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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꺾음 팔작지붕 건축물을

 

만들어 봤습니다. 전통건축을 매우

 

좋아하시는 분들은 어느정도 아실거에요.

 

 

 

고구려 또한 꺾음지붕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꽤나 크다는 것을요...!!

 

 

고구려 토성벽과 꺾음지붕 건축

 

 

 

고구려는 이런저런 자료를 보다보면

 

일단 꺾음지붕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되고 있습니다.

 

 

 

특히 꺾음팔작지붕 양식은 나름대로

 

있었을 확률이 많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고구려 꺾음 팔작지붕

 

양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고구려 꺾음 팔작지붕에 대하여 -

 

 

 

전통건축 , 특히 삼국시대 건축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관심 가져본 지붕 양식이

 

바로 이 꺾음지붕 건축물 일겁니다.

 

 

 

꺾음지붕 양식이란 한개의 지붕을

 

모종의 이유로 2개로 나누어서 ...

 

 

 

여전히 한개의 지붕이지만, 통짜가 아닌

 

2단으로 꺾은 지붕을 가르킨다고 보시면 됩니다.

 

( 비슷한 양식으로 눈썹지붕이 있습니다 .)

 

 

가장 유명한 꺾음지붕 건물 자료인 일본 호류지 소장 옥충주자 ( 다마무시노즈시 , 7세기 추정 )

 

 



고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중에 하나며

 

700년대 이전까지는 자주 사용한 지붕으로

 

추정합니다.

 

 

 

한개의 지붕을 일부러 2단으로 꺾어만든

 

꺾음지붕, 꽤 낮설게 느껴지는 지붕이죠?

 

아무래도 한국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꺾음지붕은 유독 우리나라만 자료가

 

많이 부실해서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지

 

동아시아 전반에서 많은 자료가 발견됩니다.

 

 

사천성 목마산 애묘출토, 동쪽 한나라시대 집모양 명기 1~2세기. 가장 오래된 꺾음지붕 자료다.

 

 

 

 중국에서는 2세기 한나라 가형토기 부터

 

존재가 확인되는 지붕 입니다.

 

 

 

꺾음팔작지붕만 놓고 보자면

 

그 자체로 팔작지붕의 프로토 타입 입니다.

 

 

 

꺾음 팔작지붕이 탄생한 이유인

 

맞배지붕의 단점 + 우진각 지붕의 단점

 

이 두가지를 보완하기 위한 지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맞배지붕의 장점과

 

우진각 지붕의 장점을 합친 굉장히

 

실용적인 지붕이라는 뜻 이죠!

 

 

 


그래서 지붕이 2단으로 구성되어있고

 

윗쪽은 맞배지붕으로, 아랫쪽은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게 일반적 입니다.

 

 

 

( 근데 팔작지붕 형태만 사용된건 아닙니다. )

 

 

둔황석굴 296굴 , 북위 건축물 그림, 꺾음팔작지붕이 제대로 보인다.

 

 

 

중국쪽은 2세기 한나라 가형토기부터

 

발견되기 시작해서, 오호십육국 시절

 

북위 6세기 둔황석굴 벽화까지는

 

 

자주 / 쉽게 확인 되지만

 

그 이후 7세기 당나라 시절부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고식지붕 이랍니다.

 

 

 

중국쪽에서는 7 ~ 8세기 부터 일반적인 통짜

 

팔작지붕이 강세를 보이면서, 꺾음팔작은

 

사실상 멸종하게 되는거 같더라구요.

 

 

옥충주자는 한반도와 관련있는 꺾음지붕 건축 자료로 평가되는데, 그 이유가 그림의 인물들 복식이 한반도계 복식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호류지에서 소장중인

 

옥충주자 ( 다마무시노즈시 , 7세기 )

 

이게 가장 오래된 꺾음팔작지붕 자료 입니다.

