고구려 사찰 정릉사 대웅전과 그 앞의 7층 석탑.

 

 

 

간혹 북한에서 복원한 정릉사 보면

 

가운데에 7층 석탑을 만들어놨죠?

 

 

본디 목탑터라서 목탑을 만들어야

 

하는데 북한 사정상 7층 석탑으로

 

대신 만들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만든 정릉사 8각 7층 석탑은

 

영탑사 8각 7층 석탑 기록을 근거로

 

만든 영탑사 팔각석탑 입니다.

 

 

 

 

아무튼 고구려 대보산에 있었던

 

영탑사는 이런 모습의 사찰이 아니었을까를

 

상상해보며 석탑과 전각을 만들어 봤습니다.

 

 

 

- 초기 고구려 도성 풍경 상상 해보기 -

 

 

 

 

원삼국시대 중국쪽 기록이나

 

당나라 기록을 보면 ,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한번씩 나오는데요.

 

 

중국쪽 기록에 나온 고구려 모습은

 

대충 이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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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驪) -

 

 - 중국 구당서 199권 : 〈상열전〉 제149 :  고구려조 -

 

- 중국 신당서 -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는 산을 따라 집을 지었는데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가집 이었다.

 

 

그러나 절과 신당, 왕궁, 관아들은

 

민가와 다르게 기와 지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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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쪽 기록에서 하나같이

 

고구려는 산을 따라 집을 짓고...

 

 

민가는 초가지붕 같이 이엉을

 

엮어만든 지붕이며, 관아나 궁궐은

 

기와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 다른 기록을 하나 더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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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읍루(挹婁)

 

 

그들은 산림 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가장 잘 사는 큰집의 경우에는...

 

 

 

계단으로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

 

( 움집 : 심혈 深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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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동이열전은 말 그대로


여러 동이족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역사서 입니다. 

 

 

 

고구려 , 부여, 읍루, 숙신 등등

 

꽤나 여러 동이족들이 등장 합니다.

 

 

 

근데 고구려가 이런 동이족들을 전부

 

흡수하여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잖아요!?

 

 

땅굴 반움집 생활을 하던 읍루까지 흡수한 고구려 도성의 풍경은 이러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해본다.

 

 

 

후한서 기록에 나오는 이엉지붕및

 

땅굴 반움집이 실존하던 저 시절...

 

 

 

수 많은 동이족을 흡수하여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는 초기 고구려 제국.

 

 

 

붉은 기와지붕 + 움집이 섞여있는 모습이

 

초기 고구려 제국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번 합성은

 

부여 읍루 옥저 동예 등등...

 

 

근처 동이족을 전부 제압하고

 

흡수하여 거대해지기 시작하는...

 

 

초기 고구려 제국 시절 도성의

 

모습을 표현해본 합성 이랍니다.

 

 

 

 

또한 고구려도 토성을 만들어

 

운용했다는 사실도 있어요. 아마

 

초기 고구려 제국 도성의 모습은...

 

 

 

선사시대 움집 비슷하게 생긴

 

이엉집이 산등성이를 따라 모여있고...

 

 

 

높다란 토성벽과 그로 인한 약간은

 

초원지대 같은 푸르른 개활지와 들판,

 

 

 

중간 중간 붉은 기와가 돋보이는

 

붉고 하얗고, 엄숙한 기와집들 등등...

 

 

 

 

이제 막 시작하는 제국의 아침은

 

조금은 거칠되 약간은 어설프고,

 

 

 

무규칙인듯한 모습 사이사이

 

굉장히 엄격하고 체계적인 모습이 뒤섞인...

 

 

 

콜라와 와인을 섞은듯한 조금은 혼란스럽고

 

언밸런스한 모습이 강하게 대비되는 독특한,

 

 

 

고대 제국의 태동과 시작을 알리는

 

풍경이 아니었나 하고 상상해봅니다.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 선사유적 공원. 앞에 갯뻘과 오이도 수산시장도 있고... 공원도 작지만 정비가 잘되서 한번쯤 방문할만 하다.



 

참고로 제가 합성한 이 장소!

 

움집 억새집 가득한 공원은

 

바로 이 장소입니다...!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이라는 공원입니다. 오이도 빨간등대

 

바로 뒷쪽에 있는 동산 입니다.

 

 

 

근데 오이도는 고구려랑 하등 하나도

 

관계없고 되려 통일신라 유구만 발견된...

 

 

 

선사유적지겸 , 통일신라 유적지 인데요!

 

그래도 초기 고구려 도성 느낌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 이렇게 합성을 해봤습니다...!

 

 

 

- 안악1호분 고분벽화의 2층 누각 상상재현 복원 -

 

 

 

그런데 윗쪽 석탑이나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합성 사진을 보다보면, 고구려 2층 건물이

 

눈에 띌 겁니다.

 

 

이번에 만든 고구려 2층 우진각 지붕

 

건축물은 바로 이 고분벽화를 참조해

 

만든 건축물 이랍니다.

 

 

안악1호분 회랑및 누각이 그려진 전각도

 

 

 

안악 1호분 고분 벽화에는

 

고구려 4세기 후반 정도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그린 전각도가 하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 ~ 장수왕 시절 즈음의

 

고구려 건물 외형을 조금이나마 유추

 

가능한 벽화라서 매우 중요한 벽화 입니다.

 

 

위의 안악1호분 전각도를 복원한 모습. 정면1칸의 2층 누각이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알아보기 힘들죠? 그래서

 

북한쪽 학자들이 연구해서 복원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복원한 그림을 보면 회랑 한가운데에

 

2층 누각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만든 고구려 2층 누각은...

 

 

바로 안악 1호분 그려진 2층 누각도

 

이걸 참조해서 만든 건축물 입니다.

 

 

 

제가 만든 이 2층 누각은

 

안악 1호분 2층 누각도를 기준으로 하되

 

 

 

아무래도 고분벽화 그림은 실제보다

 

많이 축약해서 그린  그림이다 보니,

 

 

 

실제로는 이런 건축 양식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으로 각종 고구려 건축 양식을

 

추가해서 만든 고구려 2층 누각 입니다.

 

 



일단 고구려 안악 1호분 고분벽화에 그려진

 

회랑과 2층 누각 , 협문 그림 특징을 볼까요?

 

특징은 대략 이 정도 입니다.

 

 

 

- 회랑 기와는 일반적인 검회색 기와다.

 

- 2층 누각은 고구려 붉은색 기와다.

 

 

 

- 2층 누각은 모든층이 정면 1칸이다.

 

- 2층 누각 지붕을 인자화반 / 동자주가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 2층 누각 모든층에 치미가 달려있고, 내림마루는 뿔 장식이다.

 

 

 

제가 만든 2층 누각과 회랑은

 

안악 1호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검회색 기와지붕의 회랑들,

 

 

 

모든층 치미 적용과 내림마루의

 

뿔 같은 장식, 붉은 기와지붕 및

 

인자화반 + 동자주 등등...

 

 

 

안악1호분 누각 그림에서 보이는

 

모든 특징을 전부 집어넣은 건물 입니다.

 

 

 

 

다만 고분벽화 누각도는 정면이 모든층

 

1칸이지만, 제가 만든 건물은 4칸이죠?

 

위에서도 설명 했지만...

 

 

 

정면 1칸 / 측면1칸 건물이 2층인

 

경우가 없지는 않아도... 벽화 그림은...

 

 

 

정면 1칸 / 측면1칸 건물 이라기엔.....

 

지붕도 너무 크고 ,  1층 기둥간격이 너무 넓고,

 

인자 화반은 또 엄청 많고, 치미는 전층 설치했고... 등등.

 

 

 

고분벽화 그림은 실제 건물과 다르게

 

그냥 여러가지 많이 생략하여 그려낸

 

축소된 그림으로 추정 되므로.....

 

 

 

실제로는 좀더 복잡한 건축 설계와

 

기둥이 훨씬 많았을 가능성도 있어서,

 

 

 

실제로는 기둥이 훨씬 많고 건축

 

구성도 훨씬 복잡한 건물이 아닐까?

 

 

 

라는 현실적인 내용을 가정하여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일 회화가 축약된 그림이 맞다면 실제론

 

기둥이 훨씬 많고 , 복잡한 포작일 수도 있으니까요...

 

( 치미가 모든층에 설치된 건물이 정측면 1칸인거도 좀 안맞기도 하고 .... 그쵸!? )

 

 

 

 

그런데 용마루가 벽화에 비해 짧죠?

 

( 용마루 : 지붕 가장 윗쪽 치미달린 일자정렬 부분 )

 

 

 

그 이유는 사실.....처음 건물 구성할때

 

지붕 크기 보려고 임시로 설치하는....

 

 

 

지붕 크기 가늠용 임시 지붕을 설치했을땐

 

안악1호분 정도의 크기로 지붕 정도였습니다만...

 

 

 

이게 지붕 크기 가늠용 임시 지붕을

 

설치한 모습인데요. 설계 할때 당시에는

 

안악1호 2층 건물 그림하고 거의 같은 비율인데...

 

 

 

지붕 시공하고 치미까지 설치하니 생각보다

 

안악1호 2층그림 보다 용마루가 훨씬 짧은

 

모습이 되더라구요...;; 허허

 

 

안악1호분 누각도가 축약된 그림일 경우를 가정해서 만든 2층 누각. 실제론 기둥이 많을수도 있다.

 

 

 

그리고 용마루가 고분 벽화 그림에

 

비해서 훨씬 짧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제가 만든 고구려 2층 건물은 벽화 그림과 함께

 

실제로 발굴된 어떤 고구려 건물터 평면도를

 

기초로 만든 건물 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벽화에 비해서

 

용마루가 좀 짧은 모습이 된거에용...

 

 

 

...그런데...!!

 

 

안악 1호분 누각 그림대로 건물을 만든다면 정면1칸으로 만드는게 맞다.

 

 

근데 안악 1호분 누각 그림을 보면

 

이 건물처럼 정면이 1칸 이잖아요?

 

 

 

실제로 어떠한 고구려 건물터에서

 

실제로 정면 1칸 / 측면 1칸의 누각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실제로 있긴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바로 그 실제로 존재하는

 

정면 1칸 / 측면1칸 건축물에 대한 연구

 

내용을 보도록 하시죠...!

 

 

 

 

 

 

* 참고사항 - 회랑 기와가 일반 검회색인 이유

 

고구려 고분 임강총 출토 일반 검회색 기와

 

 

 

제가 복원한 고구려 건물의

 

회랑기와가 일반 검회색 기와를

 

사용한 이유는 매우 단순 합니다.

 

 

 

안악 1호분 회랑 그림의 기와가

 

검회색이고 , 실제 고구려 고분에서

 

검회색 기와가 발견되어서 적용한 겁니다.

 

 

 

고구려는 세간에 알려진것과 다르게

 

검회색 일반기와를 4~5세기 부터는

 

자주,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고구려 불교 사찰, 정릉사 7호 건축물 복원을 위한 추정해보기 -

 

 

 

 

 

정릉사 7호건물은 차양칸이 정면1칸, 측면1칸 건물이다.

 

 

 

 

이 도면은 북한에서 발굴한 삼국시대

 

고구려 불교사찰 정릉사 전체 도면 입니다.

 

 

 

저 도면 중간 즈음에 있는 7호 건물.

 

저게 핵심 건물입니다. 7호 건물터를

 

자세히 보시면... 한번에 이해하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실제 고구려 정면1칸 / 측면1칸

 

건축물은 바로 정릉사 7호 건물터 입니다.

 

 



정릉사 7호 건물터 도면을 최대한

 

쉽게 축약해서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축약한 도면을 보면 아시겠죠?

 

차양칸으로 추정되는 외부 기둥쪽은

 

정면이 14.4m x 측면이 12.2m 입니다.

 

 

 

신기한점은 거의 15m에 육박하는 건물이고

 

차양칸으로 추정되는데 떨렁 정측면 1칸 입니다.

 

 

 

뭐 더 확실하게 말하면 내부 방 칸은

 

정면 2칸, 측면1칸이라 아주 완벽한

 

정측면 1칸 건물은 아니지만요...!

 

 



안악 1호분 2층 누각 그림입니다.

 

여러분! 그냥 그림만 보면 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안악 1호분 누각도 : 정면 1칸

 

정릉사 7호 건축물 :  차양칸만 정측면 1칸

 

 

 

고분 벽화 = 실제 건물터 평면도

 

뭔가 서로 닮아있는거 아닙니까!?

 

 

 

안악 1호분 누각도는 여러가지 생략하여

 

축소시켜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릉사 7호 건물터 하고 비슷한거도 사실 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누각은 사실

 

정릉사 7호 건물 평면도를 기초로

 

안악 1호분 누각을 참조하여 만든 건물 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해본 고구려 정릉사 7호 누각 재현건축물과 영탑사 7층 석탑

 

 

 

저는 정릉사 7호 건물터와

 

안악1호분 누각건물이 서로 어느정도

 

연관된 건축물 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건축물 이었을지

 

나름대로 추정을 하며 만들어봤습니다.

 

 

 

이제부터 정릉사 7호 건물과 안악1호분 건물이

 

어떤 건물이고, 어떤 역할을 했던 건물인지

 

제가 추정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2층 경루설 ( 책창고 ) + 너와지붕 (나무기와) + 두꺼운 주심도리 타입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정릉사 7호 건물은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도 꽤 높다고 생각합니다.

 

 

 

차양칸 정측면 1칸씩에 지붕은

 

나무지붕인 너와지붕으로 꾸민

 

책창고 , 경루로 저는 추정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일단 어째서 책창고, 그니까 경전 보관소인

 

경루로 추정하는지 부터 보자면 사실은 꽤

 

간단한 내용 입니다.

 

 

 

건물 규모 대비해서 1층 차양칸이

 

너무 넓고, 내부 기둥들 하고 차양칸

 

간격이 4m 정도로 꽤 넓기 때문입니다.

 

 

 

그니까 건물 차양칸은 거의 15m에 육박하는데

 

내부 방으로 추정되는 기둥하고 차양칸 간격이

 

4m 정도 입니다.

 

 

 

이 정도 크기의 건물 치고는 나름대로

 

차양칸이 많이 넓고, 방이 너무 작습니다.

 

 

근데 외부 기둥이 모서리에 딱 1개씩만 있어서

 

여러모로 생활 건물용으로는 비효율적 입니다.

 

 

정릉사 7호건물 위치는 경루 혹은 종루가 있기에 최적인 위치다.

 

 

 

그리고 위치 입니다. 경릉사 7호 건물은

 

사찰 경내 가장 중심인 대웅전터 그니까...

 

 

 

법당이자 금당터로 추정되는 6호 건물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니까 7호 건물은

 

이런 건물들 딱 한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초대형 건물 정릉사 강당터 ( 41.5m x 11.5m ) = 8호 건물

 

5 ~ 7층 목탑으로 추정되는 정릉사 목탑터 ( 기단 한면 7.3m씩 8각 ) = 2호 건물

 

사찰의 중심인 정릉사 금당터 ( or 대웅전 터 / 기단만 17.8m x 14.8 m ) = 6호 건물

 

 

 

 

이런 중요한 건물들 사이에 샌드위치

 

처럼 있는게 정릉사 7호 건물 입니다.

 

 

 

근데 보면 강당터 바로 아래 있고,

 

대웅전 바로 옆에 있고, 목탑 바로

 

윗쪽에 있습니다. 님들 그렇다면!

 

 

 

위치만 보면

 

건물 용도가 결국 뭐겠읍니까!?

 

알람벨 타워 아니면 책창고에 가장

 

최적화된 위치라고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범종각 계열인 종루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위에서 말했던 [ 차양칸 너비 ] 입니다.

 

 

 

그니까 범종각은 보통 2층에 종 하나 달아놓고

 

1층을 간혹 창고 개념으로 사용하긴 합니다만...

 

 

 

시간되면 한번씩 종만 치고

 

그냥 창고로 잠깐씩 사용하기에는

 

4m가 넘는 차양칸은 너무 넓지 않습니까?

 

 

실제 부석사 범종각 ( 알람벨 타워 ). 그냥 평이한 2층 정자 모습이다. 여러모로 차양칸이 굳이 필요가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책창고라면

 

충분히 차양칸이 넓은게 설명이 됩니다.

 

 

 

님들 보셈!

 

 

 

대규모 불교 행사 때문에 경전을

 

엄청 꺼내야 할때 , 그리고 눈이나

 

비올때 불교 경전 옮겨야 할때...

 

 

 

잠깐이지만 책을 빗물과 눈으로 부터

 

보호하려면 차양칸이 넓은게 무조건

 

도움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정릉사 강당만 봐도 길이가

 

41.5m 정도로 ... 고구려 사찰 중에서는

 

굉장히 많은 인원을 수용했던 대사찰 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정릉사 라면 책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서울 종로 보신각 , 조선초기 초석을 발굴해서 초석을 기초로 복원한 종루다. 역시 무난한 누정 건물이다.



 

행사할때마다 무수히 많은 책을 꺼내고

 

넣어야 할탠데... 그렇다면 당연히 차양칸,

 

 

 

그니까 4면 퇴칸 부계가 설치된 모습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실용적이지 않겠습니까!?

 

 

 

책을 보관하는 책창고 경루이므로 항상 책이

 

운반 되어야 합니다. 4면 퇴칸 부계 ( 차양칸 )

 

공간이 넒은게 사실 무조건 도움됩니다.

 

 

 

또한 귀중한 책을 보관 하는 장소 입니다.

 

습기에 강하고, 그나마 책을 좀 먹는 벌레들

 

방지에 2층 건물이 그나마..... 유리합니다.

 

 

 

그니까 중요한 경전 보관소 이면서

 

경전은 수시로 운반되기 때문에 ...

 

 

 

혹시 모를 눈 , 비올때를 대비하여

 

많은 경전을 임시로 쌓아놓을 수 있는

 

4면 퇴칸 부계 차양칸은 거의 필수 입니다.

 

 

 

또한 건물을 2층으로 만들어서 습기와

 

벌레 방지를 해야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전부 갖춰진 것이 바로 7호 건물 입니다.

 

 

 

건물 위치 / 입지 / 건물 평면도

 

모든 조건이 책창고에 부합 합니다.

 

 

 

그리고 1층 차양칸 / 2층 책창고

 

이런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까지

 

전승되는 문화 입니다.

 

 

 

그럼 1층 차양칸 / 2층 책창고로 사용되는

 

조선시대 건물을 실제로 보겠읍니다...!!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



 

이 건물은 태백산 사고, 그러니까

 

태백산에 설치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璿源譜)를 보관했던 책창고 입니다.

 

 

 

솔직히 뭐...  그냥 딱 보면 이해되죠!?

 

제가 만든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거의

 

비슷한 모습 입니다!

 

 

 

특징으로는 1층이 사실상 빈공간으로

 

부계 , 그니까 4면 퇴칸 차양 처럼만

 

1층 공간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1층 기둥간 간격을 보면 꽤 넓어요.

 

10m 뭐 이정돈 아니라도 꽤나 넓직합니다.

 

그리고 2층은 정면 2칸 측면 1칸 이랍니다.

 

 

 

어.....

 

 

이 모습 어디선가 본거 같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추정 재현해본

 

정릉사 7호 건물이랑 매우 여러모로

 

비슷하게 생겼다는게 딱 느껴지셨죠!?

 

 

 

제가 정릉사 7호 건물터를 알람벨 타워가 아닌

 

책창고 경루로 추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입니다.

 

 

 

조선시대 책창고 태백산 사고 건물하고

 

평면도가 여러모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은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연이 없는 홑처마 서까래 라던가

 

1층 차양칸은 창방이 없는 무창방

 

건물이라는 점,

 

 

 

1층 차양칸 포작은 무창방 이면서

 

실박공의 모습에 소로만 올려놓은

 

굉장히 삼국시대 스러운 포작이라는 점...

 

 

오대산 선원보각 또한 태백산 선원보각하고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왕실 서적 보관소인

 

태백산 사고 책창고 선원보각은...

 

 

 

1층을 4면 퇴칸 차양인 부계식으로 사용하되

 

사실상 빈공간으로 남겨 두었다는 점,

 

 

 

2층이 정면 2칸 / 측면 1칸으로 만들었다는 점,

 

홑처마 그리고 단순한 가구양식 등... 여러모로

 

삼국시대 스러운 면모가 보입니다.

 

 

 

그래서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 건물의 경우는

 

삼국시대 부터 내려온 경전용 건축 양식이

 

조선시대까지 전승된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편견하고 다르게 조선시대 까지 삼국시대

 

건축 양식과 활용법이 전승되어 왔다라는 저만의 주장 입니다.

 

 

 

 

 

 

그러나 선원보각은 전층 기와지붕이지만

 

저는 정릉사 7호 건물 1층을 나무 기와.....

 

그니까 너와로 설정해봤는데요.

 

 

 

이유는 선원보각은 차양칸 기둥이 많아요.

 

근데 정릉사 7호는 차양칸 기둥이 딱 모서리 4개뿐.

 

 

 

그래서 정릉사 7호는 건물의 흔들림 + 하중에

 

선원보각 보다 훨씬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와 + 흙으로 지붕을 매우는 방식은

 

너무 무거워서 추녀와 주심도리, 기둥이

 

하중을 엄청 받게 됩니다.

 

 

 

특히 주심도리에 무리가 많이 옵니다.

 

그래서 기와보단 가벼워야 하는데

 

근데 억새나 초가지붕은...

 

 

 

벌레 미칠듯이 번식하는 벌레 양성소 ,

 

진정한 스포닝 풀 입니다...! 벌레 천국이 되므로

 

책 보관소 지붕에 알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뭐 시공하는 방법마다 다르긴 한데 여튼

 

가장 가벼운 지붕이 초가 입니다. 그런데

 

정릉사 7호 건물터 같은 경우는...

 

 

 

기둥이 몇개 없어서 적당히 무거운 지붕이어야

 

지붕 하중으로 건물 흔들림을 보완해야 하는데

 

초가지붕 계열은 좀 가볍다 보니까...

 

 

 

그나마 벌레 덜 몰리고 + 흔들림 보완을 위한 적당한 지붕무게

 

이 모든걸 갖춘게 너와지붕 이라고 생각하여 적용해봤습니다.

 

 

 

딱 기와+흙채움 보단 가볍고 초가보단 약간 무겁고

 

기와보다는 벌레가 발생해도, 초가만큼 벌레 천국은 아닌...

 

 

 

책창고와 저런 말도 안되는 평면도에 가장 이상적인

 

기와는 나무기와 지붕이라고 판단하여 적용해봤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55권 - 평양쪽 문화기록인데

 

널이엉이므로 빗소리가 높다.는 기록이 존재하여...

 

 

 

고려시대 이전의 이른 시기 때부터 나무기와인

 

너와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여 적용해봤습니다.

 

 

 

그리고 1층이 정면 1칸이고

 

초가지붕이나 나무기와로 추정되는

 

아무튼 기와지붕이 아닌 표현으로 그린...

 

 

 

그런 그림이 실존하는데요.

 

그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요동성총에

 

그려진 요동성도 3층 누각 그림 입니다.

 

 

 

요동성에 있던 고구려 3층 누각으로 추정되는데요,

 

정릉사 7호 건물처럼 1칸이고, 다층 누각그림 입니다.

 

이번 너와 책창고 건물은 이 그림도 참조를 했습니다.

 

 

 

이 그림을 참조했기 때문에

 

1층 지붕을 나무기와로 적용했고

 

2층은 기와지붕으로 적용해봤습니다.

 

 



 

 

 

-  전층 기와지붕  + 두꺼운 창방 + 화반및 동자주 보조 형태

 

 

 

 

이번 건축 양식은 1층 차양칸 까지

 

기와 지붕을 설치했을 경우 입니다!

 

 

윗쪽 1층 너와지붕식 + 두꺼운 주심도리

 

이 방식하고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점은...

 

 

 

주심도리는 평이한 크기 이지만

 

대신 창방이 거의 가로로 눕혀놓은

 

기둥 수준의 크기와 두께 수준으로 적용했고,

 

 

 

나머지 기와 지붕과 서까래 무게 분산은

 

인자화반과 동자주가 분산해주는 방식 입니다.

 

 

안악 1호분 전각도

 

 

위에서 2층 누각 설명할때 한번

 

말했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안악 1호분에 그려진 2층 누각은

 

축소 / 축약 / 약식 그림으로 추정되지만

 

 

정 / 측면 1칸인 점은 의외로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같기 때문에 .....

 

 

 

안악 1호분 누각은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관련있는 건물이거나 , 혹은 7호 건물하고

 

거의 같은 양식의 건축물 일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건축물의 경우에는

 

안악 1호분 누각도에 그려진

 

특징들을 전부 집어넣었습니다.

 

 

 

인자 화반과 동자주가 교차하며

 

나오는 양식은 용강대총 에서도

 

보이므로 이게 나름 건축 양식적으론...

 

 

 

그래도 쬐끔이나마 검증을 거쳐서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징으로는 창방이 사실상

 

가로로 눕혀놓은 기둥 역할을 하고

 

 

윗쪽의 기와지붕과 서까래 무게를

 

인자화반 / 동자주가 분산시켜 줍니다.

 

 

 

그러다보니 창방쪽에 아주 골고루

 

무게가 분산되서 창방이 얆거나

 

조금만 작으면 바로 부러지는...

 

 

 

어찌보면 건축역학적으로 발전이

 

어느정도 되어 있어야지만 실행이

 

가능한 위험한 건축 방식 입니다.

 

 

 

그런데 이런 매우 위험해서 건축학적

 

지식이 쌓였을때 실행해도 위험해 보이는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건물에서 확인 됩니다!

 

 

 

북한 보현사 상원암 건축물 1794년 중건 추정

 

 

 

이 건물은 북한 보현사 부속 암자

 

상원암 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냥

 

이해가 되시죠!?

 

 

 

상원암은 본전의 크기가

 

정면 11.06m 측면 5.7m 입니다.

 

 

11m에 육박하는데 정면 툇칸이 겨우

 

기둥 1개씩으로만 구성한 정면1칸 퇴칸 입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기술이 가장 올라간

 

시점인 조선 후기 건물에서 이런 위험해

 

보이는 건축양식을 실제로 사용한거죠.

 

 

 

 

제가 만든 건물은 이 건축물을

 

참조해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면 퇴칸은 눈대중으로 한 8m 정도로 매우 넓고

 

안쪽 툇보 ( 퇴량 - 차양칸 같은곳에 사용하는 작은 보 )

 

 

 

이걸 전부 다 창방에 올려놓았습니다.

 

게다가 겹처마 / 일반적인 주심도리 크기 입니다.

 

 

보현사 상원암은 본전만 정면 11.06m 라고하는데 옆칸까지인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이렇게 만들어도 창방이 일반 건물에 거의

 

3배 정도 크기, 그니까 거의 근정전 대들보

 

수준의 크기로 만들어서 사용하니까.....

 

 

 

창방이 지붕의 모든 무게를 버틸수 있다

 

라는걸 실제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 입니다! 1794년 건물이라고 합니다.

 

 

보현사 축성전 1875년 / 툇칸이 정면 1칸으로 된 건물이며 눈대중으로 봐도 10m 정도에 근접한다.



 

이 건물은 1875년 건물로 추정중인 보현사

 

축성전 이라는 건축물 입니다. 역시나 정면

 

1칸의 툇칸을 가진 건물 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건 ,건축적 역량이 발달해야

 

가능할꺼 같은 이런 건물을 ... 이미 삼국시대 ...

 

 

 

고구려 정릉사 7호 건물이 먼저 사용하고

 

있었을수도 있다는 점, 그래서 의외로 훨씬 오래전에

 

높은 건축적 역량을 가지고 있던게 고구려 였다는 점 이겠습니다!

 

 





 

- 꺾음 팔작지붕 1층 + 문얼굴 받침목 형태 -

 

 

 

위에서 설명했지만 정릉사 7호 건물은

 

사실 1층 건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부 차양칸과 내부에 있는 방하고

 

간격이 넓어서 차양칸이 건물 크기에

 

비해 많이 넓은축에 속하고...

 

 

 

차양칸이 저렇게 넓은데 내부에 방은

 

건물 크기에 비해 좁아서, 1층 건물로

 

보기에는 너무 비효율 적 입니다.

 

 

 

기둥이 저런 모습이면 구들이 있어야 좀 효율적

 

일탠데 딱히 구들이 발견 된거도 아니라...

 

 

 

왠만하면 2층 건물 이었을 겁니다만

 

그래도 뭐........ 혹시 또 모르잖아요...?

 

 

 

실제로는 뭐 1층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1층안을 아예 배제를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이번엔 1층안을 보겠습니다.

 

 

 

 

만일 1층 건물이었을 경우에는

 

꺾음 지붕 건축물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면 / 측면이 1칸 건물입니다.

 

모서리 4개의 기둥이 하중을 엄청나게

 

받는 그런 건축물 입니다.

 

 

 

근데 보면 내부에 2칸짜리 방이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생각해본게...

 

 

 

내부기둥 ( 내진고주 )를 이용하여

 

꺾음 지붕을 구성하여 지붕을 2단으로

 

나누어 하중을 분산하는 방식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꺾음지붕의 장점이라면 역시 하중분산이

 

가장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부의 내진고주 기둥들 6개로 꺾음지붕의

 

맞배지붕 부분만 따로 지탱해주기 때문에,

 

 

 

1층이 비록 1칸일지라도 모서리 4개 기둥과

 

두꺼운 추녀로 버틸 수 있게 되는것이겠죠...?

 

 

 

외부 기둥 / 내부 기둥이 각기 다른 지붕을

 

받치는 형태가 되므로 일반 팔작지붕하고

 

비교하면, 꺾음쪽이 하중 분산에 훨씬 유리합니다.

 

 

 

 

또한 벽체를 구성하여

 

벽체가 그래도 쥐똥만큼 이나마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주기 때문에...

 

 

 

아마 벽체까지 구성한 건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벽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정릉사 7호 건물은 차양칸이

 

모서리 기둥 4개만 사용하기 때문에...

 

 

 

내부 6개 기둥하고 외부기둥에 설치하는

 

툇보 ( 퇴량 ) 이걸 걸었을때, 툇보를 받쳐주는

 

기둥자리가 발견이 아예 안된거에서 착안했습니다.

 

북한에서 그린 정릉사 7호 건물 상세도면

 

 

 

툇보를 주심도리에 걸면 되도록

 

기둥자리에 그걸 거는게 일반적인데...

 

정릉사 7호건물 도면을 보면 그런게 전혀 없죠.

 

 

 

그래서 생각해본게 이겁니다!

 

 

 

문지방 위에 , 사실상 문얼굴로 사용하는

 

얆은 샛기둥을 올린 방식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중간의 판문을 구성할때, 문얼굴을 따로 설치하지 않고

 

그냥 얆은 기둥으로 퉁쳐서 기둥겸 문얼굴겸 사용하되...

 

 

 

기둥겸 문얼굴인 샛기둥을 문지방에 올리거나

 

혹은 천두식 마냥 홈을 파내서 끼워 맞추게 되면,

 

 

 

내부 기둥 때문에 발생하는 퇴량을 받쳐주는

 

기둥 역할을 문얼굴이 대신 할 수 있게 되며...

 

 

 

문지방이 기둥을 받쳐주므로, 

 

4개의 우주 사이에 평주 기둥자리가

 

발견 안되는게 당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렇게 길다란 문지방을 사용할 경우

 

줄기초라도 구성하는게 맞는거 같지만 뭐...

 

줄기초가 발견된 거도 아니니까...

 

 

 

솔직히 1층 건물은 아닐꺼 같지만 굳이

 

1층 건물이라면 이런식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만들어 봤습니다...!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출토된 실제 고구려 사다리랑 기둥홈을 뚫은

 

 

나무에 기둥홈을 뚫어서 기둥을

 

설치하는 건축 양식은 여튼

 

완벽한 건물은 아니지만...

 

 

 

지하 목곽고 그니까...

 

 

 

고구려 산성 물류 적재하는 땅굴 창고에서

 

그 방식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나름 고증에

 

맞기는.....쬐끔은 맞기는 합니다.....허허

 

 

 

참고로 대전 월평동 산성이며 남한내에서

 

고구려 창고가 이만큼 온전하게 발견된건

 

대전 월평동밖에 없습니다...!

 

 

김제 금산사 천왕문. 하앙말고도 문얼굴을 기둥처럼 사용했고, 그 기둥위에 받침목을 사용한 마치 삼국시대 방식같은거도 발견된다.

 

 

 

참고로 얇은 기둥을 기둥겸 문얼굴로

 

동시에 이용하여 지붕을 받쳐주는

 

정면 1칸 건물.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 건물이 바로 금산사 천왕문 입니다.

 

 

 

금산사 천왕문은 하앙 건축물로 유명한데요,

 

보면 정면은 1칸인데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지방 위에 기둥겸 문얼굴 위에 화반 혹은 첨차같은

 

받침목을 설치해서 하중을 받쳐주는 건물 입니다.

 

 



정릉사 7호 건축물의 문얼굴에 받침목을 설치한

 

이유는 이런 여러가지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엄청나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4년 12월 31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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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고구려 건축하고

 

일본의 전통건축하고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물론 모든게 비슷하지는 않습니다만,

 

의외로 고구려와 일본의 건축양식은...

 

 

 

서로 매우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첫번째 양식을 알아보겠습니다.

 

 

 

-  서로 굉장히 비슷한 일본과 고구려 건축양식 1 : 받침목 건축양식 -

 

 

일본 목탑 카이주센지 5층 목탑 : 海住山寺 / 1214년 / 높이 17.7m

 

 

이 목탑은 일본의 사찰

 

해주산사 5층 목탑 입니다.

 

일본명으로는 카이주센지 5층 목탑 입니다.

 

 

 

이 5층 목탑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축양식, 그러니까 고구려 고분에서

 

확인 가능한 건축양식이 발견됩니다.

 

 

카이주센지 = 해주산사 5층목탑 1층 차양 부분

 

 

 

 

 

그 건축양식을 바로 5층목탑

 

1층 차양칸에서 확인이 됩니다.

 

 

 

1층을 자세히 봐 주세요.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과 두공?

 

단장여? 정도로 보이는 받침목이 있어요.

 

 

 

근데 주두나 포작이 없습니다. 창방도 없어요.

 

그냥 기둥 + 받침목 2개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프레임이 매우 간단하게 구성된 차양칸 인데요,

 

 

 

특정 고구려 고분에서 일본의 저런

 

건축 양식하고 사실상 거의 똑같은

 

건축 양식이 확인 가능합니다.

 

 

고구려 덕화리2호분 단청. 고사리 무늬 단청이 눈에 띈다. 400년대 후반 추정

 

 

 

그 단청의 고분은 바로

 

덕화리 2호분 단청 입니다!

 

 

 

고구려 단청중에서는 꽤나 고식이며

 

포작이 엄청 고식이면서 특이합니다.

 

 

 

 

 

한나라 / 낙랑계 포작인 주두식

 

혹은 주두랑 비슷한 받침목 형태의

 

엄청나게 오래된 고식 포작 입니다.

 

 

 

덕화리 2호분은 그 양식을 볼때

 

400년대 후반, 그러나까 추측해볼때

 

5세기말 축조된 고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토, 만주벌판의 오녀산성에 덕화리2호분 단청을 적용한 고구려 건축물

 

 

 

건물과 지붕을 지탱해주는

 

방식이 확실히 조선시대나 여타

 

다른시대에서 보기 힘든 양식입니다.

 

 

 

엄청나게 단순하죠.

 

저런식의 뭐랄까 주두...??

 

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첨차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하여튼

 

받침목으로만 받쳐주는 건축양식은

 

한나라 토기에서 부터 확인이 가능합니다.

 

 

 

 

 

윗쪽 사진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기둥에 주두로 보기는 좀 애매하고...

 

 

 

첨차나 두공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받침대로만 지붕을 받치는 양식은

 

 

 

한나라 가형토기에서 꽤 자주

 

발견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의 5세기 후반 까지도 고구려 건축에

 

영향이 남아있던게 한나라 건축양식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가장 전형적인 삼국시대 /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시대 건물 조립 시스템. 전통건축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시스템이다.

 

봉황사 대웅전. 기둥 - 창방 - 평방 - 주두 - 포작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가장 일반적인 다포계 건축이다.



 

가장 일반적인 전통건축의 가구,

 

그러니까 지붕을 받쳐주는 시스템은...

 

 

 

윗쪽의 그림과 같이 배치되는게

 

가장 일반적인 방식 이랍니다.

 

 

 

기둥 - 창방 ( + 평방 ) - 주두 - 첨차

 

이 순서로 배치되는게 가장 전형적인

 

한국 전통건축 프레임 입니다.

 

 

 

그해 비하면 고구려 덕화리2호분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건축양식은 매우 단순하고 생김새 또한

 

쫌 다른게 느껴집니다.

 

 

이번에는 주심포계 건축물 사진을

 

보면서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릉향교 명륜당 건축 시스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꽤나 고식인 주심포계 건축이다.

 

 

 

주심포계 건축물 또한

 

이런 시스템이 기본 입니다.

 

 

 

기둥 - 창방 - 주두 - 포작층

 

이렇게 나오는게 가장 일반적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시스템 입니다.

 

 

* 참고사항 *

 

 

주심포계 : 기둥에만 주두와 포작이 있는 경우

 

다포계 : 기둥과 창방 윗쪽에 주두 + 포작이 있는 경우

 

 

 

 

 

삼국시대 건축양식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일본 카이주센지 5층 목탑의 1층 차양칸

 

기초 구성은 매우 단순합니다.

 

 

덕화리 2호분에 그려진 건축 프레임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런 모습이다.

 

 

 

이런 초단순 양식은 고구려 고분인

 

덕화리 2호분에서 확인이 된 겁니다!

 

 

 

이렇게 초단순한 건축 양식!

 

창방과 주두, 포작층이 없고...

 

 

 

그냥 기둥 / 받침목 2개로만 지붕과

 

건물을 받쳐주는 있는 양식은 비록...

 

 

 

실물 자료로써 발견된건 없지만,

 

일본의 건축에서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았다고... 추정해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나라 가형토기 / 고구려 덕화리 2호분

 

건축양식하고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뭐... 물론 세부적인 건축

 

조립 기술 자체는 조금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일본의 건축이 훨씬 일진보된

 

건축양식이라서 그렇습니다.

 

 

 

일본은 자연 환경 특성땜에

 

건물 흔들림에 매우 견고하고

 

안전하게 버티는 시스템으로 발전했어요.

 

 

고구려 고분인 환문총 오른쪽 널방모습. 왼편 기둥에 받침목 양식이 그려져있다.
고구려 약수리 고분벽화 받침목 양식

 



그래서 이렇게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뭔가 되게 단순하게

 

보이는 건축양식은...

 

 

 

뭔가 좀 불안해 보이는 양식이지만

 

일본 건축의 경우는, 건물의 흔들림

 

문제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되요.

 

 

 

그래서 삼국시대 고구려 받침목 양식,

 

그리고 일본의 초단순 건축 양식은...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를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외형으로는 매우 비슷하게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의 저 특유의..... 주두 없이

 

그냥 받침목만 사용하는 건축양식은...

 

 

 

삼국시대 시절,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아스카시대 부터 꾸준히 전승되고있는

 

건축 양식이 맞지 않나 라고 생각해봅니다.

 

 

 

세부적인 기술은 변했을지라도

 

근본이 되는 건축기술 자체는 아마...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

 

삼국의 유민들이 사용하던 건축기술이 기반일 가능성 !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이죠. 안 그러고서야

 

서로 이렇게 비슷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근데 저 받침목을 주두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해서 주두가 아니라

 

받침목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고구려 고분들 중에서는

 

윗쪽의 안악3호 같이...

 

 

기둥 + 주두 딱 2개로 들보를

 

받쳐주고 있는 고분이... 실제로 몇개 있습니다.

 

 

쌍영총 팔각 용기둥과 팔각주두. 정확하게 주두라고 인지되는 모습이다.

 

 

 

고구려 각종 고분벽화및

 

고분에서 실제 기둥과 주두,

 

 

말 그대로 기둥 + 전형적인 주두 2개로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관찰되요.

 

 

중요한 것은 주두라고 정확하게

 

인식이 되는 모습이라는 점 입니다.

 

 

이 고분벽화는 고구려 팔청리 고분 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죠? 단장혀와 주두, 이 두개를

 

철저하게 구분 가능하게 그렸습니다.

 

 

 

 

이게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단장혀는 주두하고 다르게 생겼고

 

오히려 받침목 처럼 생겼습니다.

 

 

 

주두같은 경우에는 ...누구나 주두라고

 

인식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 주두 입니다.

 

 

덕화리 2호분의 받침목은 주두보다는 첨차에 가까운 모습인데, 일본 건축 양식하고도 일상통맥 한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단장혀나 받침목을

 

주두하고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라는

 

추정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각종 고구려 고분에서

 

정확하게 [ 주두 ] 라고 식별이

 

가능한 건축 부속구가 계속 확인됩니다.

 

 

 

그에 비하면 덕화리 2호분의 받침목은

 

주두하고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덕화리 2호분 받침목은 주두보다는

 

첨차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분명 기술적으로 덕화리 2호분의 받침목은

 

주두하고 비슷한 양식인건 사실입니다만...

 

 

지붕을 받쳐주는 모습이 고구려 건축하고 매우 비슷한 일본 기요미즈데라 건축물

 

 

 

그러나 주두하고 외형적으로

 

다른 모습이라던가, 일본 건축물에서

 

매우 비슷한 건축 양식이 존재한다는 점!

 

 

 

또한 주두하고 설치 방식이

 

조금 다른것으로 추정되므로...

 

 

 

주두하고 살짝 다른 건축 양식으로

 

보는편이 맞지 않나? 라고 생각하기에

 

받침목 이라는 주제로 게시물을 작성했습니다.

 

 

 

 

참고로 덕화리 2호분은

 

한반도 내부에 있는 고구려 고분입니다.

 

게다가 평양에 있는 고분이랍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서 더욱 자세한

 

연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5세기 후반, 고구려 오녀산성이나 환도성에는 이런 건물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 고구려 불교 사찰, 상오리절터 치미 추정복원 해보기 -

 

 

 

 

고구려 치미는 안학궁 치미를 제외하면

 

그다지 알려진게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발굴도 많이 안되었거니와

 

대체적으로 제대로 된 모습으로 발굴된

 

치미가 거의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치미의 모습을 그럭저럭

 

유추할 수 있는 고구려치미가 있는데요...!

 

 

 

그 치미는 바로

 

고구려 상오리사지 ( 상오리절터 )

 

여기서 출토된 치미파편 입니다.

 

 

일제시대때 고구려 상오리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의 날개부분 파편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작업을 하던 일제시대때 발견된

 

불꽃모양의 치미 파편 입니다.

 

 

 

전형적인 치미 날개파편인데요,

 

특이한 점은 불꽃모양 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파편 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상오리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몸통 추정 기와편

 

 

 

고구려 상오리사지 치미는 여타 다른

 

고구려 치미들과는 다르게 몸통 부분까지

 

나름대로 깨끗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확실한 치미편

 

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오리절터 발굴조사

 

기록은 일제때 싹다 사라져서 이게 정확한

 

치미 몸통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나마 정보를 가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에서는

 

원판번호 320234. 조사 1930년. 상오리 출토 고구려

 

수막새편과 치미. 평남 대동군 임원면.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고 있고

 

또 치미 몸통하고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으니...

 

저는 치미편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상오리절터 불꽃모양 치미 날개편은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소장중에 있다.



 

여튼 상오리절터는.....

 

치미의 날개 + 치미의 몸통으로 추정되는 기와편

 

이렇게 2개가 꽤나 깔끔하게 발굴된 것 입니다!

 

 

 

고구려 치미중에서는 정말 몇 안되는

 

그나마 전체 모습을 유추라도 가능한

 

고구려 치미 입니다.

 

 

 

일제시대때 촬영된 불꽃모양의

 

치미 날개편은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에 있습니다. 아무튼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죠?

 

 

 

솔직히 자세한 모습은 모릅니다.

 

그러나 몸통 + 날개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모습 정도는 꽤나 자세하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발굴된 몸통과 날개부분을 추정하여

 

복원하면 대략 이런 모습일겁니다.

 

 

 

치미의 모든 파편이 발견되어 완벽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몸통과 날개편이

 

꽤나 또렷하게 남아있어서...

 

 

 

이러한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치미 몸통추정 와편을 보면 꽤 많은

 

스크레치와 데미지가 있으나 특별히

 

치미에 새겨넣은 무늬는 없습니다.

 

 

 

그래서 추정을 해보면 몸통 부분은 특별히

 

무늬가 없는 민무늬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래서 밋밋하고 매끈한 민무늬 몸통에

 

불꽃모양의 날개편과 함께, 몸통과

 

날개가 접합되는 부분에는...

 

 

 

7세기 초반 ~ 9세기까지 간헐적으로

 

보이는 띠 한줄만 부착하는 양식을 적용했습니다.

 

고구려 불교사찰 상오리사지 동금당 추정재현 복원도

 

 

 

개인적은 추측으로는...

 

 

 

상오리절터 치미는 밋밋한 몸통과

 

치미날개편의 모양을 봤을때 고구려

 

후기인 6세기 말이나 7세기 치미로 보입니다.

 

 

 

7세기 ~ 8세기 치미들하고 여러모로

 

비슷한 모양새라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고로 치미의 크기는 1m30cm,

 

그니까 130cm로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삼국시대 치미 / 일본의 치미 /

 

통일신라 치미 크기가 생각보다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 치미는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 1m가 넘는 크기 입니다.

 

 

 

황룡사 치미는 1m 82cm

 

분황사 중문 치미는 1m 31cm

 

미륵사 동승방지 치미는 99cm

 

미륵사 동승방지 통일신라 치미는 1m 43cm

 

 

 

이렇듯이 약 1m가 넘거나 그에

 

준하는 치미들이 발견 되었습니다.

 

 

1m30cm 치미의 실제 비율및 모습은 정확하게 이 모습이다.

 

 

 

실제 1m가 넘는 치미를 건물에

 

설치하면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윗쪽 치미들을 실제 사이즈로 복원하면

 

제가 만든 건물하고 거의 비슷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호류지 옥충주자 진품. 7세기 후반 예상. 치미가 황금치미다. 지붕과 치미의 비율이 생각외로 매우 리얼하다.

 

 

 

또한 치미와 지붕의 실제 비율을

 

증명해주는게 일본 호류지 소장!

 

옥충주자 입니다.

 

 

옥충주자는 백제 기술로 만든걸로

 

추정하는데요, 지붕 치미 비율을 보시면...

 

 

 

제가 만든 고구려 건축물하고 거의

 

똑같은 모습 / 거의 비슷한 비율 입니다.

 

 

조선시대 취두나 용두는 삼국시대 치미에 비해서 비교적 작다.

 

 

 

조선시대 건물하고 비교해보자면,

 

조선시대 취두나 용두가 대체적으로

 

치미보다는 작아서 비율이 다릅니다.

 

 

 

그래서 삼국시대 / 통일신라 치미를

 

정확한 사이즈로 복원하게 된다면...

 

옥충주자하고 거의 같은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또한 일본 / 고구려 및 삼국시대 건축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닮아 있다고 추정 가능합니다.

 

 

 

실제 삼국시대 치미를 1:1 사이즈로 적용하면, 조선시대 지붕하고 다르다. 되려 일본 옥충주자 지붕하고 매우 비슷하다.



 

또한 의외로 옥충주자 <-이거 건물 고증에

 

꽤나 믿을만한 물건 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건축물이 약간 밋밋해

 

보이는 이유도, 조선 취두가 삼국시대

 

치미에 비해 작아서 그런것도 있답니다...!

 



 

 

 

- 고구려 불교 사찰, 상오리사지 동금당 추정상상 재현복원 -

 

 

 

 

 

위에서도 적어놨듯이

 

이 건축물은 상오리절터 동금당 입니다.

 

 

 

상오리사지 치미가 발견된 곳에서

 

동금당 / 서금당 / 목탑지가 발견되었어요.

 

 

 

여튼 상오리사지 동금당 발굴조사에 따르면

 

기단앞면 25.8m, 옆면 12.6m이라고 합니다.

 

 

 

건물 고증은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100% 완벽한 고증은 아닙니다.

 

 

 

 

 

이유는 상오리사지 동금당은

 

건축물의 외형과 크기를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료인...

 

 

 

가장 중요한

 

기둥의 배열 / 기둥 갯수가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둥용 초석과 이걸 지탱해주는 적심석

 

이라는 중요한게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기둥간 간격 / 기둥 갯수 /

 

기둥은 어떤 모양인지...

 

 

 

아예 추정자체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만든 건물은 상오리사지 동금당

 

기단 크기와 삼국시대 시절 건축양식,

 

 

 

그리고 그 시절 사용되었던 처마길이

 

등등 여러가지를 상정한 다음 적당히

 

추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상오리절터 동금당은 대략 19m ~ 23m 정도의 크기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단 크기를 기준으로 고구려의

 

각종 건축양식을 적용시킨 상상복원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림도 없고 뭐..... 기둥자리도 하나도

 

발견되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뭐...

 

 

 

여튼 상상 추정재현 복원이지만

 

기단부터 건축양식 까지 전부

 

고구려 건축양식 입니다. 여튼...

 

 

 

제가 만든 상오리사지 동금당은

 

덕화리 2호분 단청을 보여드리기 위해 만든

 

추정 재현한 건축물 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실제로 정릉사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키와. 보통 토수기와 라고 부르며 고식타입 이다.

 

 

 

수키와 같은 경우는 앞부분은 넓고

 

뒷부분은 좁아지는 수키와를 사용해봤습니다.

 

 

보통 이런 수키와는 토수기와라고 부르며

 

일반적인 수키와하고 다르게 비늘처럼

 

겹겹이 쌓는 형태로 기와를 올립니다.

 

 

 

 

주로 삼국시대때 자주 사용되었던걸로

 

추측되고 있고 , 실제로 삼국시대 사찰

 

혹은 건물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삼국시대때 수키와는 저런식으로

 

포개는 방식으로 수키와를 쌓는게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도 고구려 유적지 연천 호로고루 기와들. 고구려 토수기와며, 포개듯이 쌓은게 실제로 확인되었다. 출저 네이버카페 : https://cafe.naver.com/photo291ad

 

 

 

이런 토수기와 계열은 7세기 즈음

 

부터 슬슬 일반 기와로 교체되기

 

시작해서, 고려시대 즈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는 그런

 

수키와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윗쪽이 좁아지고 아랫쪽은 넓은

 

고식 수키와인 토수기와를 실제로 적용하면,

 

 

 

이게 의외로 뭐랄까..... 약간이지만

 

스페인 기와같은 느낌이 납니다...!!!

 

왜냐면 스페인 기와처럼 생겨서 그래요.

 

 

 

 

그래서 조선시대 건물하고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지붕

 

모습이 다르게 느껴진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수키와를 쌓는 방식 하고...