 

 

 

한국의 시대로 치자면

 

삼국시대 후반 ~ 통일신라 초기 자료이고

 

나름 한반도계 물건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옥충주자에 그려진 인물들 복식이 한반도계

 

복식과 유사한 점 때문에..... 옥충주자 자체가

 

한반도 백제계 물건이 아니냐?

 

 

 

그래서 옥충주자 건축 양식은 백제계

 

건축 양식 아니냐? 라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은 꺾음팔작지붕 양식이 거의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역이고 활용도 자주한다.

 

 

 

꺾음지붕이 8세기 즈음

 

부터는 사실상 멸종하게 되는

 

한국, 중국하고 전혀 다르게.....

 

 

 

일본은 꺾음지붕 계열을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사용하는 되게 특이한 국가입니다!

 

 

 

꺾음지붕은 일본명으로 2가지 입니다.

 

표준어 등록 / 전문 용어는 [ 시코로야네 ]

 

평균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 시코로부키 ]

 

 

일본식 꺾음지붕인 시코로야네를 적용한 일본 동대사 준명당

 

 

 

시코로야네는 표준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전문 용어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한국명으로는 [ 아옥근 ] 이라고 합니다.

 

시코로야네 = 錏屋根 : 아옥근

 

 

 

= 투구 목 가림 [아]

 

= 집 [옥]

 

= 뿌리 [근]

 

 

일본 사천왕사 중문은 꺾음지붕 건축물 복원사례중에서 매우 유명하고 우수한 사례다.

 

 

그러나  꺾음지붕 계열을

 

부를때 좀 더 대중적으로는...

 

 

 

시코로부키 라고 하는듯 합니다.

 

한국어로는 [ 철즙 ] 이라고 부릅니다.

 

 

 

錣葺 = しころぶき = 시코로부키

 

錣 바늘 철 / 葺기울 즙 = 철즙

 

 

 

둘다 꺾음지붕을 뜻하며 , 둘다 사용되는

 

단어 이므로 아무거나 사용하고 싶으신

 

단어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근데 아마 전통건축에

 

관심있는분들 조차도 보통

 

삼국시대 우리나라 자료중에...

 

 

 

꺾음지붕 or 꺾음팔작지붕의

 

확실하고 정확한 자료가 있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 일겁니다.

 

 

 

그 만큼 유독 한국에서는

 

자료가 아예 없는 수준인게 바로

 

꺾음지붕 or 꺾음팔작지붕 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꺾음팔작지붕을

 

암시하고 있는 건축 벽화가 딱 하나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3호분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누각. 지붕을 2단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꺾음지붕으로 추정 가능하다.

 

 

 

삼국시대 고구려 꺾음팔작지붕

 

자료중에서 가장 확실한 자료는

 

바로 이 누각 그림 입니다.

 

 

 

이 누각 그림은 고구려 벽화 고분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 누각 입니다.

 

 

 

이 건물 지붕이 어째서 꺾음팔작지붕을

 

암시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해석해볼게요.

 

 

 

그러니까 저 그림에서 관찰해야할

 

핵심적인 내용을 바로 이것 입니다.

 

 

 

지붕을 보시면 2단으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맞배지붕 내림마루가 암키와하고

 

분리되어 있고, 암키와는 수직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림마루와 암키와가

 

교차하는 지점을 ㄱ자 모양으로

 

그렸고, 지붕을 2단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니까 2층 지붕 가장 모서리 부분이

 

평기와하고 내림마루가 분리되었고

 

암키와가 수직으로 표현됩니다.

 

 

 

아랫쪽 우진각의 추녀마루 기왓골에

 

맞배지붕 끝부분을 맞춰야 하는 방식을

 

현한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안악3호분 지붕이 꺾음지붕을 표현한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 아닐까 합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렇듯

 

고구려 안악3호분 누각 그림의

 

표현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알 수 있죠?

 

 

 

고구려 또한 꺾음 팔작지붕 양식이

 

일단은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을...

 

그나마 추정이라도 할 수 있어요.

 

 

 

백제보다 오히려 고구려 건축에서

 

더 확실한 꺾음지붕 양식이 발견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 입니다.

 

 

 

 

안악3호분 누각이 꺾음 지붕을 표현한걸로

 

생각되는 두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안악 3호분에는 누각 말고도 여러가지

 

건물 그림을 그렸는데, 대다수가 우진각

 

지붕 입니다. 그리고 그림들을 관찰해보면...

 

 

 

안악 3호분 2층누각 하고 다르게

 

지붕을 2단으로 나눈 표현도 없고

 

대체적으로 ㄱ로 꺾은 표현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안악3호분 누각도가

 

꺾음 지붕을 표현한 건물이 맞다고 생각해요.

 

 

사천성 목마산 출토 동한 명기 /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곳이 딱 붙어있다.

 

 


고화질 사진을 찾기가 힘들어서

 

일단 적당한 사진으로 확인해보면...

 

 

동한 애묘출토 꺾음팔작지붕 한나라

 

가형토기 또한 윗층 내림마루를...

 

 

필자가 주장하는 방식에 매우 가깝게

 

설치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지붕 합각 / 너새기와 위치를 보면 )

 

( 너새 합각기와 부분은 ㄱ자 모양이 될수밖에 없는 상황 )

 

 

 

 

그래서 이렇게 맞배지붕층 내림마루를

 

ㄱ자 모양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무작정

 

추정 / 상상까지는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건물터 중에서 꺾음 지붕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실하게 발견된건 아니라서

 

100% 무조건 있었다 ! 라고

 

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벽화 그림이 있으니까

 

고구려도 꺾음 지붕을 사용했을수도 있다!

 

라고 추정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구려 건축물의 꺾음지붕은

 

지금 한국의 기와지붕하고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지붕입니다. 왜냐하면...

 

 

 

저번 게시물에서도 설명했지만

 

고구려 시절은 수키와를 겹겹

 

포개서 쌓는 방식,

 

 

스페인 기와 방식으로 기와를 시공해서

 

지금의 한옥 지붕하고 느낌이 꽤 다릅니다.

 

 

실제로 정릉사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키와. 보통 토수기와 라고 부르며 고식타입 이다.

 

 

 

스페인 기와식으로 만든 수키와는

 

보통 토수 기와라고 부릅니다.

 

 

주로 삼국시대때 자주 사용되었던걸로

 

추측되고 있고 , 실제로 삼국시대 사찰

 

혹은 건물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삼국시대 수키와는 스페인 기와마냥

 

포개는 방식으로 수키와를 쌓는게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도 고구려 유적지 연천 호로고루 기와들. 고구려 토수기와며, 포개듯이 쌓은게 실제로 확인되었다. 출저 네이버카페 : https://cafe.naver.com/photo291ad

 

 

 

이런 토수기와 계열은 7세기 즈음

 

부터 슬슬 일반 기와로 교체되기

 

시작해서, 고려시대 즈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는 그런

 

수키와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건물하고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지붕

 

모습이 다르게 느껴진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수키와를 쌓는 방식 하고...

 

 

고구려의 수키와 쌓는 방식이

 

약간이지만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안악3호분은 중국에서 귀하하신

 

동수선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만,

 

 

 

고분 자체는 북한 황해남도에 있는 고분 입니다.

 

우리나라 한반도 내부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죠.

 

 

 

 

그래서 아마 동수선생이 귀화하시면서

 

꺾음지붕 건축양식이 평양이나 황해도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정이 가능 합니다.

 

4세기 후반에는 그래도 꺾음지붕 양식이

 

확실히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 또한 토성을 만들어서 사용했다. 대표적인 고구려 토성으로는 청암리토성이 있다.



이번 고구려 건축물의 단청은

 

안악 1호분 단청을 적용했습니다.

 

 

안악1호분은 4세기 말, 그러니까

 

300년대 후반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 고분 중에서는 매우

 

오래된 고분중에 하나랍니다.