 

 

고구려의 수키와 쌓는 방식이

 

약간이지만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이런 비늘처럼 겹겹이 쌓는 방식의

 

기와쌓기는 오로지 스페인 기와를

 

사용한 건물에서만 사용합니디만,

 

 

 

이런 스페인 기와쌓기가 의외로

 

우리나라 초근본 기와쌓기 입니다...!

 

 

안악1호분의 회랑 그림을 보면 , 지붕 내림마루 장식을 뿔처럼 묘사했다.

 

 

 

기와지붕의 내림마루의 경우는

 

4~5세기 고구려 벽화에서 주구장창

 

보이는 뿔 모양 장식을 적용해봤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금당인데 어째서

 

1층건물로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상오리사지 동금당은 다른 고구려

 

불교사찰인 정릉사 서금당을 참조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상오리사지 동금당은 기둥자리가

 

발견되지 않아서 정확한 건물 크기를

 

알 수는 없지만, 기단땜에 추측은 가능합니다.

 

 

 

위에서 이미 적었지만

 

상오리절터 동금당 기단사이즈는

 

대략 정면 약 25.8m x 12.6m 정도에요.

 

 

 

 

 

이 건물 기단 크기가 정릉사

 

서금당 하고 거의 같은 사이즈 입니다.

 

 

 

정릉사 서금당 기단크기 : 약 23m x 14m 정도

 

상오리사지 동금당 기단크기 : 약 25.8m x 12.6m

 

 

 

기단의 크기를 기준으로...

 

벽체의 흔적이나 출토된 기와의 위치,

 

그 당시 유행하던 처마길이 등등을 종합해보면...

 

 

 

건물의 크기를 대충이나마 유추 가능하답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오리절터 동금당은

 

건물크기를 대략 19m~23m 정도로 추측할 수 있는거죠.

 

 

고구려 정릉사 전체도면. 3호 건물이 서금당이다.

 

 

 

그런데 사이즈가 비슷한 정릉사 서금당

 

평면도를 보시면 대충 알 수 있을겁니다!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감주법으로

 

건축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릉사

 

서금당은 무조건적으로 1층 건물이라는걸 알 수 있죠.

 

 

 

이렇듯, 기둥배치만 밝혀내면 대략적으로나마

 

1층인지 2층인지 추정이 가능하게 된답니다...!!

 

 

북한에서 추정복원한 정릉사 서금당. 극락전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바탕으로 6~7세기 형태로 복원했다.

 

 

 

고구려 정릉사하고 상오리사지는

 

목탑 좌우에 2개의 금당이 있다는 점...

 

또한 기단 크기까지 서로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윗쪽 정릉사 도면의 3호 건물을

 

보면 거의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정릉사 서금당은 거의 무조건

 

1층 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릉사 서금당하고 다르게 이 건물은 5세기 건축양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외형이 꽤나 다르다.

 

 

 

상오리사지 동금당은 기둥자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기둥 기초가 한개도 발견 안됨 )

 

 

 

그런데 건물 기단의 크기는

 

정릉사 서금당하고 비슷합니다.

 

게다가 목탑및 건축물 배치까지 매우 비슷해요.

 

 

 

그래서 정릉사 서금당을 참조하여 1층으로

 

재현 / 복원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필자가 재현해본 고구려 건물은

 

완벽한 100% 고증은 당연히 아닙니다.

 

 

왜냐면 상오리절터 동금당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상오리절터 동금당 + 덕화리 2호분 단청 + 포작 +

 

상오리절터 치미 파편 + 전형적인 고구려 기단 +

 

상오리 고구려 작은종 + 붉은 기와 등등...

 

 

 

실제로 출토된 고구려 건축 자료들을

 

총집합해서 만든 건축물 이랍니다...!!

 

 

 

실제로 출토된 고구려 건축 유구들

 

그리고 실제로 벽화에서 확인이 되고,

 

 

 

교차검증으로 실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건축양식을 총집합해서 만든 건물이에요.

 

 

 

상오리절터 동금당이 저 모습이란 증거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되는 고구려 건축 양식을 모두 모아서

 

만든 건축물 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고구려 상오리사지 ( 상오리절터 ) 치미는

 

윗쪽의 치미들을 참조하여 추정 복원 / 재현했습니다.

 

 

 

이번에는 고구려 건축물을 실생활 공간에

 

적용하면 어떤 느낌이 나는지 살펴봅시다!

 

 

 

- 고구려 상오리절터 건축물 실제 장소에 적용해보기 -

 

 

 

 

아파트 공터같은곳에서 무더위 쉼터,

 

혹은 입주민 전용 휴게소나 복지시설로

 

사용해도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실생활에서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위치에 고구려 건축을 활용하면,

 

 

 

말도안되는 왜색 논란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가장 가까운곳에서 자주

 

보다보면 익숙해질태니까 말이죠.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에 고구려 건축을 적용해봤다. 대학에서 이렇게 다양한 전통양식을 시험해보는것도 좋을것이다.

 

 

 


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도서관이나

 

뭐 게스트 하우스 시설이나 혹은

 

강당 같은것으로 사용해도...

 

 

 

나름 괜찮을거 같다고 생각해요.

 

대학교에 설치한다면,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될태니까 활용도도 높을거 같고...

 

 

 

아무튼 꽤나 괜찮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미한 우리의 삼국시대 이미지를 매우

 

익숙하게 바꾸는데 좋을거 같지 않나요!?

 

 

경기도 시흥시 배곧 생명공원에 한옥카페 컨셉으로 고구려 건축물을 적용해봤다.

 

 

 

요즘에 공원이나 한적한곳에

 

멋진 베이커리가 들어서는게

 

유행하잖아요!?

 

 

 

간혹 한옥 베이커리인 경우도

 

꽤나 많은데요, 이런식으로 고구려

 

한옥을 적용한 베이커리가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되게 재밌는 풍경일거 같지 않나요?

 

다양한 풍경도 즐길 수 있구요...!

 

 

 

 

유리빌딩 오피스 건물들 주변에는

 

좁지만 약간의 녹지와 근린공원도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학생들이나 회사원들이 짬짬히

 

시간내서 휴식할 수 있는 좋은

 

정자로 활용해보는건 어떨까요?

 

 

 

도시 공공조경을 고구려 건축으로

 

하는거 괜찮을거 같지 않나요...!?

 

 

작은 정자 정도라면 충분히 고구려

 

양식으로 만들어도 문제 없을태니까요.

 

 

고구려 안악3호분 행렬도. 각종 깃발을 들고다닌다. 보통 이런 깃발 종류를 가르켜 [ 번 ] 이라고 한다.

 

 

 

참고로 제가 사용한 깃발은

 

안악3호분 행진 벽화에서

 

병사들이 들고다니는...

 

 

붉은 테두리를 두른 전통

 

고구려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서울시 중구 근처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상오리사지

 

치미 파편도 보유하고 있는 중이고...

 

 

 

문화재를 담당하는 박물관 이니까

 

이런식으로 연구된 전통 건축물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거 활용하는데

 

가장 좋은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 아닐까요!?

 

 

인천 송도 아트센터 콘서트홀 매점으로 사용해봤다..

 

 

 

 

 

이렇게 도심 공연장이나 문화시설에서

 

매점이나 화장실 / 인포메이션 센터로

 

사용하는것도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시설인 만큼,

 

다양한 우리의 전통을 보여줄수

 

있는 최고의 장소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도 코스트코 건물의 옥상에 적용해봤다.

 

 

 

 

도심 한복판 상가건물 같은곳에

 

옥탑방 / 창고형태로 만들어서...

 

 

 

다양한 도심 풍경을 즐길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식으로...

 

 

 

대형마트나 상가에서, 특정 물건만

 

판매하는..... 스페셜 스팟으로 사용해도

 

좋을거 같지 않나요? 홍보하기도 좋을거 같구요.

 

 



 

 

동네 공원같은 곳에서 정자나 휴게소,

 

복지시설로 사용해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공원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매우 쉽게 접할 수 있고,

 

실제로 편하게 이용하는 건물이 될 것 입니다.

 

 

 

다양한 전통문화체험 / 다양한 공공조경 /

 

어린이들의 역사 교육및...

 

 

시민 복지정책용 건축물로써

 

손색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생활 공간에 사용하므로써,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전통이 매우 부족한 대한민국

 

 

 

이라는 문화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산길, 혹은 둘레길 특정 스팟에

 

정자나 휴게소, 데크로 이용하는것도

 

꽤나 매력적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쉽게 접하는 곳에

 

실사용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산정상에 따로 고구려 건물로

 

박물관이나 산중 휴게소나 매점을

 

만들어 운영해도 좋지 않을까요?

 

 

 

게다가 산정상에 고구려식 산성벽을

 

일정구간 쌓아서 꾸며도 좋을듯 합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잖아요!? 고구려

 

성벽쌓기도 이런식으로 이용 가능 합니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후손들이 계속

 

꾸준히 이어간다는 취지로 활용했음 하네여...

 

 

서울 중구 송현광장에 고구려 건축물을 설치해봤다.



 

여러분 혹시 이거 아시나요?

 

 

 

지금의 서울 중구 / 종로구는

 

77년간 고구려 최남단 도시인

 

남평양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서울 종로구 / 중구를

 

고구려 남평양으로 추정중 이랍니다.

 

 

 

 

고려사 / 삼국유사 / 일본서기 등등

 

교차검증 해보면, 남평양의 위치가...

 

 

 

대략 지금의 서울 중구및 종로구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한강 근처 고구려 유적은

 

전부 보루같은 군부대 시설만 발견됬고

 

민간 시설이 하나도 발견 안된걸 보면...

 

 

 

민간거주 시설은 한강보다 좀 더 북쪽에 있어서

 

발굴 안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전국 각지에 고구려 짬뽕

 

식당 많이 생겼죠? 고구려 짬뽕가게...

 

 

 

대부분 조선시대 양식이나 콘크리트

 

건물인데요, 이렇게 실제 고구려 건축물로

 

만든 고구려 짬뽕집 있으면 좋을꺼 같지 않나요!?

 

 

 

진정한 고구려의 짬뽕맛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핫플레이스가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인천 논현동 한화 에코메트로 아파트와 서해바다

 

 

 

이렇듯...

 

 

고구려 건축물은 현대적인 풍경하고

 

생각보다 꽤나 잘 어울립니다. 합성을

 

하다보니 저도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근데 아무곳이나 다 어울리는건 아니고

 

도시 미관이 깔끔하게 정비된 장소하고

 

나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참고사항 - 고구려 개마무사 황금 비늘갑옷에 대해서 *

 

송도 한옥마을과 고구려 개마무사와 고구려 건축물

 

 

 

제가 만든 작품 사진을 보면

 

개마무사가 황금색 찰갑을 입고있죠?

 

 

 

어째서 저는 고구려 개마무사의 갑옷을

 

금빛의 찰갑으로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바로 이렇습니다...!

 

 

만주 집안시 마선구 2100호 출토 금색 갑옷편

 

 

 

간단합니다. 고구려의 고토!

 

만주벌판에 있는 집안시 라는 곳에서

 

마선구 2100호라는 고구려 고분을 발굴했습니다.

 

 

 

고구려 고분인 마선구 2100호 고분에서

 

이렇게 금빛의 찰갑편이 발견 되었어요.

 

 

이 고구려 금동신발은 마선구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출토당시 모습은 신발 밑창만 온전히 발견되었다.
윗쪽 스파이크가 박힌 신발 밑창을 원형으로 추정복원한 모습이다.

 

 

개마무사 신발의 경우에는

 

마선구 다른 고분에서 추가

 

발굴된걸로 알고 있습니다...여튼

 

 

실제 출토된 스터드가 박힌

 

고구려 금동 신발을...

 

 

원형으로 추정 복원한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만들어봤습니다.

 

 

마선구 2100호분에서 출토된 고구려 황금비늘 찰갑을 입은 개마무사와 고구려 건축물



 

또한 삼국시대 기록에 금빛 갑옷의 기록이 있어요.

 

64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금빛의 갑옷을 선물했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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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寶藏王)  :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다 -

 

 

645년 5월 백제가 금칠한 갑옷을 바치고,

 

검은 쇠를 가지고 무늬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

 

그리고 군사가 입고 종군하였다.

 

 

황제가 군대와 합세하니

 

갑옷의 광채가 태양에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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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거도 쉽게 검색되라는 차원에서

 

개마무사의 찰갑을 금색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4년 12월 5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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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 목탑터가 만일 목탑이 맞다는 가정하에 3층으로 재현해본 황복사 3층 목탑.

 

안녕하세요. 이번에 미륵사 동승방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치미를 복원했다고 하는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만들어 봤거든요..!

그래서 사진 몇장을 업데이트 합니다.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 출토 , 통일신라 시기 치미

 

 

 

이번에 복원한 미륵사 치미는 바로

이 치미 인데요, 통일신라 시기 치미

입니다. 출토지는...



위에서 적었듯이 미륵사 동승방지 입니다.

미륵사 동승방지 치미를 통일신라 건축물에

1:1 사이즈로 설치하면 이런 모습 입니다.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 통일신라 치미를 적용한 울산 율리 영축사 동승방지 추정재현 / 복원안

 

 

 


제가 만든 건물은 통일신라 사찰

 울산 영축사지 추정 동승방지를

추정 재현 / 복원한건데요. 

 

건물의 크기는 대략 11m 정도에요.



미륵사 동원 승방지 건물 전체를

재현 / 복원할 시간이 없어서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기존에 만들어놨던 건물중에서

 

 


가장 비슷한 시기 / 비슷한 용도의

삼국시대 ~ 통일신라 시대 사찰 건물인



울산 영축사지 추정 동승방지 건물에

미륵사 동승방지 치미를 적용해봤습니다.

 

 

미륵사지 동원승방지 출토 통일신라 치미의 크기 : 1m 43cm



 

이번에 복원한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

통일신라 치미는 매우 거대합니다.


높이가 1m 43cm 입니다. 남한에서는

황룡사 치미 다음으로 거대한 치미에요.


사실상 한국에서는 2번째로 거대한

넘버2 사이즈의 치미라고 한답니다...!!

 

 

울산 율리 영축사 추정 승방지는 1개 지붕에 2개의 방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2실 1동 건축물이다.



 

영축사 추정 동승방지가

 

대략 가로길이 11m 정도인데

 

치미의 크기는 1m43cm 입니다.

 

 

 

일단 우리나라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보통 11m 건물에 1m50cm 정도 크기의

 

치미를 설치하는일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래서 만들면서 좀 오버스러운 모습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 했는데, 의외로 다 만들고

 

보니까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네요...!!

 

 

국립중앙박물관을 통일신라 건축물들로 꾸며봤다. 이렇게 기존의 시설을 활용하여 전통건축 정원을 만들어도 좋을듯하다.

 

 

 

참고로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에서는

통일신라 시절 치미만 출토된게 아닙니다!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에서는 예전에

삼국시대 백제 치미도 발견됬습니다.

그 치미는 바로 이것 입니다.

예전에 미륵사 동원 승방지에서 출토된 백제시절 치미

 

 


윗쪽의 치미가... 꽤 예전에

미륵사지 동원 승방지에서

 

출토된 백제시절 치미 입니다.

 

 

 

이번에 복원한 통일신라 치미하고

같은 건물터에서 발견된 치미에요.



한 장소에서 두가지 시대의 치미가

발견된게 꽤나 재미있는 일이네요!

 

 

 

 

이번에 복원된 미륵사 치미는 외형만 보면

백제치미의 특성을 꽤나 많이 보여줍니다.

 


몇년전에 발굴된

 

왕흥사 치미하고 비교해보면....

 



확실히 백제 치미에 가깝습니다.

뭐.....미륵사가 백제 사찰이니까 당연한 거겠죠...?

 

백제 왕흥사 치미 : 600년 준공 ~ 635년 완공및 창건
미륵사 동원승방지 출토 통일신라 치미, 1m43cm.

 

 

 

600~635년에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흥사 치미하고 비교해보면...



전체적인 외형이나 특징은 백제하고

많이 닮아있는게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짧아진 몸통 하단쪽 기왓골,

 

좁은 전체 폭, 밋밋해진 몸통, 몸통과

 

날개 부분 접합 방식이 띠 한줄인거 등등...

 

 

 

통일신라 시기 치미의 특성도

 

뚜렷히 보이는게 사실 입니다.

 

 

영축사 동승방지 / 미륵사 동승방지 치미 /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 / 지우산 / 통일신라 양탄자를 적용해본 꽃놀이 풍경

 



 그래서 이 치미는 일단

 

통일신라 치미로 추정합니다만

 

최종 복원된 모습을 보다보면...


백제와 통일신라 치미를 섞은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실제 출토된 미륵사 동원 승방지 치미는 이런 모습의 한덩이와 수많은 파편들로 발견 되었다.

 

 

 

전체적인 외형에는

 

백제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고,

 

 

치미의 구성 요소에서는

 

통일신라적 특징이 발견되는...

 

 

백제 + 신라 문화가 융합된

 

미륵사만의 특별한 치미라고 생각되네요...!!

 

 

 

백제시절 최고 강성했던 사찰이라서

 

백제 문화가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던

 

미륵사만의 독특한 치미 같습니다.

 

 

1m43cm 치미를 적용하면 대략 이런 느낌이다. 치미가 거대해서 작은건물도 멋지게 보이는 효과가 생긴다.



 

치미가 너무 커서 작은건물에 어울릴까?

이상하지 않을까? 하고 지레짐작했는데...

 

 


오히려 치미가 크고 매끄럽게 생겨서

포인트가 엄청 확 사는 느낌이고 되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어쩌면 전통건축 조차도

선입견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튼 잘 어울립니다!

 

 

 

 

하여튼 이번에 복원된 치미는

일단 한국에서는 가장 거대한 치미인

황룡사지 치미하고 꽤 비슷한 크기 입니다.



황룡사 치미는 높이가 1m82cm / 너비가 1m5cm

인데요, 미륵사 동승방지 치미가 1m 43cm 라니까...



생각이상으로 거대한 사이즈의 치미랍니다.

우리나라는 지붕장식이 대체적으로 작은데요,

이렇게 거대한 치미도 자주 사용했으면 좋겠네요.

 

 

두 치미를1:1 리얼사이즈로 비교하면 딱 이 느낌이다.

 

 

황룡사 치미하고 비교하면

실제론 이런 느낌일거에요.


의외로 체감되는 크기 차이가

엄청나지는 않고, 나름 비슷한

크기로 보일겁니다.

 

40cm 차이밖에 안나서 엄청

차이나게 보이지는 않다는 거죠!

 

이번에 복원된 미륵사 동원 승방지

 

치미하고 비슷한 시기의 치미들을

 

모와봤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며 어떤게

 

비슷하고 어디가 다른지를

 

직접 비교하며 판단해 보세요!

 

 


- 통일신라 사모정과 함께하는 ,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건축양식 고증해보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사모정을 만들어봤습니다. 멋있죠?

 

각종 금장식과 화려한 금으로 만든 뿔장식...




이런 모양의 사모지붕 건축물은

제가 만든 정자형태는 아니지만,



사모정에 화려한 뿔장식과 작은 종들을

설치한 이런 건축 양식은... 충분히 실제로

있었을 것으로 예상 가능한데요.




제가 어째서 이런 화려한 모습의

건물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3칸 사모정 수상정자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 이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건물의 메인 모델은 이 승탑 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사찰,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 이라는 승탑 입니다.



지광국사 현묘탑의 건축양식을 잘 보면

제가 만든 건물하고 굉장히 비슷한게 보이죠?

 

 

 


비슷한 점은 바로 이것 입니다.

사모지붕 / 화려한 첨탑같은 뿔장식을

설치했습니다. ( 뿔장식 : 상륜 이라고 함 )



그리고 출입문이 일반 한옥에서 보이는

창호문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나무판으로 만든 판문으로 되어있고

판문 좌우에는 창문이 있습니다.

 

 



출입문 위에는 비단을 설치했어요.

또한 건물 하단 부분에 난간을 설치했으며

그 아래는 길다란 기단이 있습니다.


 

 

난간으로 예상되는곳 모퉁이에

난간에 설치하는 [ 난간기둥 : 엄지기둥 ]

이걸로 예상되는 조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아랫층 사각형 잔뜩 있는

 

부분을 난간으로 예상이 가능합니다. 

사진속 설명을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광국사 현묘탑에서 보이는 판문과 ㅜㅜ창문, 포렴과 상륜, 난간 등등 대부분의 요소를 적용해서 만들었다.



 

제가 만든 사모정은 지광국사 현묘탑의

기본적인 특징과 , 전체적인 모습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통일신라 게시물인데? 왠 고려시대 승탑 ? ]

[ 그럼 이 작품의 사모정은 통일신라 건물 아님??? ]




이런 의문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려시대 자료를

보고 만든 건축물을....




통일신라 건축물이라고 주장하는지

추가적인 자료를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 법천사 승탑하고 비교해 보세요.

팔각형인거 빼고는 거의 모든게 똑같습니다!!




1층 건물 / 화려한 뿔장식 상륜을 설치 /

1층 인데 난간을 설치 / 판문과 창문이 같이 있는 양식



... 거의 모든 부분에서 ...

지광국사 현묘탑하고 양식이 같죠?


1층 / 난간이 있음 / 화려한 상륜 / 판문과 창문 양식. 지광국사 현묘탑은 통일신라 후기 승탑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렇듯 1층에 난간을 두르고 화려한

뿔장식인 상륜을 설치한 건물 모양은

통일신라부터 발견되고 있는 건축양식 입니다.



조금 다른점이라면 신라 승탑은 8각형

고려시대 승탑은 사각형 입니다. 그러나!



사각형 사모정의 모습을 하고있는

통일신라 자료들이 있긴 있습니다.

 

석장사 출토 연기법송명탑상문전




통일신라 사찰 - 석장사에서 발견된 석판.

 

이 석판의 이름은 연기법송명탑상문전 입니다.

 

 

 

그냥 보시면 딱 눈에 보이시죠!?

사모지붕 1층에 화려한 뿔장식 상륜을

설치한 조각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층 사모지붕 + 뿔장식을 설치한 건축양식은

이미 통일신라부터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통일신라 출토 천불소탑. 사모정에 상륜부가 설치되어있다.

 



이 건물 모양의 석탑은 천불소탑 이라는

통일신라 시대에 발견된 탑 입니다.


그냥 딱 보면 모든게 보이죠?

사모지붕 + 뾰족한 첨탑인 상륜부


이렇게 통일신라 유적지에서

직접적으로 상륜이 설치된 사모지붕

 

모양의 1층 탑이 발견이 된 겁니다.

706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넣은것으로 예상되는 황복사지 사리함. 상륜과 철쇄를 설치한 감실이 보인다.





그리고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상자에 그려진 건물 그림 또한

2층 모양에 사모지붕 입니다.



뾰족한 첨탑인 상륜부 + 사모지붕 +

그리고 첨탑을 지탱해주는 철쇄라는

금속줄도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신라때 이런 모양의

1층 / 사모정 / 상륜부가 설치된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황 입니다.



그리고 이런 건축 양식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꾸준하게 사용되는

전통적인 건축 양식 입니다.

탐라순력도 귤림정 ( 1702년 추정 )




이 그림은 제주도 관아에

있었던 귤림정 이라고 합니다.

건축 양식을 자세히 보세요. 



제가 만든 건물하고

모습이 매우 똑같죠?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진 뿔장식에

난간을 둘렀고, 사모지붕이며 3칸 입니다.



18세기 회화에 그려진 귤림정은

통일신라 / 고려시대 승탑에서 보이는

특징들의 대부분을 계승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제주목관아 귤림정을 복원했다.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1층 + 난간 + 사모 + 뿔장식



이런 건축양식은 의외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사용된 건축양식!

 

이라는 것이겠죠!?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통일신라 사모정을 만든 이유도 있답니다.

 




그리고 이런 건축양식은 의외로

서울 종로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동십자각이 이런 건축 양식에서는

가장 유명한 건축물 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동십자각도 제가 만든 건축양식하고

조금 다르지만, 굉장히 비슷하지 않나요?

 

 



이 건물은 채산사 라는곳에 있는

사모정 비각 입니다. 사모지붕이고...


건물 중앙에는 판문이 있고,

옆쪽에는 창문까지는 아니고...


수직으로 설치한 살대가 있는데

참으로 통일신라 건물 스럽지않나요?





위에 모든 사모지붕 자료들과

채산사 건물들은, 신기하게도



지광국사 현묘탑하고 굉장히

양식이 비슷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전돌에 그려진 건축.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3칸 + 판문 + 창문이 설치되어있다. 고려와 신라의 건축문화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앙 판문 + 좌우 창문 + 정면 3칸

이런 양식은 통일신라 건물그림 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건축양식 이랍니다.

 

 


또한 판문 + 살창 양식은 의외로

각종 실제 건축물들에서 확인되며

매우 전통적인 건축양식 입니다.

 

 

안양문은 조선시대 건축이지만... 통일신라 건축 양식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로 해석 할수있다.

 

 

좌우에 수직창문인 살창을 설치하고

중간에 판문을 설치하는 양식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사용된 건축 양식 이랍니다. 

 

 

안양문이 가장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그냥 사진만 보셔도 이해되시죠??

 

조선 밀양향교 동무. 윗쪽 통일신라 전돌하고 똑같은 중앙 판문 + 좌우 ㅠㅠ 창문이다.

 

 

가운데 판문을 설치 +

 

양쪽에는 ㅠㅠ 계열 인방재를 설치한 창문.

 

 


통일신라 누각무늬 전돌하고

 

매우매우 비슷한 건축 양식 입니다!