 

 

고구려 안악 1호분의 첨차, 기둥, 주두 그림. 소로및 주두가 라운드 처리된 모습이고 편수깎이 기둥처리도 보인다.

 

 

 

제가 만든 고구려 꺾음지붕 전각의

 

첨차 / 기둥 / 주두및 창방 단청은...

 

 

 

안악 1호분 고분벽화 최대한 보이는

 

그대로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설명에 있지만 다른 고분하고 조금

 

다르게... 소로나 주두가 각진 모습이

 

아니라 모서리에 라운드 처리가 되었고,

 

 

 

기둥 가장 윗부분에 편수깎이라는

 

전통 라운드 처리가 되어있는 모습입니다.

 

날으는 물고기는 비어 , 옆에 말은 천마 혹은 기린이라고 한다.



 

안악1호분의 원형 무늬와

 

불꽃 무늬도 사용해봤습니다.

 

 

 

참고로 저 원형은 고구려 태극무늬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건물의 흰벽체는

 

그냥 안악 1호분 벽체 전체가 하얀색 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건물벽 색상은 하얀색으로

 

칠하는게 당연해서 하얀색 벽으로 만들었습니다.

 

 

 

불꽃무늬 아랫쪽에 연꽃그림과

 

모서리에 고구려 여의두문이 있습니다.

 

또한 모줄임 천장에는 보상화문 그림이 있어요.

 

 

고구려 여의두문은 보뺄목에 적용해봤고

 

고구려 보상화문은 추녀 정면에 사용해봤습니다.

 

 

필자는 안악1호분 건축자재와 단청을 최대한 이용하여 건물을 만들었다!

 

 

 

안악 1호분은 발굴한지 너무 오래되서

 

제대로 된 사진자료 거의 없습니다...

 

초고화질 몇장 존재하는게 전부에요.

 

 

 

그래서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초고화질 원본 사진이 매우 드물어서...

 

 

 

그나마 쉽게 이해하시라고

 

안악1호분 고분벽화 모사도를 같이 올립니다.

 

제가 그린 단청및 건축양식이 한눈에 보이죠...!?

 

 

 

 

- 평양시 출토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해보기 -

 

 

 

 

그런데 치미가 처음보는 고구려 치미같죠?

 

고구려가 저런 치미를 사용했다라는 사실!

 

혹시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일제가 평양에서 발굴한 고구려 치미. 위치는 자세하게 알려져있지는 않다.

 

 

 

일제가 한창 고구려 유적 들쑤시고 다닐때

 

평양에서 이런 모양의 치미편을 찾아냈습니다.

 

 

 

치미 몸통 부분인데요, 몸통은 빗살무늬로 장식했으며

 

뿔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흔적이 확실히 남아있습니다.

 

 

 

몸통부분이 너무 확실하게 남아있고,

 

뿔도 있던게 아주 확실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하기 꽤 쉬운축에 속하는 치미 입니다.

 

 

 

 

백제 부소산사지 치미 ( 추정 서복사 치미 ) / 서성훈 선생 복원품으로 추정 , 1978년 복원

 

 

왜 추측이 쉽냐고요?

 

바로 백제치미 때문입니다.

 

 

 

윗쪽 몸통 부분에 대각선으로

 

빗살무늬를 그려 장식했고, 뿔이

 

붙어있던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저런 모습은 국내에서는 일단 백제치미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백제 치미하고

 

평양 출토 치미편이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나요?

 

 

 

일단 몸통 두께도 비슷하고

 

치미 뿔 부분 두께도 비슷한걸로

 

추정되고, 빗살무늬도 거의 똑같고요...

 

 

 

 

 

 

최근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재복원한

 

부소산 출토 , 서복사 추정 백제 치미도

 

굉장히 비슷한 외형을 보여줍니다.

 

 

 

이 두 치미는 몸통 두께부터 뿔 두께까지

 

거의 비슷한 것으로..... 그냥 눈으로만 봐도

 

어느정도 짐작이 가능한 수준 입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치미를 재현및

 

복원한 것이고, 패턴을 2가지로 추정이

 

가능해서 2가지 패턴으로 제작 해봤습니다.

 

 

일제시대 출토, 평양 대동시 고구려 치미파편을 각종 교차검증으로 필자가 재현한 모습이다. 2가지 타입으로 만들어봤다.

 

 

 

치미를 2가지 타입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가지는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타입

 

다른거는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아예 없는 타입

 

 

이렇게 2가지로 만들어봤는데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타입 -

 

 

 

 

 

우선 치미 날개와 몸통쪽에

 

띠가 한줄 붙어있는 타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평양출토 고구려 치미는 몸통부분만

 

발견되었어도 그 모습이 뭐랄까요,

 

 

 

엄청나게 전형적인 6 ~ 7세기 시절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치미 모습이라

 

추정이 그나마 매우 쉬운 편입니다.

 

 

 

그 교차검증 자료들 중에서 치미와

 

몸통부분에 띠가 한줄 있는 자료들을 볼까요?

 

 

일본 7세기 치미, 호린지 치미파편. 몸통과 날개부분에 띠 한줄이 부착되어있다.

 

 

 

 

이 치미는 일본 사찰, 호린지에서 출토된

 

7세기 치미로 추정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죠?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한줄 부착 되어있어요.

 

 

 

이 치미는 백제계 치미로 추정하는데요, 백제계

 

치미로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부소산사지 치미 ( 추정 서복사 치미 ) / 서성훈 선생 복원품으로 추정 , 1978년 복원

 

 

 

 

위에서 본 치미죠? 부소산 출토

 

서복사 추정 치미 입니다. 더 뭐...

 

솔직히 설명이 필요 한가요?

 

 

 

몸통과 이어지는 부분에 띠가 부착

 

되어있습니다. 다만 2줄의 밴드타입

 

으로 부착되어있습니다.

 

 

 

몸통에 빗살무늬 + 날개부분 띠 부착

 

이 두가지 조합이 백제 치미의 특징 입니다.

 

 

미륵사 동원승방지 출토 치미, 통일신라 8 ~ 9 세기

 

 

 

그리고 미륵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절 치미도 이런 양상을 보여줍니다.

 

 

비록 통일신라 시절 만든걸로 추정되지만

 

몸통쪽 빗살무늬가 약간 남았으며 날개와

 

몸통쪽에 띠 한줄이 붙어 있습니다.

 

 

일본 아스카시대 치미들. 대다수가 빗살무늬와 띠가 붙어있다.

 

 

 

그 외 다수의 일본 아스카시대 치미들

 

모습을 보면 빗살무늬 + 띠한줄 부착

 

이 모습의 꽤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다른점이라면 치미의 뿔이 백제 치미들

 

보다는 훨씬 얆다고 보시면 됩니다.

 

 

공주시 출토, 주미사 치미 ( 통일신라 추정 )

 

 

 

그리고 충청도 공주시에서 출토된

치미가 하나 있습니다. 이 치미는

주미사 라는 사찰의 치미 입니다.



사찰 자체는 백제 사찰터로 추정하고

치미는 통일신라 시기로 추정합니다.



백제 ~ 통일신라 치미인데

 

그 모습이 매우 삼국시대 치미스럽죠?



공주 주미사 치미는 위에서 보이는

 

삼국시대 치미의 특징이 전부 보이는

 

삼국시대 타입 치미 입니다.

 

 

 

몸통에 빗살무늬와 날개와 몸통이

 

만나는 구간에 띠 한줄을 부착했습니다. 

 

 

 

그러나 동그란 무늬가 있죠?

 

저 동그란 무늬를 보통 연주문 이라고 하는데요.