 

 


이런 살창 + 판문 양식은

나름대로 조선시대 까지 무난하게

전승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이렇듯이 통일신라 건축 양식은

고려 -> 조선까지 꾸준히 사용되었고

건축양식이 잘 이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내용입니다. 

 

 


[ 통일신라 건축 양식은 ]

[ 의외로 조선시대까지 ]

[ 나름대로 전승이 잘 되었다 ]

 

 

ㅠㅠ창문은 통일신라 누각문전이 가장 이른시기의 창문자료인데, 조선시대 건물에서 자주 발견된다.




라고 이해하시면 된답니다!

조선시대 건물에는 의외로

통일신라적 요소가...



여기저기서 발견 되며 알게모르게

문화적인 전승이 이루어진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의 건축물은

신라 - 고려 - 조선시대 각종 건축

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고증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수상정자로 복원및

재현을 했습니다. 어째서 일반적인

전각이 아닌, 수상정자로 만들었을까요?

 

 



수상정자로 만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적어도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물근처

땅에다가 기초를 둔게 아니라...



모든 기둥을 물속에 기초를 두고

물 윗쪽에 직접 건물을 설치하는

 

수상정자 문화가 있었다!



이런 재미난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연못이나 호수 한가운데, 물위에 직접

떠있는 정자는 하나도 없습니다만...


김유성필 사계산수도. 2층 수상누각을 그렸는데 3칸에 절병통같은 금속장식까지 설치했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심심하면

발견되는게 수상정자 입니다.



지금은 안전문제나 관리문제로

완벽하게 잊혀진 정자문화 입니다만,



각종회화및 사서 기록에서도

심심치않게 발견되는 진짜배기

전통양식 입니다.




저는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요! 의외로

이런 정자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이런류의 수상정자는

사모정 + 난간 + 뿔장식



통일신라 / 고려시대 승탑에서

보이는 건축 양식이 한군데서

전부 발견되는게...



신기하게도... 수상정자이며 심지어

이게 조선시대 회화이며 , 건물인데

이런 경향이 보입니다.

 




비록 통일신라때 이런 모양의

수상정자가 있었다! 라는 확실한

증거나 기록은 없습니다만...



이런 잊혀진 문화들을 알리고 싶었고

또한! 정말 재밌는 통일신라 건축양식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사모정으로 만들어도 되는 건물을

일부러 수상정자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사모정을 수상정자로

만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 - 751년 축조 / 774년 완공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 입니다.

이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어디서든 한번쯤 봤을 겁니다.



저는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 중에서

특히 사진속의 저 부분을 주목했습니다.



저 가구식 석축기단 중에서

세로로 3단으로 돌못이 튀어나온 저 부분!



저는 저 부분을 실제로 목조건축으로

변환하면 이런 모습이고 , 이런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라는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마 이런 말들 가끔씩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은 ]

[ 실제 목조건축 양식을 모방해서 ]

[ 석조 기단으로 그대로 따라 만든것이다! ]



이런 말들 들어보셨죠?


기둥과 보 + 돌못으로 연결된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굉장히 높은 기단 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을 목조로

 

사모정에 적용한 것 이랍니다. 실제

목조 건축양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요.

 

 

 



저 부분이 어째서 실제로 목조양식을

본따 만든걸로 짐작되고, 왜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엄청나게 높은지 알아볼까요!?


일본 기요미즈데라 본당. 시미즈의 무대 - 1633년 재건




이 건축물은 일본의 건축물인데요.

너무나도 유명한 건물이죠?



청수사 ( 기요미즈데라 )

이곳의 핵심 건축물인 본당 입니다.

본당의 진짜 이름은 시미즈의 무대 입니다.

 



사진의 기요미즈데라 본당 무대의

목조 기둥들을 보세요! 엄청 높은 기둥에

가로세로로 빔자재를 끼워넣은 모습이...



불국사 수상목조 데크 부분하고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있지 않나요!?





목조기둥을 가로세로로 거미줄처럼 엮어서

설치하고 , 세로 기둥에는 돌못이 있는데

기요미즈데라 기단하고 거의 모습이 똑같죠!?



신기하죠!?



그리고 이런 건축 양식은 기요미즈데라

 

시미즈의 무대에서만 발견되는게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건축양식을

꽤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야지마 소리바시교.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이랑 거의 같은 양식이다.




이 교량은 일본의 소리바시교 라고 합니다.

미야지마에 있는 나무 교량인데요.



뭐 ... 말이 더 필요한가요?


교량을 받치는 나무 기둥들 짜임새가


불국사 석조기단하고 거의 똑같은 모습 입니다.


일본 됴쿄도 - 코이시카와 고라쿠엔 츠텐쿄




도쿄 코이시카와 고라쿠엔에 있는

 

츠텐쿄 라는 운교 이랍니다.

 

 


교량을 받쳐주고 있는 목조 기둥들이

불국사 기단하고 굉장히 비슷합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죠!?


오사카에 있는 소리바시교





일본의 소리바시교와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요.



물위에 직접 설치했다는 점!

 

 

 

조선처럼 반 정도는 육지에 있는게

 

아니라 물 한가운데에 냅다 꼽은 겁니다!

 

 




불국사는 실제 발굴조사 결과...

청운교쪽에 배가 떠다닐수 있는

 

수심 정도의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떠 다닐수 있을 정도의

수심이었다! 라는 증거는 나름

발굴조사로 어느정도 입증됬습니다.

 




그래서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은

물 위에다가 직접 설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일본의 소리바시교 + 도쿄의 아치교처럼

물에 기둥을 직접 설치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이 입증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자료하고 고증되는건 알겠다 ]

[ 그런데 신라시대때 저런 식으로 ]

[ 기둥을 가로세로로 엮어서 만든 ]

[ 실제 목조 구조물 있기는 있음?? ]



이라는 의문이 생길 것 입니다.

일단 제가 아는선에서 말해볼게요.


 


물위에 직접 설치했던 목조 유구는

아직 발견된적 없습니다.



그러나 저렇게.....



가로세로로 복잡하게 엮어만든

[ 정글짐 ] 모양의 목조 구조물은

일단은 발견 되었습니다.


금관총 ( 6세기 추정 )

 



신라에서 나무를 [ 정글짐 ]

모양으로 만들어서 실제로

사용한 가장 확실한 예는 바로...



금관총 입니다.




불국사 / 일본처럼 나무를

꽤뚫거나 , 혹은 정교한 조립으로

만들어서 돌못같은게 튀어나오는...



그런 정교한 조립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끈으로 묶어서 정글짐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


금관총은 이렇게 나무를 가로 + 세로로 얽어매어 고분을 만들었다.




그 형태가 기요미즈데라 본당무대나

소리바시교 ,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

하고 사실상 거의 같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의 정글짐 모양의

 

목조유구 자료로써는 가장 완벽한 자료입니다.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은

황남대총에서 나름 비슷한

모습으로 실사용 된것이 확인 되었고,


미야지마 소리바시교




일본은 이런식의 정글짐 타입의

건축양식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요미즈데라 본당 / 시미즈의 무대




일본은 이런식으로 신기하게

통일신라 / 당나라 / 헤이안시대

건축양식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하여튼...!!

 



 불국사 기단 / 금관총 / 기요미즈데라 본당무대 / 소리바시교 etc



이 건축 유구들이 서로가 서로를

고증해주기 때문에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불국사 가구식 석축기단

중에서도 돌못이 튀어나온...



목조 데크로 추정되는 부분은

실존했을 확률이 매우 높은 상황.



그래서 사모정 건물 만든김에

수상정자 문화 / 정글짐 목조데크 문화

이런 문화가 있었다라는 걸 알릴 겸!

 




[ 이런 모습의 건축물은 실제 없었을지라도 ]

[ 이런식으로 활용 + 창작이 가능하다 ]



이런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모정과 목조기단이 같이있었다!

이건 고증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만...

 

 

 

사모정 따로 / 목조데크 두가지를

따로따로 교차검증을 하면 고증에

그다지 문제가 없는겁니다!



두개를 합치면 상상속의 건물이지만,

두개를 나누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높은 건축물이 되는 것 입니다!

 

 

성거사지 오층석탑 금동사리함, 고려초기

 




사모정 <- 각종 자료로 통일신라 양식으로 추정 가능


목조 데크 <- 각종 자료로 통일신라 실제 건축양식일 가능성 매우높음



이런 상황입니다. 

 

 

 

2가지의 고증이 완료된 건축양식을

 

서로 믹스하여, 색다르고 멋진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 

 

 

 

 

라는걸 알리고 싶었어요.

 

 



또한 우리나라 이렇게나 활용하기 좋은

 

문화재 / 건축 양식들이 매우 많이 있고,

 

 

활용하면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라는 것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불국사 가구식 석조기단과 회랑을 전부다 목조건축으로 변환하면 이런 모습이 된다. 2층 회랑과 데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진을 보시면서 아마

이거를 되게 궁금해 하실거라

생각합니다. 



[ 근데 지붕 상륜부 금뿔에다가 종 설치한건 뭐임? ]

[ 지붕에 금줄에다가 작은 종들 설치한거 고증? 맞음? ]



아마 보시면서 이거 되게 궁금해

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게 고증이 맞나 확인해보겠습니다.

 

 


건물위에 첨탑처럼 생긴 뿔장식은

[ 상륜 ] 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죠!?




그리고 신라 / 고려시대 승탑들이

인하여 상륜은 확실한 고증인거

까지는 이해하셨을 겁니다.




근데 거기다가 금줄을 걸어서

사이사이에 작은 종들인 풍경을




잔뜩 달아놓은건 생소하고

이게 우리나라 양식 맞음?

고증이 맞냐?



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근데

 

이것 또한 분명하게 고증된 양식 입니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 그림자료인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이라는 그림 입니다.



비록 건축물은 육모정이라서

6각형 지붕이기는 하지만.....



1층 건물에 난간을 두르고 엄청 길쭉한

상륜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상륜을

지탱하기 위해서 줄을 설치했습니다.


일본에서 소장중인 1340년 고려 묘법연화경. 1층 / 난간 / 상륜부 등등, 필자가 만든 사모정과 거의 똑같다.

 

 



이 모습은 마치!

 

제가 만든 사모정하고

 

굉장히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식으로, 제가 만든 사모정은

 

고려시대 금으로 그린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에서도 발견됩니다.




제가 만든 사모정하고 다른점이라고는

목조기단 / 지붕이 6각형 이라는점만

다르고 거의 모든점이 비슷하죠??


706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넣은것으로 예상되는 황복사지 사리함. 상륜과 철쇄를 설치한 감실이 보인다.




이것은 통일신라 사찰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인데요.

 

 


지붕을 자세히 봐 주세요.

뾰족한 상륜부와 함께 상륜을

 

지탱하는 줄을 설치했습니다.

 

 

 

딱봐도

 

상륜에 철쇄를 설치한 것이죠!



작은 종들인 풍경이 없다는

점에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통일신라 자료 중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상륜 + 철쇄 자료 입니다.

그래서 매우 귀중한 자료 입니다.


1249년 고려 법화경서사보탑도

 

 

 

이 그림은 고려시대 7층 목탑을

 

금니로 그린 그림인데요, 보시면

 

그냥 이해 되시죠!?

 

 

 

목탑 상륜부에 철쇄를 설치하고

 

철쇄에 작은 종인 풍경을 잔뜩

 

설치한 고려시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일본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

 

감지금니 법화경서사보탑도(法華經書寫寶塔圖) 입니다.

 

1249년 2월에 발원한 것임을 신효사(神孝寺)의 승려가 기록했다네요.

 

 


그리고 이런 금속으로 만든 줄 + 작은 종들

이 양식들은 조선시대에서 실사로 발견됩니다.


1605년 중건 법주사 팔상전 5층목탑. 금동상륜 + 철쇄 + 작은 풍경들이 설치되어있다.





이런 건축양식은 유네스코 문화재!

법주사 팔상전에서도 이미 사용하고

있는 양식이랍니다. 신기하죠?



상륜부를 지탱하기 위해서

금속으로 만든 줄을 설치하고

작은 종인 풍경을 설치한 모습.....



이 양식은 의외로 조선시대 자료에서

이런식으로 발견되는 , 우리나라 전통

건축 양식중에 하나 입니다!

 

 

 


제가 만든 화려한 뿡장식은 이렇게

통일신라 - 고려 - 조선 우리나라

모든시대에서 발견되는!



우리나라 전통양식 그 자체 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 레퍼런스 봐가면서 재현/복원한건 알겠다 ]

 

[ 근데 통일신라때 실제로 상륜부를 금동으로 ]

 

[ 만들었다는 증거 있음? 없는데 그냥 금동으로 만든거 아님 ? ]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일신라 금동 상륜!

 

있습니다!

 

 

 

실제로 금동상륜이 있다구요!

 

과연 어떤 사찰에 통일신라 시절

 

진짜 금동상륜이 남아있나 확인해볼까요?

 

 

 

 

이 전탑의 이름은 송림사 5층 전탑 입니다.

 

진흙으로 구운 전돌로 쌓은 전탑 인데요,

 

 

 

그냥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실제로 지금까지 남은 오리지널

 

통일신라 금동 상륜입니다!

 

 

 

성분 조사결과 도금한 금동이라고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송림사

 

상륜부는 구한말에 찍은 사진도 남아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실제 통일신라 금동상륜 이다.

 

 

 

송림사 5층전탑의 금동 상륜부는

 

그 디자인이 통일신라 즈음의 상륜

 

디자인이란게 밝혀졌고

 

 

 

( 일본 상륜들과 교차검증결과 )

 

 

 

송림사 사리함이 전형적인 통일신라

 

디자인이라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송림사 5층전탑 사리함. 난간의 모양새가 안압지 출토 난간하고 완전히 똑같아서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송림사 5층 전탑의 사리함은 통일신라

 

닫집을 연상 시키는 모습이고, 또한...

 

 

 

난간의 모습이 동궁과 월지!

 

구 안압지에서 출토된 실제 목조난간

 

하고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는 점...!

 

 

 

여러모로 사리함의 특성이

 

매우 통일신라 후기 스러워서...

 

송림사 전탑도 9세기 후기 전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송림사 5층전탑은 구한말 사진까지 남아있다.

 

 

 

게다가 조선시대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엄청나게 높은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통일신라때 금동상륜을 실제로 사용했다!

 

라는것은 한 20년쯤에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거처럼 특이한 건축양식을

 

하나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볼까요!?

 

 

 

 

제가 만든 사모정 건축물에서

 

난간쪽을 자세히 봐 주세요.

 

 

난간을 보시면

 

난간 받침대를 흰검 삼각 무늬와

태극마크를 그려넣었죠? 특이하죠!?

 

 

 

저 부분을 [ 치마널 ] 이라고 하는데요,

 

통일신라 난간 치마널은 저런식으로...

 

 

 

단청을 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하나씩 알아볼까요!?

 



감은사지 태극무늬 장대석. 난간의 치마널을 연상시키는 모양이다.

 




경주 감은사 터에서 발견된

태극무늬가 그려진 장대석 입니다. 

 

 

 

이 장대석은 모양부터 난간을 연상

 

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장대석의 길이, 높이 , 두께, 마루판이

 

튀어나온듯한 모습 등등... 여러모로!

 

 

 

실제 난간 치마널을 본따서 만든

 

장대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은사지 장대석의 통일신라 태극무늬 ( 682년 추정 )

 

 


감은사지 태극무늬 장대석은


통일신라 태극무늬 자료로써는

가장 유명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태극무늬하고

삼각형 세모무늬 장식을 새겼죠.

 

 

 

제가 만든 사모정의 태극무늬와

 

삼각형 무늬는 이 장대석 무늬를

기초로 난간 단청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처럼 당나라 건물에서

보이는 난간받침대 [ 치마널 ]

부분을 흰검으로 칠하는 양식은,

 


당나라 건축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입니다.



특히 당나라 건축은 치마널에 이러한

삼각형 무늬 넣는게 매우 유행이었는데,



감은사지 장대석이 나름 당나라 건물의

 

난간 치마널을 닮았기 때문에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하게 적용을 해봤습니다.

 

 

일본 뵤도인 호오도 ( 평등원 봉황당 ) 내부 벽화. 1053년. 치마널을 흰검으로 꾸몄다. 태극마크도 보인다.

 



그리고 일본의 뵤도인에서도 난간

 

치마널을 채색하는게 발견됩니다.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채색 방식이

흰검이라는점이 똑같고...

 

 

그리고 반드시 자세히 확인해 보세요!

 

치마널 중간과 모서리에 태극무늬를

 

그려넣은것도 확인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가지 이유를 토대로

사모정의 치마널에 태극무늬를 넣고

 

흰검으로 채색 한 것 입니다!

 

 



그래서 감은사지 장대석은 난간받침대

치마널에 사용한 단청으로 예상이 가능합니다.



당나라 양식을 너무 직접적으로 사용한거 아니냐?

라는 비판을 받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나서

사람이름 / 지명이름 / 옷과 복식

이 모든걸 당나라식으로 바꾸었다는점,



이런 사실이 각종 자료와 기록에서

실제로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다 보니까...

 

시대정신까지 맞춰 과감히 적용해본겁니다!

 

 

 

그런데 저 위에 무슨 동물얼굴하고

 

풀무늬가 섞인 깃발이 있죠? 이건

 

과연 무엇일까요!?

 

 

일본 에이후쿠지 소장 통일신라 귀면번

 

 

 

이것은 일본 에이후쿠지 ( 예복사 )

 

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 귀면번!

 

 

 

묵서에 기록된 기록으로 인하여 사실상

 

가장 완벽한 통일신라 직물로 판명된

 

번 이라는 불교용품 입니다!

 

일본 에이후쿠지 통일신라 귀면번은

 

동봉된 묵서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 신라국헌상지번 ]

 

 

 

이 직물에는 통일신라 귀면 , 혹은 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당초문까지 채색된

 

거라서, 통일신라 직물과 채색문화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진짜 중요하고 귀한

 

사실상 통일신라 직물로 확정된 번 입니다!

 

 



하여튼...

 

 

 

장대석 태극부터 난간양식까지

 

외국의 자료까지 참조하여 과감하게

 

적용을 해서, 건축물을 만들어봤는데요.

 



이번 사모정 작품에는 당나라 / 일본

이 두나라의 건축양식을, 최대한 교차검증해서...



통일신라때 있었을법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하여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고구려 연화총 - 5세기 전반 추정




태극무늬는 고구려 고분과

백제 목간의 채색법 / 당나라 채색법

모든것을 염두해서 참고해서 그렸습니다.



고구려때는 빨/흰/검 채색이고

백제는 흰 / 검으로 단순채색 했습니다.






디자인은 백제와 고구려를 기반으로 하되

적/녹/파 이렇게 3가지 색상이 메인이 되는

통일신라 시대의 채색 방식을 염두하여.....



현대의 태극마크 색상으로

채색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보다

후 시기의 건물이라 이런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모정 기둥에

금빛 금동장식을 사용했는데요.

통일신라 건축물의 기둥같은 경우...



저런식으로 도금한 금동장식을

기둥 윗쪽에 사용하여 , 기둥을

화려하게 꾸몄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해박물관 소장 , 창녕출토 통일신라 기둥금동장식 금구.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제로

통일신라 기둥머리 금동장식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김해출토 기둥 금동 장식은

8cm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김해박물관 설명에 의하면 기둥 금동장식에

 

아주 약간의 대좌 장식구 1개도 붙어있다.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대좌 장식구가 붙어있다! 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 김해박물관이 소장중인...



통일신라 금동기둥장식은 거의 98%

작은 닫집이나 소형 불감에 사용했던

기둥 장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화암사 닫집. 닫집 기둥과 가구에 금동장식같은 금칠을 했다. 마치 통일신라 건물같다. 사진출저 - 영남일보

 

 


그러니까 윗 사진의 조선시대 닫집하고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화암사 닫집을 보면 아시겠지만

목조 가구들에 금장식을 설치한듯한

금칠을 해는습니다. 마치 신라건물 같죠?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 닫집. 서까래와 부연. 추녀와 사래에 금칠을 했고 엄지기둥에는 황금 법수까지 있다.



 

그래서... 아마도...

 


창녕출토 통일신라 기둥금동장식 금구도

저렇게 생긴 건물에, 저런식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보시면 됩니다.

 

 


( 8cm 크기니까 이렇게 예상 가능합니다! )

 

 


다만 조선시대 닫집하고 다르게

기둥머리에 사용한 것이죠.

화엄사 대웅전 닫집. 서까래 금칠 / 창방 / 기둥금칠은 마치 통일신라 건축같다. 닫집 금칠문화는 통일신라부터 비롯된 문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조선시대 닫집들의

 

이런 금으로 꾸미는 문화는.....

 

 

 

통일신라때부터 전승되어온

문화인거 같다고 생각한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냥

 

제가 만든 통일신라 사모정을

 

윗쪽 닫집하고 비교해보시면 이해하실겁니다!

 

 

 

 


동궁과 월지! 구 안압지에서

발견되 금동장식하고, 창녕출토

기둥 금동장식을 건물에 적용하면,



조선시대 닫집하고 진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김해박물관 소장 창녕출토

통일신라 기둥금동장식은...



비록 8cm이고, 닫집이나 혹은

감실에 사용해서, 실제 건물에 사용 한건 아닙니다.

 

그.... 그치만...... 여튼간에 기둥에 사용한건 맞으므로!



실제 기둥에 금동 장식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은 상황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이유!


그 이유는 조선시대 기둥 금동장식하고

교차검증이 나름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경복궁 / 창덕궁 등등 조선시대

궁궐관련 건축물에서는 정말 쉽게

기둥에 금속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보통 기둥에 사용하는 철물은

띠철 이라고 부르는데요 ( 혹은 띠쇠 )



이 띠철은 기둥 윗부분이 벌어지거나

터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설치 합니다.


송광사 대웅전 기둥장식




근데 이거 무조건 기둥 보호하려고만

 

설치하는가? 라고 한다면... 이게 의외로

 

장식성을 위해 설치하는 경우도 있는듯 합니다.

 

 

 

왜냐면.....

 

 

 

기둥 금속 장식은 궁궐뿐만이 아니라 각종

사찰에서도 간헐적으로 확인 됩니다.

 



또한 좀 얆아서 기둥 터지는걸 방지한다!

 

라는 목적 보다는 장식용품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사진의 기둥 장식은

 

송광사 대웅전인데요.

 

 



송광사는 신라 / 고려의 건축 문화가

가끔식 발견되는 곳이라... 기둥 장식도

신라의 전승된 건축양식일 가능성이 있어요.

 

은해사 암자 백흥암 기둥장식

 



또한 은해사의 말사인 백흥암 이라는

사찰에서도 발견 됩니다. 이게 진짜

 

별거 아닌거 같지만,

 

 

 

김해박물관 소장 창녕출토 통일신라

 

기둥금동장식 / 조선시대 닫집에 금칠

 

 

 

실제 건물이 아닌 것들하고

 

실제 건물하고 실제 그 나름대로

 

교차검증이 되고있는 것이죠.

 

 

 

실제 건물이 아니더라도 무작정

 

진짜건물 아니라고, 개무시하면 안된다!

 

라는걸 보여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불영사 법당 내부 영산회상도

 

불단 기둥도 보시면 무언가 띠같은

 

방식으로 꾸민것이 확인됩니다.

 

 

 

이렇듯..!

 



기둥머리 장식은 진짜 신기하게도

통일신라때 개창된 / 혹은 전성기를

누린 사찰들에서 극소수로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진짜 건물용은 아니지만 8cm 정도 사이즈로

건물 모양의 물건, 하여튼 기둥에 사용했다는 점

 

 

 

등등...



기둥 머리쪽을 금동장식으로 꾸미는 방식은

통일신라시절에 실제로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소형 나무기둥과 원형 금동장식

 

 

 

또한 통일신라 자료는 아닙니다만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기둥과

나무기둥을 장식하는 원형 금동장식이 발견됬어요.



비록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고 삼국시대 자료고...

왕릉의 나무판문하고 관련된 완전한 기둥은 아니고...

 


높이 14.7cm 지름 7.1cm 정도의 매우 작은

나무 기둥입니다만, 하여튼 나무기둥에다가

원형 금동장식을 부착한 문화가 확인됬습니다!

 

 

삼국시대 단청은 붉은색과 초록색 , 흰색으로 채색하는 문화가 발견 된 것이다..

 

 

 

나무기둥에 금속의 원형 금동장식을 부착한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백제 무령왕릉 출토 소형 나무기둥에는

붉은색 안료 / 초록색 안료 / 하얀색 안료까지

발견되었어요. 삼국시대 단청색상까지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서..... 비록 통일신라 게시물이지만

이렇게 많은분들이 재미나게 보시라고 올려봅니다. 

 

 




그래서 일단은 발견된 기둥장식은

특이한 山모양 금동장식 입니다만,



의외로 그냥 평이하게 생긴 띠모양

기둥 금동장식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조선시대 기둥머리 장식이 하나같이 그냥 평이한 띠모양이라... )




제가 예전에 만든 사모정의 밋밋한

기둥금속장식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렇게 만들었던것 입니다!

 



이번에는 외부 포작을 알아볼까요?

 

건물을 받쳐주는 포작같은 경우는

굉장히 일본 스럽다고 생각하실겁니다.

 


* 포작이란 ; 지붕처마밑에 포크처럼 생긴 브라켓들을 설치하는 방식을 말한다. 

 


포작같은 경우에는 아랫쪽의 사진을

보면, 왜 이렇게 일본스럽게 구성을

했는지 한번에 이해하실 겁니다.