 



여튼 저 연주문 때문에 통일신라 치미로

 

추정이 가능하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평양출토 고구려 치미파편 몸통부분

 

 

 

일제가 출토한 평양 대동시 출토 고구려 치미는

 

일본 치미하고도 매우 비슷한 모습입니디만,

 

 

 

다만 일본의 치미들하고 다르게 뿔 부분이

 

백제 치미처럼 많이 두꺼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치미는 일본 치미보다는

 

백제 치미하고 훨씬 비슷할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죠.

 

 

 

 

고구려 치미도 몸통에 뿔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치미파편이 있습니다.


솔직히 확실한 치미 뿔은 아니지만


그 모습이 뿔이랑 나름대로 비슷해서

 

추정 정도는 해볼 수 있는것이죠.

 

 

치미가 몸통만 발견되어서 이 모습이 100% 세세하게 고증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얼추 전반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으로 추정할수 있다.

 

 

 


비록 완전한 모습의 치미가 출토된건

 

아니지만, 이렇게 여러가지 자료를 토대로

 

교차검증이 매우 쉽게 되는 치미 입니다.

 

 

 

이렇게 500 ~ 600년대 삼국시대

 

치미들은 날개와 몸통쪽 띠를 부착했다는점,

 

그리고 빗살무늬가 대체적으로 같이 있다는 점,

 

 

 

또한 고구려 사람들이 일본으로도 많이 넘어가서

 

고구려 문화를 전파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치미에 띠 한줄을 부착한 타입을 제작한 것 입니다!

 

 

 

- 고구려 치미 재현복원 : 날개와 몸통 부분에 띠가 없는 타입 -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없는 모습이...

 

 

훨씬 확실한 모습이고, 실제 모습에 가까울 가능성이

 

한 2배 이상 높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 이유를 봅시다!

 

 

고구려 정릉사 출토 치미 날개편. 왼쪽이 날개편이고 오른쪽이 몸통부분인데 띠가 없다.

 

 

이런 빗살무늬 장식 치미중에서

 

몇 안되는 고구려 치미중에 하나인

 

정릉사 출토 치미파편 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 없읍니다...!

 

 

 

왼쪽이 날개편이고 오른쪽이 몸통인데

 

띠가 없죠? 네. 고구려 치미는 날개쪽에

 

띠가 없는 타입이 확실하게 발견된 겁니다.

 

 

 

고작 아주 약간의 날개 부분과 몸통 부분이지만...

 

몸통과 날개쪽에 띠가 아예 없는 치미라는건 확실합니다.

 

 

왼쪽은 중국 대동시 출토 업성유적 / 오른쪽은 예청 유적출토 6~7세기 치미



 

중국쪽 치미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북위 치미로 추정되는 대동 삼국지

 

업성유적 출토 치미와...

 

 

 

예청시 출토 북위 추정 치미 또한

 

몸통과 날개 부분에 띠가 한줄도

 

안 붙어있는 모습 입니다.

 

 

일제가 출토한 고구려 날개편 , 평양 주안동 출토라고 하는데..... 딱 그 내용만 있는 치미다.

 

 

 

그리고 평양 출토 고구려 치미파편중에

 

날개 부분만 발견된 경우가 있는데요,

 

 

이게 떨렁 날개 부분만 발견된거라...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 감을 잡기가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날개 부분에...

 

 

띠가 특별히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날개편 자료도 참조를 했습니다.

 

 

평양대동 출토 치미펴판 원본. 윗쪽 주안동 출토 치미날개편하고 셋트로 소개되고 있다.

 

 

 

참고로 주안동 출토 치미하고 셋트로 소개된

 

치미가 바로 평양 대동 출토 치미몸통 입니다.

 

 

 

평양 대동출토 치미는 날개편 자료가

 

하나도 없거니와... 주안동 치미하고

 

셋트로 소개되고 있기도 해서...

 

 

 

어짜피 치미 날개 모양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그래서 이번 치미를 만들때 대동치미 몸통하고

 

주안동 치미 날개편을 조합하여 치미를 만들었어요.