 

 

 

 


지붕을 받쳐주는 시스템인 포작은

이러한 자료들을 참조하여 만들었습니다.



758년 일본 당초제사부터

1312년 대은사 소장 고려관경서분도 회화

1484년 조선 개심사 심검당



이 건물들의 포작은 한결같이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에 만든

고려시대 후기 건축물 인데요,



외부는 일반적인 고려후기 ~ 조선시대 초기

주심포 건축물의 포작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내부의 내진고주 포작은 조금 다릅니다.

758년 당초제사 금당하고 같은 소첨차만

2개가 올라가는, 통일신라 타입 포작 입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이렇게 통일신라 건축양식의

흔적이 약간이나마 남아있답니다. 신기하죠!?

 

 



비교사진들을 보시면 아마 벌써

눈치 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신라 시절의... 동시대 건축물인

일본의 당초제사 금당 ( 758년 )



이 건물의 포작하고 우리나라 건축회화및

실제 건축 포작하고 거의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건축양식을 참조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또 다른 비교사진을 보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엄청나게 쉽게 이해를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중국 - 일본 - 한국은



통일신라 즈음에는 건축양식이 서로 굉장히,

아니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건축 양식이 ... 조선시대 건물이나

신라 석탑에서 발견되거나, 중국의 건축 양식이

신라의 석탑이나 건물에서 발견되는 등등...



한중일 삼국의 건축 양식은 진짜 굉장히

비슷하고, 사실 거의 똑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포크처럼 생긴 브라켓 사이에 일자 막대기 = 동자주 라고 한다.

 

 

 

그런데 제가 만든 건축물의 사진을

 

보다보면, 주심포 양식 건축이면서

 

화반대신 그냥 막대기를 설치했죠?

 

 

 

이것은 화반대신 사용하는

 

동자주 라고 하는 건축 부자재 입니다.

 

 

 

이 동자주를 보고 아마 꽤나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실수도 있습니다.

 

 

[ 통일신라 건축이라매? 왜 일본꺼 따라함 ? 미쳤음 ? ]

 

 

 

일본 야쿠시지 삼문. 일자막대기 동자주가 보인다 . 일본에서는 동자주를 화반으로 사용하는것을 굉장히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화반대신 사용한 동자주 라는것은

 

일본에서는 아직도 현역이고,

 

 

 

왠만한 사찰에서 굉장히 쉽게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라서 아마도 보통...

 

 

 

주간포에 설치된 동자주를 보면

 

무조건 일본! 을 떠올릴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동자주를 왜

 

설치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진들을 쭈욱 보시면 아시겠죠?

 

 

 

동자주를 화반대신 사용하는건

 

일본에서 시작한거도 아니고,

 

일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통일신라 실상사 3층 석탑부터 이미 발견되기

 

시작해서, 조선시대때 알게 모르게 미친듯이!

 

엄청많이 사용하던 건축양식 이었습니다!

 

 

 

고구려 용강대총 - 사람인 人 모양 화반 사이사이에 동자주 화반이 보인다.

 

 

 

또한 동자주는 5세기 추정

 

고구려 용강대총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인할수 있어요. 삼국시대부터 이미...

 

 

 

동자주를 화반처럼 사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동자주는 되려 우리나라가 훨씬 먼저 사용한

 

건축양식 이랍니다.

 

 



제가 만든 건물 사진을 보면서,

 

특히나 건물의 단청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해요.

 

 


[ 뭔 근거로 단청을 이렇게 그렸냐 ?? ]



라고 생각하실겁니다. 그래서

설명스샷을 만들어봤습니다!

 

 

 


일단 단청색상이 대부분 붉은색으로

 

채색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안압지에서 실제 통일신라 건축 부자재들이

대거 발견되었는데요, 몇몇 건축 부자재,

 

 

 

특히 첨차와 서까래쪽에 집중적으로

붉은색 안료를 칠한게 확인되었습니다.

 



비록 붉은색 안료가 주칠인지

아니면 주토인지 , 석간주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건축물에 실제로

붉은색 안료로 단청을 칠했다는 사실이

한참전에 이미 확인된 것 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통일신라 건축물의

서까래와 첨차및 각종 건물단청의 기본

색상이 붉은색인 이유는,



실제로 안압지에서 붉은안료가 도색된

건축부자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단청을 그렸습니다.



또한 안압지발굴 붉은단청이 채색된

통일신라 서까래 / 소첨차 같은 붉은단청은

봉정사 극락전 단청하고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봉정사 극락전의 단청 또한

첨차 / 창방같은 건축부재에
주칠같은

 

붉은 안료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안압지 출토 첨차도 붉은단청이 출토되었는데

 

봉정사 극락전 첨차도 대부분 붉은색 단청이죠.

 

그래서 나름 색상의 연관성이 있는겁니다.

 

 

 

통일신라 안압지 출토 첨차쪽 붉은단청과

 

통일신라 암막새 풀꽃무늬 도안,

 

 

 

고려시대 봉정사 극락전 단청의 붉은단청및

 

풀꽃무늬 도안이 통일신라하고 비슷하단 점!



이런식으로 통일신라 단청하고

고려시대 단청이 생각보다 꽤나

 

연관성이 강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단청을 그렸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의 단청은 통일신라적 요소가

 

분명히 발견되기 때문에, 통일신라 단청을

 

그릴때 기본적으로 참조해야 합니다!

 

 

 

봉정사 극락전 단청은 이런식으로

당나라 / 통일신라 단청 도안하고

매우 닮아있습니다.



당연히 봉정사 극락전 단청이

훨씬 더 발전된 모습입니다만!



풀무늬 생김새가 기본적으로는

매우 닮아있는것이 확인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신라 단청을

재현 / 복원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봉정사 극락전 단청을 활용해야 합니다.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안료그릇. 초록색과 석간주가 발견되었다.

 

 

 

또한 동궁과월지 ( 구 안압지 )

에서 초록색 안료가 확실하게

발견되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살짝 에메랄드

파란색 같은데 , 연구자들이

이미 초록 안료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통일신라 단청은 초록색은

무조건 사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봉정사 극락전 단청을 기준으로

 

각종 자료를 참조하여 단청을 그렸어요.

 

 

그뿐만 아니라 각종 통일신라 출토

석조물들 / 발해 단청 / 당나라 단청/

조선시대 단청까지 참조해서 그렸습니다!

 

 

 

 


특히 봉정사 극락전 단청을 기반으로

 

통일신라 여러가지 석물들 중에서

 

특히 암막새를 많이 참조했습니다.

 

 

 

왜냐면,

 

 

 

암막새에서 실제 단청하고

거의 똑같은 무늬가 굉장히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감은사지 출토 암막새. 단청무늬처럼 생겼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감은사지 출토 암막새는 둥그런

 

꽃무늬와 마름모 모양의 꽃모양

 

단청이 연속되는 모양인데요,

 

 

 

감은사지 암막새 단청도 참조해서

 

뜬창방 단청에 적용해 그렸습니다.

 

 

발해 삼릉은 주칠보상화 , 컬러보상화 2종류의 보상화문을 그렸다.

 

 

 

그런데 짜잔!

 

감은사지 암막새들의 단청도안은

 

발해에서 실제 단청으로 사용했어요! 

 

 

 

발해 삼릉에 있는 단청 무늬는

 

둥그런 꽃무늬와 꽃무늬 사이사이

 

삼각형 풀무늬가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런식으로  암막새 무늬들은 실제로

 

단청에 사용된 도안들을 기초로 만든

 

사실을 직접 확인하신 겁니다!

 

 

 

참고로... 꽃이 계속 교차하는...

 

 

 

이런 단청무늬를 보통 보상화문

 

이라고 부른답니다. 이번에는 보상화문

 

단청의 각종 국내 자료들을 확인해보겠습니다.

 

 

 

감은사지 암막새, 발해 삼릉의

 

보상화문 단청은 일단 통일신라

 

각종 자료에서부터 그 패턴을 확인할 수 있고,

 

 

 

고려 ~ 조선까지 나름 모습이 조금씩은

 

변했지만...  나름 꾸준하게 사용되었던

 

단청 패턴입니다!

 

 

 

조선시대때는 그다지 즐겨 사용한 패턴은

 

아니였고, 모습도 꽤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패턴 만큼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보상화문 패턴을 단청으로 가장

 

확실하게 사용했으며, 통일신라하고

 

가장 가까운게 바로 발해 삼릉 입니다!

 

 

발해 삼릉. 붉은주칠 보상화 무늬 / 흰배경의 오채색 보상화 꽃무늬 단청이 확인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화 무늬 단청은

 

발해 단청을 참조를 할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보상화문 단청 패턴 중에서는

 

신라하고 가장 가까운 시대가 발해라서

 

그렇습니다.

 

 

발해 삼릉2호분 단청을 복원하면 이런 모습이다.

 

 

 

또한 발해삼릉은 패턴부터 채색방식까지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참조하여 단청에 적용했던겁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서 보이는 통일신라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단청들을 최대한 확인하여,



통일신라 / 당나라 / 헤이안시대때 유행하던

채색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렸습니다.

 

당나라 고분 출토, 당나라 첨차 단청

 

 

 

실제 당나라 시절 브라켓 단청 입니다.

 

당나라 단청도 반드시 참조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채색법이 대놓고 고려시대

 

단청하고 매우 닮아있어서 그렇습니다.

 

 

 

특징은 하얀색 테두리 + 붉은색 배경색 + 풀꽃무늬

 

이런 특성이 고려시대 단청에서 그대로 보입니다.

 

 

 

 

 

윗쪽이 봉정사 대웅전의 고려시대 단청입니다.

 

하얀색 테두리 + 붉은색 배경색 + 풀꽃무늬

 

 

 

대놓고 당나라 단청하고 색 구성이

 

매우 닮아있는것이 확인 됩니다!

 

 

 

당나라 단청을 참조 안할래야 안 할수가

 

없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만든 사모정은 이렇게.....

 

 

 

브라켓 배면에 흰줄을 넣은 이유도!

 

브라켓 테두리를 흰색으로 칠한 이유도!!

 

모두 후삼국시대 단청으로 추정되는 !!!

 

 

 

봉정사 대웅전 단청의 배부분 단청의

 

분선긋기를 참조하여 그린 것 이랍니다!

 

 



기둥단청같은 경우는...

윗쪽의 설명샷에 적힌 이유가 있어서

기둥단청까지 그려넣은 것 입니다.

 



통일신라때 기둥단청을 칠한 건물은

소수였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분명히 있었을 양식이라 적용했습니다.


불국사 대웅전은 1756년 중건했고, 단청은 1767년 완성되었다.

 

 

 

외부 기둥 단청은 사실상 멸종했습니다.

 

 

그러나!

 

 

내부 기둥 단청은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부 불단 기둥에 한정하여, 기둥단청을 채색하는

 

양식이라도 남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여튼 아직까지도 내부기둥 ,

 

특히나 불단 기둥에 한정해서...

 

기둥 전체를 채색하는 문화가 남아있고.....

 

 

고구려 수산리고분 (5세기 후반 ). 기둥단청에 삼각형 무늬도 있다.

 

 

 

기둥 전체를 단청하는 양식은

 

이미 4~5세기 고구려 고분에서

 

주구장창 확인되는 양식이죠.

 

 

여튼 고구려 고분은 모든 기둥을

 

고사리무늬로 엄청나게 단청을 했으며...

 

 

1025년 추정 거돈사지 원공국사대탑

 

940년 추정 흥법사 진공대사탑, 기둥에 그림이 조각되어있다.

 

 

 

고려시대 승탑에는 기둥에 단청마냥

 

조각을 한 양식이 생각보다 자주발견

 

됩니다.

 

 

그래서 외부에 기둥단청을 칠하는건

 

삼국시대 ~ 고려시대 까지는 어느정도

 

사용되다가,

 

 

조선시대 즈음해서 멸종한 것으로...

 

현재까지는 이렇게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 단청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서, 어느정도 까지는 유추가 가능

하기는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추정 입니다.




100% 완벽한 고증은 아니란 것이죠.

사실 건물이 남은게 아니라 100%는

 

있을수도 없죠 뭐...... 하여튼.....!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통일신라 관련 채색 자료를을

전부 수집해서! 비교분석 하다보면.....



어찌저찌 단청을 꾸역꾸역!

최대한 비슷하게는 만들수 있지만

100% 완벽한 고증은 아닙니다.

 

 

신라의 달밤은 이런 모습이 아니였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고 고증에 맞는 단청은 무엇일까요?



그나마 완벽 고증에 98% 이상 근접하는

단청이라면 역시 [ 주토단청 ] 입니다.



주토단청은 흰벽 + 붉은흙 주토안료

딱 2가지만 사용한 가칠 단청입니다.

 

보통 주칠단청 이라 불리우는 단청입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안압지 ( 동궁과월지 ) 여기 발굴할때

건축물 부자재들이 발견 되었는데요,



특이하게 하나같이 주칠 혹은 주토같은

붉은색 안료가 칠해진 건축자재들만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아주 100% 정확하게 출토된

단청안료만을 고집해서 단청해야 한다면,

건물 전체를 붉게 칠하는게 100% 정답인 상황 입니다.

 

 

 

 

[ 지식 ] 통일신라, 삼국시대 건축 주칠단청과 흰색벽 고증해보기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신라 단청이나 삼국시대 단청은 이런 모습 입니다. 삼국시대는 이런 모습이 고증에맞다고 보면 됩니다. 근데 통일신라는 단청자료가 아예 없는 수준인데요...   그래

vpb192kh.tistory.com

 

 

그렇기 때문에 현재 까지는...

 

흰벽에 붉은칠만 칠한 단청이

가장 고증에 맞는 단청입니다.



이 흰색벽 + 붉은색 단청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시다면..!



윗쪽의 링크를 눌러

 

[ 흰벽과 주칠단청 고증 ]

게시물을 정독하시면 됩니다!

 



이번에는 건축 금동장식에 대해 알아볼게요.

건축물에 금속장식 사용한 문화는 통일신라부터

시작된것으로 일단은... 여겨지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만든 사진 보면 이해가시죠!?

 

건축용 금동장식이 엄청나게 발굴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장소는 여깁니다.

동궁과 월지 ( 예전 안압지 )



이곳을 발굴하면서 건축물에

사용했던것으로 추정되는 여러가지

금동장식들이 이렇게나!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KBS역사스페셜 2005년 11월 4일 방송분

 

 

 

예전에 KBS에서 역사스페셜할때

 

실제 안압지에서 발굴된 건축양식을

 

그래픽으로 재현한 적이 있는데요.

 

 

 

저 사진이 그 사진 입니다. 여튼.....

 

 


안압지에서 발굴된 금동 장식들을 설치하는 방식은 

 

보통 이런식으로 설치하는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동궁과 월지 ( 예전 안압지 ) 출토 금동장식들은 대략 이런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면된다.

 

 



KBS 역사스페셜은 20년전 방송이고

난간만 보여줘서 금동장식들 사용법을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만!



발굴된 금동 장식들이 대부분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알기 쉬운것들이 많아서

재현하는데 크게 문제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금속장식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에 대해서 나름

국내자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용법은 의외로

조선시대 건축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 건물은 승재정 입니다.

이 건물은 창덕궁 비원에 있는 건물인데요,



[ 윗쪽에 있는 안압지 금동장식 자료들하고 ]

비교해 보세요. 거의 모든면에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승재정은 1칸 건물이지만...

건축양식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사모지붕 + 화려한 뿔장식 + 난간 + 난간에 붙은 금속장식들




이거 어디선가 왠지 많이

본거 같은 느낌이 들죠!?

 

통일신라 석등 , 포렴 , 지우산, 나전자단오현 비파를 설치해봤다.





그렇습니다!

제가 만든 사모정하고 모든면에서

구성이 거의 똑같습니다 . 신기하죠?



이 게시물을 보면 아마 쉽게

이해를 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신라 자료부터 확인 가능한

사모정 + 뿔장식 + 금동장식으로

건물을 꾸미는 화려한 건축 양식은...



의외로 조선시대까지

제대로 전승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궁궐인 창덕궁및 비원 , 경복궁에서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이 재밌죠!






조금 다른거라면 조선시대 건물은

나무판문 대신 창호문을 사용하고

금속장식이 강철 위주라는 점 정도?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일제시대 이전의, 조선시대 후기

건물은 조금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구한말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순종과 관료들 사진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금속장식 사진을 보면

통일신라 금동장식들 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사진들이 꽤나 발견 됩니다. 



남아있는 사진들 때문에

조선후기 건물에 사용되는 금속

장식들은 금빛으로 빛나는 구리장식!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요.

솔직하게 이거 추측도 아닙니다.

실제로 금빛 금속이 맞습니다.

 

실제 인정전 경첩. 금색이다. 구한말 인정전 사진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건 제가 직접 찎은 사진인데요.

실제로 지금 인정전에 가보셔도

경첩같은 경우는 금빛으로 빛납니다.



일제시대 인정전의 금속 띠쇠들은

전부 빛나는 금색이잖아요!?

 

 

 

저기 보이는 금빛 금속들이 사실

 

실제로 아직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창덕궁 희정당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건물입니다.

 

 

 

희정당은 문고리, 돌쩌귀, 경첩

 

내부 띠쇠 같은 것들이 실제로 

 

금빛으로 빛납니다.

 

 

 

구한말 사진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며... 사진이 잘못 찍힌것이

 

아니라는걸 입증하고 있는거죠.

 

 

 

그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건물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강녕전 앞쪽 문인 양의문. 정자쇠 /창호문 돌쩌귀 , 문고리 등등 전부 금빛으로 빛난다.

 

 

 

이 문은 강녕전 앞에 있는 양의문이라고 합니다.

 

경복궁 자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한말 사진같은 모습은 진짜 눈씻고 봐도

 

하나도 없는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

 

구한말 사진이 진짜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

 

 

 

양의문에는 실제로 아직까지 금빛으로 빛나는 금속류

 

( 이런 금속들을 통틀어 금구 라고도 부름 )

 

 

 

금빛의 금구가 아직까지 양의문에

 

아주 약간이지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쵸!? 양의문 천장을 보시면 저렇게

 

판문 여닫이 할때 선넘지 말라고 설치한

 

금속이 있는데요, 저 금속이 아직도 금빛입니다!

 

 

 


이 사진만 보면 이거 사진이 잘못

찍혀서 금빛으로 빛나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만...


인정전의 경첩은 금색인데 창호문 금구는 검정색이다. 복원을 너무 애매모호하게 한게 아닌가 싶다.




궁궐 건축물의 금속 장식은

금빛의 금속으로 만든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증거가 잔뜩 남아있어요.

사정전의 금속 장식들은 밝게 빛나는 금속이었다.

 

 

 

뭐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금빛의 금속 금구들을 사용하여...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정궁같고

 

궁궐같은 느낌이 강했던 조선시대 궁궐들은.....

 



아마 일제 ~ 근대시기를 거치며...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전부 단순한

 

검정색 철물로 싸그리 바뀐듯 합니다.

 



너무 아쉽지 않나요!? 저렇게 금색으로

빛나는 금구를 사용하던 사정전은 지금.....



현재, 사정전의 금속장식은 전부 검정색 철물로 변해있다.

 

 

 

구한말 사진하고는 180도 다른

 

그냥 검정색 철로만든 금속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정전의 이런 모습이 의외로

 

고증에 맞지 않는 모습이란거죠.

 

 

 

고증할 자료가 없는거도 아니고

 

이건 좀 너무 좀 그렇지....않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금의 경복궁이나 창덕궁

 

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아예 찾아볼수가

 

없다는게 황당할 뿐 입니다...;;

 

 

 

통일신라 부터 내려온걸로 추측할수 있는

 

금빛의 금속을 건물에 부착하여 꾸미는 문화!

 

 

 

당췌 무슨 이유땜에 싸그리 사라진건지 궁금하네요.

 

사진의 교태전 같은 경우도 저렇게 빛나고 있는데...

 

 

궁궐 난간 정자쇠는 결국 검정색 철물로 싹다 바뀌었다.

 

 

 

이제는 검정색 철물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쉽지 않나요? 본디 금빛으로 빛났을

조선시대 궁궐이 이런...



칙칙한 검정색 철물만을 잔뜩 사용하여

 

격하되어 있는 사실이 너무 아쉽습니다.

 

 





그리고 금빛의 구리만 사용했느냐!?

라면 그것도 아닙니다! 조선시대 또한

[ 금동장식 ]을 건물에 직접 사용했습니다.



의외로 정자 건축물 장식에는

[ 도금한 금동장식 ]을 실제로 사용 했어요.


[ 금도금 금동장식 ]은 조선시대 조차

실제로 이용하던 근본 건축양식 입니다.
 

 




통일신라 시절 금으로 장식하던

 

화려한 건축 금동장식 문화는...



보통은 잘 모르시지만

조선시대까지 아주 제대로!



확실하게! 전승된 근본력이

넘치는 건축양식 그 자체에요!



일본 사이후쿠지 소장 ( 서복사 ) - 14세기 추정 관경십육관도. 난간의 화려한 금동장식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런 금동장식 문화는

고려시대 회화에서도 확인되요.



난간에 금속을 사용하는 건축양식이

얼마나 근본력이 넘치고 조선시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건축 양식인지...




이제는 좀 이해가 되시죠?




제 생각엔 21세기 들어와서 너무

심하게 퇴화 되어버린 건축양식

같아서 너무나도 아쉽읍니다.....






이번에는 현판을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신라때 현판이 실제로 있었냐 한다면...



일단 진짜 건물용 현판은

100%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 감실 / 닫집 ] 용도로

추정되는 현판이 발견되었습니다.

동궁과월지 ( 구 안압지 ) 출토 소형 불감 / 감실용 통일신라 현판 - 불감제일 이라고 적혀있고 주칠과 옻칠이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동궁과월지 (예전 안압지)

 

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현판 입니다.

 

( 또는 편액 이라고도 부름 )...!!



제가 만든 사모정의 현판은 이

현판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습니다.



다만 현판의 단청같은 경우에는

창작입니다. 어떻게 창작했느냐!


정창원 소장 통일신라 추정 양탄자. 매신라물해 때문에 통일신라 양탄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 가장 화려한 통일신라 채색자료다.

 




바로 일본 정창원 소장 ( 쇼소인 )

통일신라 양탄자로 추정되는 !!!

 


[ 통일신라 양탄자 화전 ]

이것을 참조하여 현판 단청을

진행하였습니다. 아주 멋있죠?




통일신라때 유행한 5빛 이상의

운간 채색법과 채색 방식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통일신라 양식에 맞게 창작 했습니다.



현판의 붉은색에 금빛 글씨는 고려도경

회경전 기록에 의거하여 적용해봤습니다.

( 현판 글씨가 무슨색 인지는 고려도경쯤 가야 두개정도 나옵니다... )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 965년 추정 )

 



통일신라는 감실용 현판이 발견됬고

이를 약간이나마 뒷받침해줄 자료로써...



고려시대 비석에 , 안압지 출토 현판하고

진짜 똑같이 생긴 조각이 있습니다!

 



저 비석의 이름은 바로 이것입니다.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 965년 추정 )



고려시대 비석인데요, 비석에 조각된 조각이

동궁과 월지! 안압지에서 발견이 된 현판하고!

매우 똑같이 생겼습니다.

 

금강산 장안사 사성지전 현판. 통일신라 현판및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현판하고 아주비슷하게 생겼다.



 

이 현판은 금강산 장안사에 있었던

사성지전 이라는 2층 건물에 걸려있던

현판 입니다.



이 현판에 대한 해설이 특별히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현판의 모양및 특징을

보면 아마 고려시대 현판으로 판단되네요.

 



아마 장안사 사성지전 현판은 진짜 못해도

조선시대 초기 현판인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장안사 사성지전 현판 /

통일신라 불감제일 현판 /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현판조각



이 세가지가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이렇듯이 통일신라 ~ 고려시대 즈음의

돌조각 , 석물들에 의외로 목조 건축양식들이

몇개씩 남아있는 모습이 관찰 됩니다.

 



석조물 조각이라고 무작정 깡그리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로현판은 의외로 조선시대까지

그 모습이 크게 변형되지 않은채, 그 나름대로

전승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특히 송광사 조계문의 현판이

 

그런 특성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송광사 현판은 고려도경 기록에

 

존재하는 파랑색 현판 기록하고

 

거의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 고려시대 금색글씨 + 파란색 현판 기록 ###

 

 

 

고려사 > 권18 > 세가 권제18 > 의종(毅宗) 10년 > 10월 ;

 

신하들에게 궁궐을 구경시키고 잔치를 베풀다



처음에 왕이 궁궐 동북 언저리에 하나의

 

전각을 지어 [충허각(冲虛閣)] 이라고 편액하였다.

 

그 편액은 황금빛과 푸른빛이 선명하였다. 

 

 

 

 

또한 서울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

 

현판도 그렇습니다. 가로일 뿐,

 

 

 

동궁과 월지 현판하고 생각보다

 

패턴이 많이 비슷하지 않나요!?

 

 

 

게다가 이런 재미있는 특성은

 

조선시대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우리들은 고려 / 조선 / 통일신라 / 삼국시대

이 시대들을 다른나라마냥 딱딱 나누어서

분류하려고 하고, 모두 다 다를꺼다!



라고 생각하지만...

통일신라 양식이 조선시대까지 문화적으로

전승이 잘 된 경우가 꽤나 많은 상황이랍니다.

 

 

 

동궁과 월지 출토 현판에 붉은 옻주칠이 칠해져있다. 그래서 고려도경 기록을 바탕으로 현판바탕을 주칠로, 글씨는 금색으로 칠한것도 있다.