 

 

고구려 정릉사 치미 파편을 기준으로 평양대동 치미와 각종 백제 / 일본 / 중국자료를 모두 참조하여 만든 타입이다.

 



고구려 정릉사 출토 치미 날개편부터

 

고구려 주안동 치미 날개편 이라던가...

 

그외 중국 오호십육국 시절 치미들만 봐도...

 

 

 

몸통과 날개가 접합하는 부위에

 

띠가 없는 모습이 꽤나 일반적이라서

 

이런 사실들을 정상 참작하여 제작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재현 / 복원한 치미 모습은

 

100% 완벽하고 세세한 고증으로 만든건

 

아닙니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치미가 몸통만 발견되어서 , 제가 만든 치미

 

모습이 100% 세세하게 고증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차검증및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제가 재현한 모습이 100% 완벽하진 않아도

 

치미의 전반적인 모습은... 이정도 모양 일거다!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고구려 석탑에 대하여 : 팔각 칠층 석탑 재현해보기 -

 

 

 

 

고구려는 남아있거나 발굴된

 

석탑이 일단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삼국시대 기록에 고구려

 

석탑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삼국시대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고구려는 7층 8각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구려 영탑사 7층 팔각 석탑

 

 

 

삼국시대 기록과 각종 자료를

 

토대로 필자가 상상으로 재현한

 

고구려 칠층 팔각석탑 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석탑에 대한

 

기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고구려 석탑에 대한 기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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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 제 3권 : 제4 탑상(塔像第四) -

 

고려 영탑사(高麗靈塔寺)  : 보덕이 신인을 만나 영탑사를 세우다.

 

 

 

고구려 승려 보덕 선생이 강연을 끝내고

 

고구려 성의 서쪽 대보산(大寶山) 동굴

 

아래에 이르러 참선을 하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말하길,

 

“ 이 땅에 와서 살라 "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땅 앞쪽에

 

불교 지팡이 석장을 올려놓고

 

그 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땅 아래를 파보면

 

팔면칠층석탑(八面七層石塔)이

 

거기에 있을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을 듣고 보덕 선생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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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불교사찰, 영탑사를 상상재현 해봤다.



 

 

그러니까 삼국유사 기록에

 

7층 8각 석탑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고구려 영탑사 라는 기록 입니다.

 

 

 

고구려 석탑 기록에 나오는 고구려

 

사찰인 영탑사는 대보산에 있다고 했죠?

 

 

 

실제로 북한에 대보산은 존재하며

 

평안남도 평양시 서쪽에 대보산(大寶山)

 

이라는 산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평양성 서쪽에

 

대보산이 있고 거기에 영탑사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평양 서쪽에 대보산이

 

있어서 삼국유사 기록이 나름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될듯 합니다.

 

 

 

 

 

그러나 추정은 추정일뿐, 아직까지

 

북한 대보산에서 고구려 영탑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석탑의 부자재 같은거도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실제로 석탑이 발견된적은

 

아직 없지만, 기록만큼은 확실히 있는 상황이에요.

 

 

만일 통일을 한다면, 이런식으로 평양 대보산 공원에 팔각 칠층석탑을 재현해봐도 좋을듯하다.

 

 

 

그런데 저는 어떤식으로 추정하여

 

고구려 영탑사 7층 석탑을 저러한

 

모습으로 재현했을까요!?

 

 

 

일단 8각 7층 석탑이란 기록을 토대로...

 

 어떤 석탑을 기준삼아 외형을 추정하여

 

재현한 것 입니다.

 

 

고려시대 사찰인 영명사 5층 팔각석탑. 10세기 중반 즈음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저는 탑을 만들때 바로 이 석탑을

 

기준으로 추정재현 했습니다.

 

 

 

석탑의 이름은 영명사 8각 5층석탑.