 

 

사실.....

 

 

통일신라때 현판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나름대로 자주 발견됩니다.

그 기록중에 하나는 이것 입니다.




삼국유사 권 제5  - 제7 감통(感通第七) 

욱면비념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 / 욱면등천지전(勖面登天之殿)




808년, 불전에 현판을 설치했는데

불전의 현판 이름을 욱면등천지전(勖面登天之殿)

이라고 편액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안사 사성지전은 통일신라 / 고려시대 초기 현판하고 닮아있다.

 

 

 

아무튼 제가 만든 사모정의

통일신라 현판은 이런 레퍼런스들을

참조하여 만들었습니다. 신기하죠?



뭐 완벽한 복원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 통일신라때 현판에 조각은 했어도 )

 

( 어떻게 채색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므로!  )

 

 


아무튼 생각보다 자료가 꽤 많기 때문에

이렇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료중에서는 조선시대 자료도

있다는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3층석탑 2개및 20m가 넘는 대웅전이 있던걸로 추정되는 신라고찰 남리사 추정재현, 대웅전은 안압지 정전까지 참조했다.

 



그리고 지붕에 초록색 기와를

아주 잔~뜩 사용했죠? 통일신라때

초록색 기와는 녹유기와 라고 합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통일신라때

녹유기와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팔작지붕 건물은 이런 레퍼런스를 참조했습니다.


통일신라 남리사지 금당 ( 전 신라 염불사지 )

동궁과 월지 제1 정전 ( 전 안압지 )

 

 

 

이 두곳의 금당및 정전 사이즈를

 

기반으로 통일신라 금당을 만들었습니다.

 



둘다 정면 7칸에 25m쯤 되는 건물입니다.

기단은 황룡사 서금당의 전축기단을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든 금당의 지붕들을

 

보시면, 초록색 기와들을 많이 사용했죠?

 

 

초록색 지붕의 뿔 장식이나 귀면와 등등...

 

통일신라는 의외로 초록색을 많이 사용했어요.

 

 

 

녹색 유약 기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절 녹색 유약기와들은

 

당와라고 부른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보통 녹유와라고 부릅니다.

 

 

 

 

 

초록색 녹유 치미하고 녹유 막새및

 

녹유 귀면와로 장식한 통일신라의 지붕.

 

 

 

의외로 통일신라는 지붕 테두리들을

 

초록색으로 장식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실제 출토되는 초록색 기와들로써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동궁과 월지 ( 구 안압지 ) 출토 녹유 귀면와

 

 

 

지붕 처마에 설치한 초록색 귀면와.

 

실제로 동궁과 월지는 물론 각종 통일신라

 

사찰들에서 생각보다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태가 매우 훌륭한 녹유 귀면와가

 

생각보다 여기저기서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https://museum.dankook.ac.kr/web/museum 석주선 박물관 - 고려시대 녹유치미

 

 

 

 

단국대학교 소장 녹유 치미.

 

이렇게 날개처럼 생긴 지붕의

 

뿔장식을 치미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실제로 초록색의 녹유치미가

 

실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로써.....

 

 

 

통일신라는 지붕에 녹유치미를 사용했다!

 

이게 직접적으로 밝혀진 겁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 박물관 소장 녹유치미는

 

고려시대 사찰터에서 출토 되었다고 합니다.

 

( 어디서 출토되었는지는 설명이 없네여 )

 

 

 

이 치미는 아마도...

 

 

 

 통일신라 후기 ~ 후삼국시대 , 고려시대초기

 

녹유치미 파편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신기하죠!?

 

 

 

경주 황복사 녹유치미편 - 사진출저 :&nbsp;https://m.blog.naver.com/chefjhkim/222896638115

 

 

 

그리고 경주 황복사에서

 

녹유 치미편이 발견되었습니다.

 

누렁색인데, 이게 왜 녹유치미 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일단 사진속 동그라미 표시 부분에 유약

 

흔적이 약간이나마 남아있습니다! 유약의

 

흔적이 일단 확실하게 있구요,

 

 

 

또한 녹유와는 , 유약층이 벗겨지면

 

매끈한 황토색 기와로 변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황룡사 출토 녹유전들 입니다.

 

초록색 유약층이 확실하게 보이는데요,

 

 

 

유약층이 퇴색된 곳들은 하나같이 매끈한

 

황토색 기와로 색이 변한게 확인 됩니다.

 

 

 

 

이제 그럼 잘 아시겠죠!?

 

 

 

 

윗쪽의 황복사 치미 파편은!!! 녹유기와 특유의

 

퇴색했을때 보이는 맨질맨질한 황토색 기와!

 

 

 

그리고 사진속 동그라미 표시 부분에 유약을

 

바른흔적이 아주 미묘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통일신라 / 후삼국시대 /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녹유 치미를 생각보다 꽤나 사용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외 녹유 수막새, 녹유 암막새및

 

녹유 귀면와도 실제로 많이 출토 되었어요.

 

 

 

말 그대로 생각보다 많이 출토 되었고,

 

통일신라 사찰터 여기저기서 초록빛의

 

녹유기와들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통일신라 녹유 암막새, 녹유 수막새는

 

이렇게 녹유가 아주 제대로 남아있는

 

객체들도 출토되었습니다.

 

 

 

그래서 녹유와의 색상이 꽤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상황 입니다.

 

 

 

 

그리고 수키와 하고 일체형인

민무늬 녹유수막새가 황룡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기와들은 일단은 고려시대

녹유 수막새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통일신라

건축문화가 꽤나 남아있던 것으로

 

예상 됩니다. 그래서.....



이 녹유 막새들도 통일신라 문화에 영향받아서

이렇게 만든 기와로 판단이 가능하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신라 유약 암키와

 

 

 

 

이 기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 사찰터 출토, 유약 암키와 입니다.

 

 

 

검정색에 가까워서 이게 그냥 유약만바른

 

기와인지, 아니면 녹유와를 굽는 와중에...

 

 

 

제대로 된 온도로 구워지지 않거나

 

탈색 되어버린 검정색 기와인지는

 

자세히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좀 아쉽지만 하여튼 통일신라 건물터에서

 

녹유와 추정 유약바른 암키와도 발견된겁니다!

 

( 녹유와는 제대로 안 구워지면 검정 ~ 누렁색이 됨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녹유암키와 추정 기와편

 



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녹유 암키와 입니다. 진짜 초록색

녹유 암키와도 일단은 출토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녹유 암키와는

정말정말 초초초 극소수 입니다! 그래도

일단 실제로 발견은 되었기 때문에...



통일신라 건물에 녹유와를 사용했다는게

점점 더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한 녹유와는 삼국시대 ~ 통일신라때는

 

[ 당와 ] 라고 부른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녹유 수키와

 

 

 

월지였나 여튼 통일신라 건물터에서

 

출토한 수키와 입니다. 유약이 다 벗겨졌는데...

 

 

 

표면층에 아주 미세한 유약이 남아 있어서

 

자세히 확인하지 않으면, 일반 기와로 보이는...

 

 

 

이런식으로 녹유와가 맞긴 맞음??? 싶은...

 

녹유기와들도 아주 가끔씩 출토되나 봅니다.

 

 

화성시 역사박물관 소장 녹유기와

 

 

 

화성시 역사박물관에서 소장중인

 

통일신라 건물터에서 출토된 녹유가

 

제대로 남아있는 기와도 출토 되었어요.

 

 

 

모양을 봤을때 암키와로 예상되고 있으며,

 

저품질 녹유와라서 누렁 검정색 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된 온도로 구워지지 않은 녹유와는

 

이렇게 누렁색 ~ 검정색을 띄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통일신라 건축물은

 

실제로 출토된 녹유와들을 적용한 겁니다.

 

 

 

절대로 무조건 상상으로만 만든것이

 

아니라, 이렇게 출토된 제품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건축물을 만들었답니다~~~!!!

 

 

 

녹유와들을 아주 공격적으로

 

적용한 통일신라건축물은 이런 모습이랍니다!

 

 

 

지붕 마루가 초록색이었다! 라는 강력한

증거는 없지만, 기와들이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초록색

녹유기와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으므로

초록색 기와지붕을 적용한 것 입니다.



심지어 치미조차도 녹유기와로 발견이

되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 했습니다.

 

 



이 건물은 1917년 재건한

백양사 대웅전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게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관찰해 주세요.



팔작지붕의 추녀마루를 자세하게

보시면, 뭔가 재밌는게 확인이 됩니다!

 

 



제가 만든 건물의 지붕을 확인해보세요!

백양사 대웅전 지붕하고 똑같죠!?



제가 만든 건물은 통일신라 건축물인데

어째서 구한말 건물인 백양사 대웅전의

지붕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있을까요!?



제가 조선시대 건물을 보고 따라 만든걸까요!?

사실 여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답니다!

 

 

 


이러한 이유가 있답니다!

다만 백양사 대웅전은 1574년 중창했다가

1917년 재건했습니다;; 이때 새로만들었죠.



그래서 저 지붕을 보고.....

[ 일본 건물 따라해서 만든거 아니냐? ]

[ 일제 시대니까 일본양식을 참조했을수도 있다! ]



라고 생각하실겁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실제로 일본 양식을 참조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양사 대웅전 외에는

일본이 직접!

 

 

 

대대적으로 수리한 사찰인

장안사 / 불국사 / 범어사 등등.....



일제시대때 대대적으로 수리한 사찰이나

일제시대때 교구본부로 지정된 사찰들을 확인해보면

저런 통일신라 양식의 지붕으로 수리하지는 않더라구요.



일제가 직접 수리해서 시찰까지 하러온 금강간 장안사 사성지전. 추녀마루가 전형적인 한국식이다.

 



저런 고식 지붕으로 수리한

 

예가 일단 아직까지 알려진걸로는

 

아직까진 백양사가 유일 합니다.

 

 

 

( 말 그대로 아직까지는.......요 )

 

 

 

 

금강산 장안사 사성지전도 일제가

 

공들여 수리했는데 추녀마루가 보통

 

한옥에서 볼 수 있는 추녀마루 입니다.

 

 

부산 범어사. 지붕들은 전부 일반적인 한국양식이다.

 

 

 


범어사도 일제때 나름대로

이것저것 건물을 조금씩 수리한

 

흔적이 있는 사찰인데요,



일본식으로 조금씩 수리했으나

지붕 마루는 전형적인 한국식 입니다.

 

 

 



불국사는 일제가 수리한걸로

엄청 유명합니다. 그렇게 일제가

엄청 공들여 싹다 수리한 불국사.



사진을 찾아보면 범영루부터 안양문,

자하문과 대웅전 등등 모든 지붕들은

일반적인 한국식 지붕과 내림마루 입니다.


일제가 수리한 불국사. 지붕은 전형적인 한국식 지붕이다.

 




일제가 한국도 지네나라 문화니까

한국 문화재를 다룰때는 의외인데요..!

 



한국 건축양식을 최대한 지켜가며

 

수리 한 것은 꽤나 유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고려나 신라같이 고대시대 건물일 경우는

자기들이 연구한 연구자료에 의거하여 나름.....

 



고려 / 신라 모습으로 건물을 복원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던게 일제 였습니다.

 

 

불국사 사리탑 보호각 . 완전히 일본식으로 만들었지만 추녀마루를 2단으로 쌓지는 않았다.

 

 

 

이 건물은 그냥 봐도 일본 건물이죠?

이 건물은 불국사 고려시대 승탑을

보호하려고 만든...

 


일명 불국사 사리탑 보호각 입니다.

누가 봐도 일본 양식인데요. 진짜로

아이러니 한건,

 



통일신라 시절 불국사에 있었을 법한

 

모습으로 아주 제대로 재현했습니다.

 

 

 

사실 걍 지네들 기술로 만든 일본 건물같은데

아이러니 하게도 고증에 충실한 건물인 것이죠...;;;

 

 

( 윗쪽의 포작사진 -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 도면을 참조하면 이해하실 겁니다! )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이겁니다.



일제가 자기들 건축양식 / 통일신라 양식을

교차검증해 만든 건축물 조차, 추녀마루를

2단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백양사는 대웅전은

협문에 조선초기 기와쌓기도 사용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백양사 외에는 일제조차 저런식으로

 

통일신라 양식으로 지붕을 수리했던

 

건물이 일단... 아직까진 백양사가 유일합니다.

 

 

 

이런 이유들이 있다 보니까.....

 

 

 

백양사 대웅전의 기와쌓기는... 일단은 무작정

일본이 지네나라 양식으로 지붕 쌓았다!

 

라고 하기에는.....



나름대로 통일신라에서 전승된 양식일수도

있기 때문에, 나름 참조해 볼만하여 이렇게

글을 올려봤습니다...!

 

 

 

 

사진들 보다보시면 담장이 눈에 띌겁니다.

이 담장은 과연 고증이 된 담장 일까요...??



네. 이 담장은

학술연구가 잘 진행된 담장 입니다.

이 담장은 [ 황룡사 판축담장 ] 입니다.



이 황룡사 담장은 실제 황룡사터에

실제 이 모양으로 복원하고 있습니다!

황룡사 터에 실제로 복원하고 있는 - 통일신라 시절 황룡사 판축담장 설계도 -

 

 

 

저 또한 이 도면에 나오는 황룡사 담장의

스펙을 그대로 따라서 재작한 것 입니다.




다만 보고서 나온 완벽하게 그대로

 

똑같이 복원한건 아니고....

 

 


이 보고서를 토대로!

 

4면을 모두 막는 방식으로...

 



오히려 실제 복원하려 했던 황룡사 담장의

규모를 더욱 증가 시켜서 재현/복원 해봤습니다.

 

 

국가유산청 > 간행물 상세 > 이미지형 > 황룡사 판축담장 축조기법 실험 및 설계

 

www.cha.go.kr

배너를 클릭하시면, 황룡사 판축담장 보고서 다운로드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아무튼 최근에 황룡사 담장을 실제

황룡사 터에 복원하고 있어서, 조만간

황룡사 담장을 실제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황룡사 판축담장 설계도와 실제로

복원하기위해 연구한 내용들이 더

 

많이 알고 싶으시다면,



링크를 클릭하여 황룡사 판축담장 연구

간행물을 추가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만든 사진에

황룡사 담장 / 황룡사 중금당과 함께

뭔가 중국꺼 처럼 생긴 탑이 하나가 보이죠?

 

 

 


이 탑의 이름은 [ 분황사 모전석탑 ]

네. 경주에 있는 그 분황사 모전석탑

맞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이렇게 생긴걸로 알고 계실겁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윗쪽 그래픽은 바로 이 모전석탑의 9층 복원안으로 재현했다.





현재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떨렁 3층만이 남아있습니다만,



저는 9층으로 재현 / 복원했습니다.

어째서 저는 분황서 모전석탑을 3층이

아닌 9층으로 재현 / 복원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1845년 동경잡기 : 古睛條

이 기록에 이런 문구가 남아있습니다.





- 1845년 동경잡기 : 古睛條 기록 -


분황사 모전석탑은 9층탑으로

신라삼보의 하나다. 근데



임진왜란때 그 반을 훼손하였고

후에 어떤 스님이 이를 개축하려하다가

또 그 반을 훼손하고 하나의 구슬을 얻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실제 선덕여왕의 보물, 화주. 수정을 깎아만든 렌즈다. 동경잡기의 구슬이 이거다.




그 모양은 바둑돌 같고  빛은 수정과 같았으며...


이걸 들어 비추면 그 바깥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는 솜을 가까이 하면

불이 일어나 그 솜을 태운다. 지금 그것은

柏栗寺에 간직되어 있다.





비록 조선후기 기록이지만 9층탑 이었다!

 

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는겁니다!

 


근데 분황사 모전석탑을 신라삼보...라고

기록한 점, 또한 남아있는 석탑 비율대로

복원하면 7층 전탑으로 복원된다는 점.... 



( 황룡사 9층 목탑이 신라삼보 중에 하나 였습니다. )



이런 이유들 때문에 동경잡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약간 낮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왼쪽부터 불국사 삼층석탑 ( 석가탑 ) / 분황사 모전 9층 석탑 / 추정 황복사 3층 목탑



 

동경잡기에 기록되어있는 무려!

선덕여왕이 시주했다는 화주라는

구슬이 분황사 탑에서 발견됬다는 점과,




1915년 일본인들이 이 탑을 3층으로 재복원하다

석탑지에서 나온 남아도는 모전 벽돌들이 많아서

이것들을 따로 보관해놓았는데,




모전 벽돌들의 양을 분석한 결과 7층 보다는

9층에 맞는 양 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적인 내용들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동경잡기 기록이 나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9층 전탑안으로 복원을 해봤습니다.

 

 




당간지주의 경우에는 고려도경 기록의

흥국사 당간지주가 금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토대로 금동 당간지주로 만든것이고,

 

 

 

실제 금동 당간지주가 발견된건 아니지만

금동 당간지주 보당이라고 모형 당간지주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모형 또한 참조했습니다.

 

 

경주 황용사지 출토 금동장식 - 맨 왼쪽이 당간지주 몸통으로 추정되는것이다.

 

 

 

이 모형들은 황용사 라는 사찰에서

발굴되었습니다. 황룡사가 아니라

황용사 입니다!



통일신라 사찰인 황용사에서는 여러가지

금동 장식들이 발굴이 되었는데요,

 


거기서 당간지주 보당으로 추정되는

물건도 출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질은 금동 입니다. 도금 제품이죠.

청동보탑보당문판 - 고려시대 / 금동보당 - 고려시대 / 황용사지 금동보당 - 통일신라 9세기 추정

 

 

 

제가 통일신라 건물을 만드는데

당간지주를 금동으로 만든 이유!



통일신라 황용사지 금동보당은

 

당간지주 이면서 전체가 금동입니다.

 

 

또한...



고려시대 청동보탑보당문판 ( 가장왼쪽 )

고려시대 리움미술관 금동보당 ( 중간 )



이렇게 고려시대 유물들하고

모습이나 사용법이 완전히 같습니다.



 



위에서도 적은, 고려하고 통일신라는

문화적 동질성이 확인된다! 라는 주장은...

이런 다양한 자료들을 확인해본결과.....



실제로 여러모로 문화적 동질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금동 당간지주 문화도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적용했습니다!

 

 

통일신라 사리함. 석탑 양쪽으로 비단번이 설치되어있다.

 

 

 


이번에는 당간지주에 걸어놓은

당간지주 비단번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제가 만든 당간지주 비단번이 특이하죠?

 

 


제가 만든 당간지주 비단번은 통일신라

사리함에 그려진 저 모양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리함에 당간지주

비단번이 걸려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의 당간지주 번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어디에 실제로

 

존재하느냐!? 물론 일본에서요!


이 당간지주번의 이름은 니시키번 이라고 한다.錦幡 にしきばん - 에이쿄 7년 1435년 추정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통일신라 사리함에 그려진

당간지주 번하고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뭐 더 생각할게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자료들을 기초로

당간지주 번의 색감을 잡았습니다.

 

 

당간지주 비단의 색감은

이 자료들을 기초로 만들었습니다.

 

 


당간지주 비단번의 경우 전체 모양은

어느정도 알 수 있어도...색감은 전혀

알길이 없긴 하지만...




조선으로 전승된 양식이나 기타

해외의 자료들하고 비교분석하면!




몸통을 붉은색 , 테두리는 초록색,

비단발은 파랑색으로 조합하는게

가장 고증에 가까운 모습 입니다.

 

 



그래서 저 윗쪽의 모든 자료들을

바탕으로 비단번을 만들되,



최종적으로는 고려시대 목조 조각의 걸작!

해인사 소상 건칠희랑대사의 가사 ( 스님들 옷 )



희랑대사 스님의 가사 비단의 색감과

패턴을 참조해서 비단번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재현 / 복원한 당간지주 비단번에

특별한 무늬가 없고, 그저 비단 패턴만

있는 이유는 이것 입니다.



당나라 둔황석굴 출토 당나라 당간지주번

그리고 일본 정창원 소장 ( 쇼소인 )

757년 일본의 당간지주 번.



이 두가지 비단번의 경우에는

 

특별한 그림이 없고, 직물의 패턴만

 

있는, 그림없이 구성된 비단번 입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생각하면서

 

통일신라 비단번을 재현해본 겁니다. 

 

 




다만, 제가 만든 당간지주 번이

 

완벽하게 복원했다! 라고 말할

 

상황은 아닙니다.

 

 

 

모양은 비슷하게 만든다고해도

 

어떤 비단을 사용했는지는

 

아예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만든 비단번은 비록 100%

 

고증은 아닙니다만, 굳이 당간지주

 

비단번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제가 고증한 색감으로 만드는게

그나마......고증에 근접한 모양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짜 그나마요...;;




그런데 윗 사진을 보면 황금닭머리

아랫쪽에 금색의 줄이 달려 있죠?


통일신라 후기 추정 , 1977년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성내동 하수도 수리하다 발견된 금동당간지주용두




이유는 이렇습니다.

실제 당간지주에 사용되었던

금동당간지주 용두 ( 닭머리 )



이거 턱밑을 보면은 도르래를

설치할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턱밑에 도르래를 설치할수

있는 장치가 있기 떄문에, 당간지주에

비단번을 설치할때,



금속의 줄 or 밧줄같은걸 설치해서

거기다가 비단번을 설치했을겁니다.

 

 



지금까지 이런 설명이 없었던

예전 게시물을 보셨다면 아마도!

제가 만든 건축물을 보면 그저.....



이건 무조건 상상으로 만든 건물이다!!

이렇게 느끼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어느정도는 상상속의

 

건물이 일단 맞기는 합니다.


( 목조데크 + 사모정을 합친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니까요...! )

 

 



그러나 건물의 세부사항은 하나하나

나름의 교차검증과 고증을 해나가며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저의 작품들은 거의 전부다 조건없이!

만들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교차검증을 통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비록 건물 자체는 상상의 건물이라

할 지라도... 건축 하나하나 세세한 요소!

 

 


제가 만든 건축물에 적용된 개별적인

요소들은 전부 고증을 거쳐서... 실제로

있었거나 / 있었을 법한 / 흔적 정도는 남아있는!



통일신라 or 우리나라 전통 양식을

교차검증을 통해서 만든거랍니다..!



소로 / 주두 / 첨차 / 녹유와 / 상륜부도

되도록 출토된 유물들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약간 부족한 부분은 어느정도 활용해서 만들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 / 불국사 석가탑 / 동궁과월지 금당을 참조한 누각 등등, 추정 가능한 통일신라 건축양식들로 조화롭게 꾸며봤다.

 

 

그래서!


세부사항 / 건축양식 만큼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검증 가능한 것들을 사용했고!



제가 알아낼 수 있는 한해서는 최대한

알아내서 고증하고 , 살짝 변형하더라도

우리나라 전통양식 고증안에서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이런 건물들은 실제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고증해서 만든

나름 고증된 건축물 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 신라의 달밤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엄청나게 거대한

지붕과 치미 , 화려하게 빛나는 첨탑들...



신라의 달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욱 고즈넉하고, 절대 한국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생각합니다.

통일신라 건축을 무조건 건물터

그 위치에 복원만 하는게 아니라...



지금은 잊혀진 전통양식을 고증에

맞게 철저히 지키면서 , 어느정도는

살짝 상상력도 활용해가면서...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조성되는 공원이나 신도시같이

새로운 공간에... 통일신라 건물을 활용한다면........



현대 상회의 풍경하고 잘 어울릴까?

과연 우리가 받아들일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답니다.



 

저는 장담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고증내에서 그 시절 양식으로


신라의 달밤을! 현재 21세기에 충분히

재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의외로 현대적인 풍경하고 굉장히

조화롭고, 멋질 모습을 보여줄꺼라고

 

저는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통일신라 사모정과 각종

 

통일신라 건축물들을, 실제 장소에서 활용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통일신라 실제 유물들을 최대한 적용해봤다. 여기있는거 100% 전부 알고계시다면, 사학자로 진로를 정하셔도 좋다!



- 번외편 - 통일신라 사모정 현대 사회에서 활용해보기 -


 

이제는 아실겁니다.

 

생각외로, 각잡고 통일신라 건물을

 

그 시대에 맞는 건축 양식으로...

 

 

 

최대한 고증에 맞게 복원이나 재현을

하게 된다면, 사실 어느정도 선 까지는

 

고증에 많이 가깝게 재현 가능합니다.



왜냐면 기본적인 건물 모습을

유추할만한 자료들은 생각보다

꽤나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름 조선시대로 전승된 양식들도

있고 그래서 참조자료가 꽤 있습니다.

 

 

우리집 뒷동산 올라가는 길에..... 이런 전통 통일신라 정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진짜 큰맘 먹으면

건물 한채 정도는 그 시절 양식에

매우 근접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요,




이렇게 나름 자료가 있어도..... 뭐 완벽한

자료는 없다고 할 지언정 , 그래도 충분히

 

활용할 정도는 자료가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나라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실사용을 너무나도... 안하고 있습니다.

 

 

 

 

진자.......좀..... 아쉽죠.....!

 

 



그래서 이번에는 통일신라 건물을

실생활에서 사용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걸 사진으로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피스 옥상이나 오피스 근처 공원에

이런식으로 신라 사모정을 설치하여

직원들과 시민들이 휴식하는 정자로,



혹은 오피스 조성할때 필수 항목인

기부채납 -> 공공예술 / 공공 조경 구성할때

활용한다면, 굉장히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에게 통일신라 건축 / 통일신라 문화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고,



사기업의 문화 이미지도 올릴 수 있고

사라지는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명목도

잡을 수 있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합니다.

 

 

 


신도시 공원들 같은 경우는

여기가 거기같고 / 저기가 여기같고

좀 몰개성한 면이 있는데요.



고증된 통일신라 정자와 석탑 / 당간지주 같은

통일신라 문화가 느껴지는 공공예술 조경으로...



차별화된 공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새롭게 조성되는 신도시 공원입니다.



뭐든지 새롭게 도전하는 새로운 장소 입니다.

 

 


이거저거 고증이 어쩌구 저쩌구...

 

이거저거 따져야하는 장소가 아니죠!

이런 실험하기 최고로 적합한 장소 아닐까요!?

 

 



 

집근처 그냥 길거리 주변에 있는

공원의 빈공터를 활용하여 이렇게

전통 정자를 설치해도 좋을거 같습니다.



버스 , 택시 기다리는데 무조건 정류장에서만

기다려야 된다는 법 있습니까!? 전통정자에서

기다려도 되게 괜찮을거 같지 않나요!?

 

 

이런식으로 진짜 실생활 공간에 설치하여.....

사라지는 전통문화를 되살린다는 명분도 챙기고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실생활에서 보여주며!



시민들의 휴식터로,  시민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사용하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파트 단지 근처 놀이터나

작은 인공 연못에, 이런식으로

만들어도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왜색이라는 조선시대 이외의 양식만

나오면 벌어지는 이상한 논란을...



어릴적부터

 

가장 가까운곳에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쉽게 접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통일신라 건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정확하게 심어주게 된다면!...



왜색 공포증을 사라지게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하게 교육을 해나갈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신규 아파트들 보면

 

맘스 스테이션을 설치한

아파트들이 꽤 많더라구요.



그래서 그거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



통일신라 정자를 맘스 스테이션으로

활용하거나, 혹은 맘스 스테이션에

연계된 정자로 활용해보는것도!



꽤나 재밌을거 같지 않습니까!?

 

 


고풍스러운 전통 디자인에서 아이들

케어하는 맘들의 고즈넉한 휴식처로

굉장히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송도 센트럴파크 보트 타는 인공호수

근처에 이렇게 시민들이 앉아서 휴식도 하고

경치도 즐기는 정자로 활용했으면 좋겠네요.



송도 센트럴파크는 스토리도 나름 출중하고

공원에 빈공간도 충분하고, 활용하기 가장

좋은 공원중에 한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황룡사 중금당 추정재현

 

 

송도센트럴파크는 빈공간도

나름대로 널널하니까, 이런식으로

활용한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룡사 금당 / 황금 당간지주 / 황룡사 담장

 

 


이렇게 연구된 자료들을 활용하여

역사 박물관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라고 갈때마다 혼자 상상해봅니다. ㅋㅋ

 

 

 


송도 센트럴파크 앞쪽에는 근미래에

아주 기대가 되는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송도 워터프론트라는 장소 인데요!

 

 



앞으로 송도 워터프론트를 개발할때

전통문화 공원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ㅋㅋ


잊혀진 전통양식을 활용한 전통공원!

굉장히 멋질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는 이런식으로 공원안에

통일신라 전통정원을 표방한 연못을

따로 구획화해서 만들면 좋을거 같습니다.



통일신라 담장양식과 정자, 그리고

통일신라 연못 구성법과 전통조경

양식을 적용해서...



도심 한가운데에 통일신라 정원 문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참 좋을거 같습니다.



참고로 송도 센트럴파크에 만든

 

통일신라 정원 연못은 월성해자 연못을

 

참조하여 만든 것 입니다!

 

 

월성해자 연못 . 의외로 각진 부분이 있다 - 출저 : 경주시청

 



통일신라의 왕성! 월성의 해자는

 

나중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용할일이 없다보니까 이게...



악취부터 해서...이런저런 이유로

수리하면서 정원용 연못으로 바뀝니다.



통일신라 월성해자 연못은 의외로

 

각진 부분이 구석에 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사각형 모양처럼

 

보이는 연못으로 만든 이유랍니다!

 

 

 


여기는 월미도에 있는 월미공원이라는

나름 작은 관광지 인데요. 이런식으로...



유원지나 관광지, 공원앞에 공공조경및

공공예술의 일환으로 신라하고 관련된

것들을 철저하게 활용하면 매우 좋을거 같아요.



여기가 바로 신라시대 공원이다!

엄청 팍팍 티가 나는게 괜찮지 않나요?



그런데 인천하고 신라하고 무슨 연관이

있길래 이렇게 신라양식의 건축물이나 기념물을...

 

인천에다가 주구장창 활용하고 있을까요!?

 

 

 



인천하고 신라하고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의외로 인천에는 신라를 당당하게

내세울만한 유적지와 스토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보통 인식으로는....

 

 

 

 

인천에 신라 뭐 하나라도 있기나함?

백제랑 가까운거 아님? 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가지

 

통일신라 관려 유적지가 있는곳이 인천 이랍니다...!





인천은 신기하게도

다른곳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바다에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하는

제단 장소가 무려 2개나 있습니다.



그 2곳은 계양산 / 문학산이고

특히나 문학산쪽 제사시설은

기와도 발견된 기와건물 입니다.



기와들의 구성을 살펴봤을때

계양산 / 문학산의 제사 시설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천 문학과 계양에서는 통일신라때부터

바다의 기도를 올리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위치가 바로!

송도 / 월미도 / 소래포구 일대 입니다.



문학산에서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할때

바라보던 바로 앞 바다 / 작은섬들이 바로...



송도 / 월미도 / 소래포구 입니다.

특히 송도는 제사 올리던 바닷가 한가운데

그 자체! 정말 활용하기 좋은 소재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인천은 송도나 월미도,

논현및 소래포구 등등... 해안가 도시에 이렇게

신라 정자를 활용해도 될 정도로 스토리가 출중합니다. 

 

 



포구같은 경우는 조금 멀어보이나

그래도 신라 양식을 활용하는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래는 문학산 앞바다였기도 하고

근처 오이도 / 운연동에서 신라 생활유물들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산 / 계양산 / 오이도 / 운연동을

예로들며 이런식으로 신라 건물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죠.

 



그 외 청라국제도시에 있는

장금도 패총에서도 신라 생활유물이

발견되는 등등, 인천의 신도시들하고...



갯벌들하고 굉장히

 

연관이 깊은게 통일신라 입니다.

 

완벽한 사이드 스토리 그 자체 라구요!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내용인데요! 대다수 인천

시민들도 거의 모르는 내용일겁니다.



경주 월성박씨의 중시조 조상님의 묘와

그 일파의 묘가 인천시에 있습니다!



[ 서창동 월성박씨 종중묘역 ]

이라는 장소 입니다. 통일신라하고

관련있는 월성박씨의 중간 시조분께서...



의외로 인천쪽에 거주하셨던 것 입니다.

사실 고려후기때 활동하신 고려시대의

 

선조님 이십니다만...



아무튼 고대 신라부터 내려온

뼈대있는 성씨의 묘역 입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인천은 신라하고

관련이 나름 꽤 있고, 실제로 발견되는

유물들도 소수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인천 남동구의 가장 끝부분에 있는 마을!

이런 동네가 있는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인천시 남동구 운연동.



이쪽 농토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의

각종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있는.....



통일신라 생활 유물산포지가 실제로

직접 발견되었습니다. 인천 내륙에선

꽤나 드문 통일신라 생활유물 산포지가 발견된거죠.

 

 

인천대공원 - 소래산 사잇길 육교옆쪽 묘목 농원에서 통일신라 생활유물 산포지가 발견되었다.




시흥시 소래산 ~ 인천대공원 사잇길

 

옆쪽에 있는 시골마을인 운연동 일대는...

 

 

통일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생활

 

유물산포지도 꽤나 발견되었습니다.



생활유물 산포지가 발견된

 

장소들의 주소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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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산20-1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414-1

 

이 두군데가 통일신라 생활유물 산포지가 발견된 장소며...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305-9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연동 58-1

 

이 두군데가 조선 / 고려 생활유물 산포지 주소 입니다.

 

#########################################################

 

 

 


이곳은 구월동 아시아드 선수촌,

옛 구월 보금자리 신규 택지지구로

여기 개발할때 즈음에.....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통일신라 석실고분 2개가 발견됬습니다. 



석실이 발견됬다는것 자체로 이미

구월동 아시아드 선수촌 택지지구 근처에...



신라 생활 유적지가 있었을

 

확률이 엄청나게 크다고 합니다.

 

 

 

아마 지표조사를 다시 실시하면

 

실제 통일신라 마을이 발견될 확률도 높다네요.

 

통일신라 고분이 나온 인천시 남동구 유적지 이름 : 구월동 유적지 입니다. 승기천 근처 ~ 구월동 아시아드 선수촌 공원 일대 입니다.

 

 

 

 

근처 문학산 같은 경우는 통일신라

제단도 발견되었고, 문학산성 자체가

 

통일신라 유적의 보고 입니다.

 

 

 

문학산 학산서원터 또한 통일신라

 

유적지로 알려져 있고, 근처 문학산

 

유적지에서 통일신라 토기도 발견됬고...



또한 통일신라때 석성으로 재축성 된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인천 구월동은 실제

통일신라 문화재도 발견되었으니...

 

 



 

이런식으로...



아파트에서 정자로 활용한다던가

공원에 기념물이나 정자로 활용한다면

의미 / 스토리 / 실용성 모두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사진속 구월 아시아드 공원같이 기존에

이미 조성된 공원에 통일신라 관련된 것들을

공공예술품으로 추가 설치 /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래서 저는 인천하고 통일신라하고

나름 꽤나 연관이 있고, 스토리가 있다고

말한 것이고, 충분히 활용할만한 스토리가...



생각보다 약간이지만 꽤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특히 송도같은 경우는 아직도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뻥뻥

허허벌판 공터가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는 송도 코스트코 바로옆 공터인데

센트럴파크 바로 뒷쪽인데도 이렇게 황무지,

허허벌판 공터에요. 볼때마다 좀 아쉽던데...

 

 

 

개인적인 상상으로는, 땅도 많은 송도는

허허벌판 공터중에 한군데 정도는 이렇게

잊혀진 전통문화 공원으로......



여지것 연구된 전통건축 몇가지를 엄선해서

연구된 기술들을 적용하여 만든 테마파크겸

전통공원을 하나 정도는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송도 코스트코 바로 옆에서 관람하는

황룡사 중금당 / 금동 당간지주 / 황룡사 9층 목탑!

 

 

 

엄청 매력있지 않나요!?

 

코스트코 한바꾸 딱 돌아준 다음에 커피한잔

 

마시면서 걷는 전통공원... 좋지 않습니까!?

 

 

 

 

멋진 한옥들이 즐비한 송도 한옥마을.

근데 한옥들이 전부다 음식점이고.....

 

한옥 대부분은 경원재 호텔 건물들이라서...



한옥 마을이라는 이름이지만, 뭔가 좀

부족하고 ... 구경할게 생각보단 그리 많지

않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곳인데요.



이런식으로 송도 한옥마을에 우리나라의

각종 전통 문화재들으 복원및 재현하여...

공공 조경 예술품으로 철저하게 !!!



적극적으로 !!! 공격적으로!!!

미칠듯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

 

 

통일신라 복령사에서 15m 이상의 대동불을 모셨다는 사실에 입각해 ,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을 15m로 크게 키워서 모셔봤다.



 

전통문화재 관련으로는

 

사실 조금 약한게 인천인데요.



이런식으로 개발 / 활용하여...

 

약점인 부족한 전통문화재 볼거리를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근데 대다수 저의 합성작품은

아파트 위주로 합성을 했죠?



그 이유는 솔직하게 현실적

대안도 말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라 유물이 발견된곳들은 전부

아파트 짓기 전에 확인하다 발견한거고,

또한 실제로 아파트가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저기 아파트를

인구감소해도 잔뜩 짓고 있는데



문화시설이 너무 여기나 저기나 다 똑같고

전통적인것은 부족하다 못해 아예 없는 수준이고...




그러다보니 전통문화는 몇군데 제외하면

아예 느낄수도 / 찾아볼수도 없는게 현실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점은 참 아쉽죠.

 

 

 

 

우리 집 바로앞에서,

 

우리 아파트에서 볼 수 있는

고증된 통일신라 정자. 품격있지 않나요?

 


이런식으로 아파트 단지에 통일신라 정자를

설치하여 입주민들의 휴식터로 사용해도 좋고,



공공조경용 으로도 손색없고,

그 아파트의 품격을 높여줄 것 입니다.

 

아파트 단지도 충분히 활용가능 한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의 전통문화의 다양성도 직접 느끼고,

 

 

 

오다가다 잠깐 앉아서 휴식도하고

 

오다가다 커피한잔 , 맥주한잔 잠깐

 

앉아서 마실수 있는...

 



우리의 잊혀진 전통문화를 시민들이

 

가장 가깝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는 아파트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왜색 공포증을 지우는데에 크게 도움될 겁니다.



혹은 아파트 근처 신규 공원을 활용하는

방법도 꽤나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생활하는 주변에서 만나는 통일신라 정자,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걸 맘만 먹는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나름대로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 해 봤답니다.

 

 

 

 

뜬금없이 생각나서 ....

 

경복궁 근정전 터에 합성해본

황룡사 중금당 입니다! 엄청크죠!?

 



경복궁 근정전 / 황룡사 중금당


두 건물의 사이즈를 직접 보면서

비교하면, 대략 이런 느낌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정면 30m / 측면 21m / 높이 22.5m



황룡사 중금당은 차양칸까지

 

정면크기 약 52m / 측면 27.1m

 

 

 

황룡사는 목탑만 엄청난게 아닙니다!

메인 정전인 중금당 또한 엄청 큽니다!

 

 

 

직접 보면서 비교하니까 좀 더 실감나죠!?

 

그럼 엄청나게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4년 7월 10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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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안학궁 조사를 할때

 

치미를 발견 했다고 합니다.

 

 

 

높이 2.1m라고 하는,

 

한반도 내에서 발견된 치미중에서는

 

가장 거대한 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안학궁에서 출토되었다는 고구려 치미. 중궁 1궁전이라는 90m 건물터에서 발견되었다.

 

 

 

고구려 치미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여기에 전시중이라고 하는데요,

 

 

 

고구려 치미는 1973년

 

북한에서 발행한 안학궁 발굴조사보고서

 

 

 

거기에 나온 자료와 사진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색상과

 

디테일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쉽네요...

 

 

안학궁이 427년 장수왕시절 궁궐이 맞다는 가정하에 5세기 건축양식을 적용하여 추정재현한 안학궁 정전

 

 

고구려 건축물에 적용하면 이런 모습...!!

 

실제 안학궁 치미는 붉은색은 아닌듯 합니다.

 

 

 

사진 자료가 워낙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색상이 약간 모래와 비슷한 회백색...? 입니다.

 

 

 

그래서 100% 정확하게 복원한다면 그냥

 

옅은 회색이나 흙색상으로 복원하는게

 

고증에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붉은색으로 재현해봤습니다.

 

고구려하면 역시 붉은기와 아니겠습니까!?

 

 

 

고구려 특유의 붉은 기와지붕과 치미를

 

적용하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픽의 장점은 역시 이리저리 자유롭게

 

적용을 할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붉은색으로 적용해봤어요.

 

 

안학궁 정전은 정면 49.1m 측면 16.6m이다. 안학궁 정전은 현재 외전 1궁전 or 남궁 1궁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안학궁 정전의 치미를

 

1층, 2층 모든층에 설치를 했죠?

 

 

 

일반적으로 치미는 2층 지붕에만

 

설치하는게 정석이죠? 어째서 저는...

 

1층과 2층 모든층에 치미를 설치했을까요?

 

 

그 이유는 고구려 용강대총 고분벽화

 

고구려 누각 그림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용강대총 벽화는 성곽을 그렸는데

 

누문과 장대가 있고, 회랑으로 연결되어있는...

 

 

 

마치 궁궐을 표현한듯한 그림이 있는데요,

 

거기 누각을 보면 치미를 1층과 2층 모든층에

 

설치한 모습이 발견됩니다. 저 모습을 참조했습니다!

안학궁 치미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전시중이라고 한다.



 

2024년 현재, 고구려 안학궁은

 

고려 궁궐로 추정되고 있죠?

 

 

 

안학궁 출토 치미의 존재가

 

안학궁 고려궁궐설에 힘이

 

실리는 이유기도 하답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먼 확실히

 

삼국시대보다는 통일신라 양식에

 

훨씬 다 가까운 모습이랍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통일신라 시대에

 

가까운 모양인지 천천히 살펴봅시다.

 

 

당나라 대명궁 치미는 634년 최초 건립 / 혹은 662년 대규모 확장시절 치미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중국 당나라 대명궁에서

 

발견된 치미 입니다. 그냥 뭐..............

 

더 설명이 필요없죠??

 

 

 

고구려 안학궁 치미하고 매우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당나라 대명궁 치미 입니다.

 

 

 

상경용천부는 755~785년까지 사용되다가 한번 천도하고,/ 재천도해서 794~926년까지 사용된 발해 왕성이다.

 

 

 

발해 상경용천부 1번째 사찰터에서

 

발굴한 녹유 치미라고 합니다.

 

 

 

끝을 뾰족하게 마무리하고 테두리에

 

꽃무늬 장식을 설치한게 안학궁 치미

 

하고 꽤나 닮아있죠?

 

 

 

발해 상경용천부 9번째 절터 치미. 끝부분의 모습과 날개와 몸통이 만나는 곳에 동그란 장식을 설치한게 비슷하다.

 

 

 

 

발해 상경용천부 9번째 사찰터에서

 

발굴한 녹유 치미라고 합니다.

 

 

 

이 발해 치미도 전체적으로는

 

안학궁 치미 하고 꽤나 닮아있습니다.

 

 

 

이렇게 발해 상경용천부 치미들은

 

치미의 끝부분을 뾰족하게 처리하고

 

테두리에 동그란 꽃무늬 장식 등등,

 

 

 

 안학궁 치미하고 많이 닮아있어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삼국시대 치미하고

 

비교분석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백제 부소산 사찰터 치미 - 600년대 즈음

 

백제 미륵사 동원 승방지 치미 - 600년대 추정

 

 

 

그리고 백제 치미가 끝부분을

 

뾰족한 뿔처럼 처리하는 방식부터

 

테두리에 꽃무늬 장식을 넣었으며...

 

 

 

전반적인 생김새가 안학궁 치미하고

 

그 나름 비슷하게 생겼는데 백제 치미

 

또한 6~7세기 추정 치미 입니다.

 

 

중국 남북국시대 북제 치미 386년 ~ 589년 추정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 ( 시텐노지 )아스도 츠시오 출토 치미 - 593년 추정

 

일본 가시하라시 사찰, 와다하이지 출토 500~600년대 치미

 

 

삼국시대 신라 황룡사 치미 - 584년 추정

 

 

 

황룡사 치미하고 중국의 북위

 

치미는 고구려 치미하고 꽤나

 

다르게 생겼습니다.

 

 

게다가 끝부분의 뿔장식 부분이

 

없거나, 얇거나 하여튼 안학궁

 

치미하고 조금 다릅니다.

 

 

분황사 치미 - 634년 추정



 

통일신라 치미 중에서 연대가

 

많이 이른, 분황사 치미 입니다.

 

 

분황사 치미부터는 당나라 부터

 

유행한 모습의 치미 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의 치미는 통일신라때

 

유행하던 모습의 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통일신라 동궁과 월지 ( 안압지 ) 출토 통일신라 치미 - 679 ~ 680년 추정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치미 입니다.

 

안압지가 600년대 후반에 완공된

 

궁궐이라 그런지,

 

 

대명궁 치미하고 닮아있습니다만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치미 입니다.

 

 

저렇게 치미 끝부분 뿔장식을 둥글게

 

처리하기 시작하는게 통일신라 입니다.

 

 

안압지 출토 신라 치미2 - 679 ~ 680년 추정



 

동궁과 월지, 그니까 안압지에서는

 

이렇게 발전된 형태의 치미도 있어요.

 

 

여튼 이런 통일신라 치미의 특성은

 

고려시대 치미에서도 어느정도

 

그 특징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부산 만덕사 치미 ( 972년 추정 )

 

 

 

고려시대 또한 극소수지만

 

치미가 발견되고 있긴 합니다.

 

 

고려시대 치미는 통일신라 치미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거나, 혹은

 

조금 더 발전된 형태를 보입니다.

 

 

 

 고려시대 출토 치미중에서

 

안학궁 치미의 특성을 전부 보여주는

 

치미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치미는 바로...!!

 

 

고려 법천사지 치미 - 8세기 or 11세기 추정, 치미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통일신라적 요소가 있다. 높이 110cm

 

 

 

고려 법천사지 치미 입니다.

 

고려 법천사지는 기록으로 보자면.....

 

 

고려사(高麗史)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 기록들에 의거하면 8세기,

 

그러니까 700년대 창건했습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은 고려시대 1070 or 1085년 건립한 승탑으로 추정한다.

 

 

 

근데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과 각종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고려시대 11세기

 

까지 활발히 운영되던 사찰이었어요.

 

 

 

 

법천사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이 바로

 

지광국사 현묘탑이고, 이 승탑으로 인하여

 

보통 법천사는 고려시대 사찰로 인식 합니다.

 

 

 

( 승탑 년도 1070∼1085년 추정  )

 

 

 

이런 상황에서.... 법천사지 치미는

 

통일신라 치미에 비하면 기술적으로

 

너무 단순하게 변한게 법천사 치미입니다.

 

 

( 실제로 신라 -> 고려로 변하면서 몇몇 유물들은 퀄리티가 낮아집니다...)

 

 

법천사지 치미는 700년대 통일신라 치미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법천사 치미는 800년대 후반 통일신라

 

혹은 1000년대 고려시대 치미라고...

 

의견이 나름 엇갈리는 상황입니다.

 

 

 

 

여튼 생긴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안학궁 치미에서 보이는

 

특성이 거의 대부분 보이는 치미 입니다.

 

 

둘을 비교해보자면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법천사 치미를 고려시대 치미로

 

생각해볼만한 요소들이 꽤 있으므로...

 

 

 

그래서 안학궁 기와 / 치미는

 

고려시대때 만든 치미일 것이다!

 

라는 주장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부여 금강사 출토 치미 : 통일신라 or 고려시대 치미로 추정한다. 국내 치미중에서는 안학궁 치미하고 가장 비슷하다.

 

 

 

부여에서 금강사 라는 사찰이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 연구결과 백제 사찰 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수습된 치미가 고구려 안학궁

 

치미하고 가장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부여 금강사 치미의 조성방식 / 성분배합

 

연구결과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 치미

 

라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사실 고구려 안학궁 치미는 부여출토 치미하고 굉장히 닮아있다.



 

 

고구려 궁궐이 맞다는 가정하에,

 

569년 / 586년 / 593년 건립으로

 

추정되고 있는게 안학궁.

 

 

 

근데 676년 이때부터

 

통일신라가 시작합니다. 

 

 

 

고구려 궁궐이 맞다는 전제의

 

안학궁 건립 추정 시기 하고...

 

통일신라 시작 시기가 나름 비슷합니다.

 

 

 

안학궁 치미가 통일신라 치미하고

 

비슷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왜냐!

 

시기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사찰추정 공주 주미사 치미, 날개와 몸통이 만나는 부분에 1줄의 띠와 동그란 장식 등등, 안학궁 치미하고 양식이 많이 닮아있다.

 

 

 

여기에 재미있는 설이 하나 있는데요,

 

충청남도 공주시 주미동에서 발굴된

 

주미사 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 대부분이

 

통일신라 양식이라서, 통일신라

 

사찰로 추정합니다만,

 

 

 

일각에선 백제사찰일 가능성도 있데요.

 

그래서 백제 후기 치미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만에하나 주미사 치미가 백제 최후반기 치미라면,

 

 

 

양식이 꽤나 비슷한 안학궁 치미도

 

나름 고구려 후기 치미일수도 있을겁니다.

 

 



 

 

그러나 주미사 또한 일단은

 

통일신라 사찰로 추정되고 있고,

 

그외 각종 자료를 전부 종합해보면...

 

 

 

이 게시물의 안학궁 치미는

 

확실한건 삼국시대 4~5세기

 

치미는 확실히 아니고...

 

 

 

여러모로 통일신라 / 고려적

 

요소가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 길림성 무송 백산유적지 출토 치미. 발해 치미로 추정하고 있다.

 

 

 

그걸 증명하는 또 하나의 치미가

 

있는데요, 이 치미는 중국 길림성

 

무송 백산유적지 출토 치미라고 합니다.

 

 

 

중국 길림성 무송 백산유적지 치미는

 

그 모습의 특성및 출토 장소 때문에

 

발해 치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윗쪽에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치미 끝부분 뿔이 뿔처럼 뾰족

 

( 왼쪽 하단이 치미 뿔들 )

 

 

 

몸통과 날개가 이어지는 부분에

 

띠 한줄과 동그란 장식 ( 연주문 )

 

설치한 모습이 고구려 치미와 닮았습니다.

 

 

고구려 안학궁 치미는 금강사 치미 / 발해 무송 백산유적지 치미하고 애무 닮아있다.



 

실제로 꽤나 비슷하죠?

 

여튼 무송 유적지 치미는...

 

 

발해 치미로 추정 되므로 연도를

 

낮게 잡을 경우 700년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치미입니다.

 

 

중국 길림성 무송 유적지 치미파편. 날개 부분에 띠와 동그란 장식인 연주문이 붙어있다.

 

 

 


여튼 무송 유적지 발해 치미는

 

고구려 안학궁 치미하고 가장

 

근접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안학궁

 

치미는 삼국시대 치미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상황 입니다.

 

 

고구려 안학궁은 427년설 / 569년설 / 586년설 / 593년설 / 고려궁궐설 등등 논란이 많다.

 

 

 

아무튼 안학궁 출토 치미는

 

삼국시대 치미는 아닐 확률이 높아요.

 

 

 

통일신라 시기 치미하고

 

특징이 비슷합니다. 시대를 최소한으로

 

본다면 650년 +- 즈음의 치미로 볼수 있습니다.

 

 

 

시대를 최대치로 본다면

 

안학궁 고려 궁궐설이 947~949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근데 900년대라면...

 

 

 

통일신라가 거의 900년 까지

 

존재했으니 , 고려 건축에 통일신라 양식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을 시간 입니다.

 

 

 

그렇기에 안학궁 치미는 통일신라 양식을 지닌

 

고려시대 947년 즈음의 치미로도 추정 가능합니다.

 

 

 

 

아무튼 고구려 안학궁 기와가 어째서

 

고려시대 기와라고 하는가에 대한...

 

 

 

논란의 이유중에 하나인

 

치미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어째서 안학궁이 기와를 필두로

 

고려궁궐 이라고 추정되고 있는지

 

어느정도 이해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4년 10월 3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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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후예를 자처한 나라가...

 

21세기 한국외에는 그전까지는 사실 없었고...

 

 

 

나라 자체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오래 유지된 나라는 아니다보니.....

 

 

 

건축양식을 추정하는데 매우 어려운

 

나라 입니다만, 의외로 건축물에

 

사용하는 단청 도안 정도는...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발해 고분에 단청 무늬가 아주

 

자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발해 삼릉2호분 내부. 아래위로 보상화무늬 단청들이 즐비하다.

 

 

 

발해 단청 도안이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발해고분은 바로 이 고분 이라고 합니다.

 

 

 

[ 발해 삼릉 2호분 ]

 

 

 

발해 삼릉 2호분 같은 경우에는

 

삼릉 2호분 / 삼령둔 2호분 / 삼릉둔 2호분

 

등등 꽤나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주칠배경에 꽃무늬 단청과

 

그 위로 하얀색 둥그런 꽃무늬 단청이

 

그려져 있는게 보입니다.

 

 

 

 

주칠 배경에 하얀색 둥근꽃이 그려진

 

단청은 확대하면 이런 모습 입니다.

 

 

 

석류꽃을 기반으로 만든 단청인데요,

 

이렇게 주칠 배경에 하얀색으로만

 

꽃송이를 그렸는데.....

 

 

 

이 꽃무늬를 보통 보상화문 이라고 합니다.

 

이런 보상화문 단청을 오로지 하얀색으로

 

칠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름대로 발해만의 특이한 단청

 

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지 싶습니다.

 

 

 

 

그 윗쪽에 하얀배경에 둥그런 꽃을 그린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이런 모습 입니다.

 

 

 

붉은색을 자세히 보시면

 

먹선 -> 흰선 -> - 주황 -> 주칠 -> 갈색

 

이 순서대로 채색하는게 보입니다.

 

 

 

당나라 시절에 유행하던 운간채색

 

방식을 발해에서도 사용한게 확인됩니다.

 

( 운간채색 : 같은 종류의 색상을 그라데이션처럼 채색하는 방식 )

 

 

 

 

주칠배경에 둥근 꽃을 그린 단청과

 

하얀색 벽에 둥근 꽃을 그린 단청을

 

건물에 적용하면 이런 모습이 됩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단청하고도

 

꽤나 많이 느낌이 다른게 재밌지 않나요?

 

 

 

측면 모습은 이런 모습 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하얀색 / 초록색 / 주황색

 

이렇게 3가지고 그린 단청부터 해서...

 

 

 

사람人 모습의 솟을합장 포대공의

 

풀꽃무늬 단청 등등 아직 보지못한

 

단청이 꽤 많이 보이죠?

 

 

발해 삼릉2호분 내부 단청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모줄임천장 부근 단청

 

 

 

주황색 / 하얀색 / 초록색으로

 

그린 단청의 경우에는 바로 여기!

 

 

발해 삼릉2호분 모줄임천장이 구성되는

 

부분에 그려진 단청을 일단 그려봤습니다.

 

 

그런데 사진자료가 거의 없어서 일단

 

최대한 보이는 대로 그려봤습니다.

 

 

 

건물 벽쪽에 그린 붉은 풀꽃무늬 단청은

 

고분의 천장을 받쳐주는 받침대에 그려진

 

단청을 보고 그렸습니다.

 

 

발해 상경용천부 궁궐출토 건축물 벽화파편

 

 

 

왜냐하면 발해는 건축물에

 

흰색으로 벽을 칠하고, 벽에

 

실제로 당초무늬 같은...

 

 

벽화를 그린게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벽화를 넣어봤답니다...!

 

 

발해 삼릉둔 고분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발견된 둥근 현무암 초석

 

 

또한 초석을 둥근 현무암

 

초석으로 만든건, 고분벽화가

 

발견된 발해 삼령둔 유적지에서...

 

 

 

둥근 모양의 현무암 초석이 발견

 

되어서 적용을 해본 것 이랍니다...!!

 

 

발해 삼릉2호 단청과 각종 발해출토 무늬들로 단청을 만들면 이런느낌. 조선과 고려하고도 꽤 다른느낌이다.

 

 


발해 주칠배경 둥근꽃무늬

 

발해 하얀배경 둥근꽃무늬

 

모줄임천장 하양/초록/주황 단청 등등

 

 

 

실제 단청 도안이 자세히 안보이지만

 

최대한 관찰하며 지랄발광하며 그려서

 

건축물에 적용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조선시대 / 고려시대 하고도

 

완전히 다른게 참 보기좋지 않습니까!?

 

 

발해 상경유지박물관에서 출토했다는 발해 보상화문

 

 

 

정면에 주칠 둥근 보상화 밑부분에

 

약간 작은 하얀배경에 보상화 무늬는...

 

 

중국 흑룡강성 발해 상경유지박물관

 

에서 출토했다는... 보상화무늬 그림을

 

발해 단청채색 패턴에 맞춰서 채색했습니다.

 

 

 

 

첨차 ( 포크모양 브라켓 )

 

솟을합장 포대공 ( 사람人 모습의 장식물 )

 

 

 

이 2가지에 그린 단청은 상경용천부

 

전돌계단에 사용된 보상화무늬 전돌

 

무늬를 그 시절 양식에 맞춰서.....

 

 

 

발해 채색법과 800~900년대 당초무늬

 

채색방식을 적용해서 그려넣었습니다.

 

상경용천부 2궁전 회랑 계단으로 사용된 전돌. 브라켓 단청으로 사용해보았다.

 

 

 

 

사실 발해 단청은 건물 한채 만들기에는

 

조금 부족한게 사실 입니다. 몇가지

 

무늬들은 잘 보이지도 않고....

 

 

 

단청 자체가 발해 삼릉 2호분

 

딱 여기에만 집중적으로 몰려있어서...

 

 

 

 

솔직하게 건물 한채 만들만한 수량의

 

단청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종 발해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무늬들을 발해 삼릉2호분 에서

 

채색한 방식을 토대로 약간의 창작으로

 

그린 단청도 있습니다. 이런식으로요...!!

 

 

발해 상경용천부 출토 당초무늬 전돌. 포크모양 브라켓 윗쪽에 하양 덩쿨무늬로 사용해보았다.

 

 

 

첨차 ( 포크모양 브라켓 ) 윗부분에

 

하얀색 덩쿨무늬 단청은

 

 

 

상경용천부 궁궐에서 출토한 당초무늬

 

전돌을 ..... 발해 주칠배경 하얀색 둥근

 

꽃무늬 채색법에 의거하여!

 

 

 

붉은색 배경에 하얀색으로

 

채색하여 만들어봤습니다. 

 

 

이 건물은 발해 상경용천부 궁궐 2궁전 좌우 협문을 재현 / 복원한 것이다.

 

 

 

제가 만든 정면2칸 측면1칸

 

맞배지붕 건물은 상경용천부

 

2궁전 좌우에 있는 협문 인데요,

 

 

 

여튼 삼릉2호분 단청을 최대한

 

보이는대로 그릴려고 노력했고...

 

 

 

부족한 부분은

 

실제 발해 유물들을 참조해서 그려봤습니다.

 

 

경북 경산시 송백리 발해마을에 상경용천부 궁궐 협문을 합성해봤다. 사진출저 - map.google.com

 

 

남한의 발해 태씨집성촌인

 

경상북도 경산시 남촌면 송백리

 

발해마을에 합성 해봤습니다.

 

 

 

상경용천부 2궁전 협문인데요,

 

발해의 후손분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송백리 발해마을에.....

 

 

 

이런식으로 건물을 조성하면 어떨까

 

생각이 나길래 한번 합성해봤습니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발해하고 연관된

 

동네라서 스토리도 출중하고, 이런식으로

 

관광지를 발전시키면 좋을거 같지 않나요?

 

 

 

#발해 건축양식 / #발해유물

#발해 멋있는 유물 / #발해 복원


#발해 특이한 유물 / #발해 건축 복원및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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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축물

 

벽색깔은 어떤 색일까요?

답은 대체적으로 하얀색 이었을 것 입니다.




발해 건축물은 이렇게

 

건축물의 벽 색상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냥 흰색벽이

 

발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은 상경용천부 서구침전터 구들이다.

 



발해의 궁궐 상경용천부 궁궐을 발굴했는데

담장 / 건축물 외벽의 흔적이 굉장히 많이

 

발견했습니다. 흔적이 엄청많았어요.



발해 상경용천부 건축물들의 외벽은

흔적이 많이 남았는데, 절대 다수가

하얀색 회칠을 바른 흔적 이었습니다.


 


발해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 통일신라

하고 다르게 건물 벽체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근데 거기서 발견된...

 

 


벽체 대부분에는 하얀색 회칠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발해 건축물의 벽체 색상은 하얀색 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윗쪽 회칠벽 흔적이

 

발견된 상경용천부 서구침전터 회벽

 

건물터에서...

 

 

 

회칠벽 뿐만 아니라 붉은색 무늬장식으로

꾸민 벽체 파편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상경용천부 발해 궁궐출토 벽화파편

 

 

 

이게 발해 상경용천부 출토

 

벽화파편인듯 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붉은색 당초문과

 

초록색 당초문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하얀색 벽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발해는 하얀색 회칠벽이 맞습니다!

 

 

발해 중경현덕부 팔각목탑터에서 출토된 발해건축 벽화 파편들

 

 

또한 나름 최근에 발해

 

중경현덕부로 추정되는...

 

 

古城村 지린성 훈춘시 구청촌

 

한국어 발음으로는 연변에 있는

 

고성촌 이라는 곳에서...

 

 

 

발해 사찰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팔각목탑터가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그 팔각목탑터에서...

 

 

 

벽화 파편이 발견되었는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얀벽에

 

그림을 그린게 확인되었습니다.

 

 



참고로 하얀색 회칠벽은 러시아 연해주

콕샤로프카 발해 유적지에서도 발견됩니다.

 

 

 

사진의 야외취사유구를 보면 회칠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하얀색 파편도 있으며...

 

 

 

콕샤로프카 발해유적지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콕샤로프카 4호 건물터에서 회칠된 벽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사진은 없네여...;;)

 

 

 

그래서 발해 건축물은 그 시절

유행하던 하얀색 회칠벽을 사용한게 확실합니다.



사진출저 : https://blog.naver.com/abcblove/50072984215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발해벽화.

 

 


재미있는점은 상경용천부 각종 유적지에서

 

회칠벽에 그림을 그린 벽화 조각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발해 고분의 벽화 또한

 

회칠벽에 그림을 그린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고분이나 건물에 회칠을 바르고

 

그림을 그리는 문화가 발해 또한

 

있었음이 증명된 것 입니다!

 

 


그래서 발해의 건축물 벽체는 대부분이

하얀색 회칠을 했을것이고, 사찰 건물이나...

 


왕족이 사용하는 건물들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발해 건축양식 / #발해유물

#발해 멋있는 유물 / #발해 복원


#발해 특이한 유물 / #발해 건축 복원및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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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현무암 초석을

굉장히 자주 사용했습니다.

 

사실상 메인이 아닐까 싶은 수준!



우리나라의 과거 모든 국가들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초석을 만들어

사용 한거하고 굉장히 대조적 입니다.


발해 상경용천부의 초석은 현무암으로 만든 초석이 절대다수다.




발해 현무암 초석은 조금 특이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 특징은...



특이하게 만주 흑룡강성 일대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발해의 궁궐 상경용천부 - 오봉루 초석.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이게 뭔 뜻이냐!?

 

발해의 수도였던 도시

 

발해의 궁궐이 있었던 도시

 

 

 

여기 위주로 현무암 초석이 대량

 

발견되고 있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까...

 


상경용천부 / 동경용원부 / 중경현덕부 같은

발해 궁궐 / 수도에서 집중적으로 현무암

 

초석들이 발견되고 있는거죠.

 

 

상경용천부 오봉루 성벽 근처의 현무암 초석. 고구려 초석과 비슷하게 생겼다.



 

특히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된 90% 이상의

초석은 현무암 초석입니다. 간헐적으로 뭐...

자연석이나 화강암 판석도 발견되지만,

 


상경용천부 도성 / 사찰 / 궁궐에서 발견된

돌을 다듬어서 만든 고레벨 초석은 98%

 

현무암 초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발해 삼릉1호분 현무암 초석. 삼령둔 1호분 이라고도 부른다. 발해는 고분에 건물을 올려 의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고분을 조성할때도 기단과

초석을 현무암으로 사용합니다.



과거 한국의 다른 국가들하고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현무암 초석은

발해의 건축적 특징으로 보셔도 됩니다.



왜냐!?

고분마저 현무암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현무암을 엄청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죠!

 

 

러시아 연해주 스초클랴뉴하 우수리스크 레르몬토프 공원의 발해초석. 현무암이다.




게다가 소수이지만

 

러시아 연해주에서 까지도

현무암 초석이 발견됩니다. 

 

 

 

사진은 러시아 연해주 스초클랴뉴하

 

우수리스크 레르몬토프 공원에서


전시하고 있는,

 

 

 

근처 발해 사찰터에서

 

발견된 현무암 초석 입니다.

 

 

발해 삼릉둔 고분이 모여있는 곳에서 발견된 현무암 초석

 

 

 

그런데 제가 만든 건물의

 

초석을 둥근 현무암 초석이죠?

 

 

그 이유는 발해단청 고분벽화가

 

발견된 발해 삼령둔 고분 유적지에서...

 

 

둥근 모양의 현무암 초석이 발견

 

되어서 적용을 해본 것 이랍니다...!!

 

 



그러나...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은 그다지

 

현무암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 발해유적지는

 

소수의 건물터에서만 현무암 초석이 발견됩니다.

 

러시아 연해주 발해 아브리꼬스 사찰에서 발견된 현무암 판석 초석 ( 주춧돌 )

 

 

연해주 발해 코프이토 / 아브리꼬스 사찰 같은

 

절터에서는 현무암을 사용하는데, 그 외 각종

 

토성에서는 대체적으로 화강암 및...

 

 

여타 다른 자연석들 위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발해 입니다...!! 

 

 

실제로 러시아 연해주 콕샤로프카 발해유적지는 화강암 초석만 잔뜩 발견된다. 대부분 납짝한 화강암 판석을 사용했다.

 

 

 

연해주 콕샤로프카 그리고 북한의

오매리 절터의 경우에는 화강암 자연석과

화강암 판석 초석 위주로 출토가 됩니다.

 

 

현무암이 그다지 많이 않은 북한 북부

 

지역의 발해 건물터와 연해주 토성들은

 

화강암 자연석 초석을 선호합니다.

 

 

북한 함경도 청해토성 근처에서 발굴된 발해건축물 유적. 오매리 발해 금산건물터 라고 부른다.

 

 

 

북한에서 발견된 발해 건물터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함경도 청해토성

 

인근에서 발견된.....

 

 

 

오매리에 있는 금산 이라는 작은

 

뒷동산에서 발견된 발해 건물터 입니다.

 

 

 

보통 오매리절터 / 오매리절골 / 오매리사지

 

금산 건물터 라고 부르고 있는 유적지 입니다.

 

 

북한 함경도 발해 금산건물터 초석. 보면 알수 있지만 화강암 초석이다.

 

 

 

보면 알 수 있듯이, 발해 건물터인데

 

화강암 초석을 사용한게 보입니다.

 

 

 

그래서 발해 현무암 초석은 만주지역,

그것도 흑룡강성 근처의 발해 궁궐들과

궁성들 위주로 발견이 되고 있는.....

 



특정 지역에서만 잔뜩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 초석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발해의 넓은 영토에서 한반도 북부하고

러시아 연해주 방면 토성들에서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죠.





발해의 궁궐인 상경용천부나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에서 궁궐건물을 만들때에는...



현무암 초석 위에다가 이렇게 기둥밑둥에

유약을 발라 구워만든 기둥밑둥 녹유장식

기와까지 설치했습니다.



더더더더더더더욱

과거 우리나라 국가들 하고 꽤나

다르다는게 느껴지는게 발해의 건축 입니다!



#발해 건축양식 / #발해유물

#발해 멋있는 유물 / #발해 복원


#발해 특이한 유물 / #발해 건축 복원및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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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뵤도인 호오도 입니다.

 

창건 년도는 1053년 이랍니다.

 

헤이안시대 건축물 입니다.

 

 

우리나라가 고려시대일때 만든 건축물 인데요!

 

 

 

여기서 의외로 고려시대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는 지붕장식이 있습니다.

 

 

뵤도인 호오도 지붕은 봉황만 유명한데, 사실 내림마루 용두도 우리나라 건축 고증할때 꽤나 중요한 자료다.

 

 

 

그것은 평등원 봉황당의

 

내림마루 용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고,

 

그다지 눈여겨 보지도 않는 뭐 그런거지만...

 

 

 

저 내림마루 용두를 설치하는 양식이

 

고려시대 불교회화에 나오는 내림마루

 

용두를 설치하는 방식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윗쪽의 고려시대 불교회화는

 

일본 오타카지 ( 대고사 )

 

 

 

여기서 소장중인

 

고려시대 불교회화 인데요!

 

 

 

자세히 보시면 팔작지붕 내림마루를

 

용두가 완전히 가리는 방식으로 설치 합니다.

 

 

 

어떤가요?

 

고려시대 불교회화하고 뵤도인 건물이

 

나름 서로 교차검증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일본의 실제 1000년도 즈음의 건물과...

 

우리나라 고려시대 불교회화가 이런식으로 나름

 

교차검증 되는 건축양식들이 꽤 있습니다.

 

 

 

 

내림마루를 설치하는 방식이 1053년 건물인

 

뵤도인 호도오 ( 평등원 봉황당 ) 하고 거의

 

똑같은 것 입니다!

 

 

 

이러한 내림마루 용두 설치법은 조선시대

 

건축물에서는 사실상 확인이 안되는 양식!

 

사실상 잊혀진 기와 설치방식 입니다.

 

 

 

내림마루 / 추녀마루 용두 설치는

 

창덕궁이나 경복궁 에서도 쉽게 확인

 

가능해서 비교하기가 무척 쉽습니다.

 

 

 

 

사진으로 1:1로 비교하니까

 

확실하게 다른게 보이시죠??

 

 

 

이걸로서 알 수 있는 사실!

 

고려시대 내림마루 / 추녀마루 용두기와

 

설치방식은 되려 일본하고 닮아있습니다...!

 

 

고려 불교회화 / 뵤도인과 다르게 내림마루 앞쪽을 그냥 빈공간으로 냅두는게 조선시대 건물의 특징이다.

 

 

 

사진만 보셔도 아시겠죠!?

 

조선시대 하고는 확실히 약간 다릅니다!

 

 

 

물론 조선시대 내림마루 / 추녀마루를

 

잡상과 용두기와로 꾸미는 방식은.....

 

 

 

당연히 고려시대 건축 양식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게 맞지만...

 

 

 

이상하게 내림마루 용두 설치 방식은

 

조금은 바뀐 상태로 전승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용두설치 방식은

 

거의 멸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냐면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실제 건물들에서

 

내림마루 / 추녀마루 정면에 용두를 설치한

 

사례가 아직까진 없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어딘가 하나쯤 숨어있을거 같긴 한데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불교회화 1323년 추정 관경십육관도. 조선시대하고 약간 다르다.

 

 

 

뵤도인 호오도가 그나마

 

유일한 실존하는 고려방식의

 

내림마루 용두설치 방식 건물입니다...

 

 

 

 

참고로 이렇게 내림마루 용두를

 

마루앞쪽에 설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가 1개 더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발해 입니다!

 

발해 귀면와가 저렇게 앞쪽을 다 막는

 

방식으로 설치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원한 상경용천부 9절터 녹유 귀면와

 

 

 

바로 이 귀면와 입니다!

 

바로 이 발해 귀면와가 윗쪽에

 

뵤도인 호오도 / 고려 불교회화처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가장 정면에

 

설치하는 기와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귀면와를 실제로 적용하면 이런 모습일껍니다.

 

 

 

 

아마도 발해의 귀면와는 이런식으로

 

내림마루 얼굴쪽 ( 가장 정면쪽 )

 

이쪽에 설치를 했을겁니다.

 

 

이렇게 설치한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습니다. 볼까요!?

 

 



이런게 특징 입니다.

 

조선시대 용두하고는 다르게

 

 

 

기와에 접합하는 위치가 90도

 

각도로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90도에 접합면이 있으므로 설치를

 

수직으로된 면에다가 설치해야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결론은 조선시대 용두하고

 

발해 녹유 귀면와는 기와의 각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 설치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발해 삼릉2호 고분의 단청을 적용해본 상경용천부 2궁전 동서협문



 

 

아예 각도부터 다릅니다. 그래서

 

발해 녹유 귀면와는 조선시대 용두처럼

 

내림마루 윗쪽에 얹듯이 설치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발해는 뵤도인 호오도

 

그리고 고려시대 불교회화 처럼...

 

 

 

녹유 귀면와를 이렇게 마루의 맨 앞쪽

 

내림마루 얼굴쪽에 설치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헤이안시대 건축물인

 

뵤도인 호오도 지붕에 설치된 용두는

 

그냥 보면 뭐 별것도 아닌거 같습니다만!

 

 

 

대놓고 발해기와 / 고려시대 불교회화

 

하고 직접적으로 교차검증 되고 있습니다.

 

이래서 제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 입니다...!!

 

 



고려시대 불교회화 건축양식이

 

나름 실존하고 있다! 라는 것을

 

뵤도인이 고증해주고 있는 겁니다!

 

 

 

또한 고려시대 불교회화가

 

무작정 상상으로 막 그린 그림이 아니라,

 

 

 

어느정도는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그린것이라는 주장!!!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게 뵤도인의 용두 입니다.

 

 

14세기 추정 고려시대 불교회화 관경십육관도 - 소장: 일본 오타카지 ( 大高寺 = 대고사 )

 

 

그래서 조선시대하고 전혀 다른

 

고려시대 내림마루 설치 방식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으며...

 

 

고려시대 건축물을 창작이던

 

복원이던 / 재현이던 실제로 만든다면

 

내림마루 용두는 이렇게 설치해야 합니다!

 

 

 

 

윗쪽의 오타카지..... 그니까 일본 대고사 소장

 

고려시대 불교회화 건물 양식을 몇가지

 

재현해봤습니다.

 

 

오타카지 소장 불교회화 건축 양식은 나름

 

고려도경 기록하고 교차검증 되므로 꽤나

 

신빙성이 높은 건축양식 입니다!

 

 



특히 이 건물양식이 우리에겐

 

이질적인 건축 양식이지만 나름

 

고증이 되는 건축 양식 입니다.

 

 

 

난간 아랫쪽을 첨차와 두공으로 포작을

 

만들어 난간을 받치는 매우 중국스럽고

 

매우 일본스러운 건축양식은...

 

 

 

위에 오타카지 관경십육관도는 물론이거니와

 

고려시대 기록인, 고려도경 기록에 존재하는

 

건축양식 입니다.

 

 

 

 

건물 난간 아랫쪽을 포작으로

 

받쳐주는 1층 건물 기록은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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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도경 : 청풍각 -

 

 

청풍각은 관청(館廳) 동쪽이자

 

도할관·제할관 거처의 남쪽에 있다.

 

 

규모는 5칸이며 난간의

 

아래쪽은 기둥을 세우지 않았다.

 

사각형 두공만을 여러 개 얽어매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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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같은 경우는 국내에 실제로

 

있었던 옻칠 기둥입니다. 조선시대

 

청평사 건물에 실제로 남아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실제 건물에 저런 짙은

 

옻칠을 바른 건물은 한채도 없습니다만!

 

 

 

 

조선시대 회화인 송도사장원계회도

 

여기에 옻칠 기둥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남아있어서 참조는 가능합니다.

 

 

 

 

제가 만든 고려시대 건물은 창작이지만

 

여러가지 자료를 토대로 잊혀진 한국의

 

건축 양식을 재현한 건물입니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쪽 용두는

 

불교회화 / 뵤도인 / 발해 귀면와처럼

 

마루 가장 앞쪽면에 설치해봤습니다.

 

 

 

용두  설치부터해서 힐막이라는

 

고려시대 타입의 비단 설치 등등,

 

 

 

고려도경같은 고려시대 기록이라던가

 

고려 불교회화 양식을 적극적으로 건물에

 

적용하면, 조선시대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진짜 고려시대 건축! 이라고 느껴질만한

 

건물이 만들어집니다. 그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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