 

900년대...... 그니까 10세기 중반에

 

조성된 고려 석탑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구려 석탑에 영향받은 팔각석탑

 

아니냐라는 의견이 존재하는 석탑인데요!

 

 

 

이유는 설명글에 적어놨지만

 

고려시대 사찰인데 사찰부지에서...

 

 

고구려 초석같은 고구려계 건축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서 그렇답니다.

 

 

 

 

또한 일제가 수리하다가 주변에서

 

옥개석 하나를 더 발견했는지,

 

 

 

석탑 수리후에는 6층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영명사 팔각석탑은 5층이 아니라

 

7층 석탑이 아나냐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 기록에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석탑 기록이 있는 상황에서...

 

 


영명사 석탑은 6층 까지 증축된 상황이라

 

충분히 7층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며!

 

사찰 경내에 고구려 건축물 유구들이 발견됬습니다.

 

 



그래서 고려 영명사는 사실

 

392년 광개토대왕이 창건한 9개

 

사찰중에 하나일 가능성도 매우 높은 상황이고...

 

 

 

영명사 5층 석탑이 사실 7층일

 

가능성도 있다라는 가설 등등....

 

 

 

영명사 8각 5층석탑은

 

고구려 석탑에 영향받은...

 

 

고구려계 석탑일 가능성도 쬐끔은... 있어서

 

영명사 8각 5층 석탑을 최대한 참조해서 만든겁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7층 탑이 유행한걸로

 

추정되는데, 하필 고려 영명사 5층 석탑은

 

팔각인데 7층일 가능성이 있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완벽한 고구려 석탑은

 

아직까지는 단 한개도 발견되지 않아서

 

자세한 모습은 모르는 상황이지만...

 

 

 

삼국유사 기록도 존재하고

 

나름 고구려 석탑에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석탑이 존재하므로....

 

 

 

삼국유사 기록 + 고려시대 석탑

 

이 두가지를 참조하여 ,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 석탑을 재현해봤습니다...!

 

 

필자가 재현한 고구려 영탑사 8각 7층 석탑의 부속구는 이 금동장식들을 활용해봤다.

 

 

 

고구려 영탑사 7층 석탑의

 

상륜부 장식은 실제 고구려

 

금동 장식들을 사용해봤습니다.

 

 

고구려 탑모양 금동장식. 보는 시각에 따라 상륜부를 표현한 것으로, 혹은 탑전체를 포현한 것으로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참고로 고구려 금동장식 중에서

 

7층탑 모양을 하고있는 이러한

 

자료들도 존재한답니다.

 

 

 

이 7층탑 모양의 금동장식은 탑 윗쪽에

 

장식하는 뾰족한 첨탑인 상륜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냥 7층탑 전체 외형을 축소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그런 자료 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팔각 석탑 만들때 전체 외형및 상륜부 디자인은

 

바로 이 고구려 탑모양 금동제품을 참조해서 만들었어요.

 

 

북한이 복원한 고구려 사찰 정릉사 대웅전과 그 앞의 7층 석탑.

 

 

 

간혹 북한에서 복원한 정릉사 보면

 

가운데에 7층 석탑을 만들어놨죠?

 

 

본디 목탑터라서 목탑을 만들어야

 

하는데 북한 사정상 7층 석탑으로

 

대신 만들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만든 정릉사 8각 7층 석탑은

 

영탑사 8각 7층 석탑 기록을 근거로

 

만든 영탑사 팔각석탑 입니다.

 

 

 

 

아무튼 고구려 대보산에 있었던

 

영탑사는 이런 모습의 사찰이 아니었을까를

 

상상해보며 석탑과 전각을 만들어 봤습니다.

 

 

 

- 초기 고구려 도성 풍경 상상 해보기 -

 

 

 

 

원삼국시대 중국쪽 기록이나

 

당나라 기록을 보면 ,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한번씩 나오는데요.

 

 

중국쪽 기록에 나온 고구려 모습은

 

대충 이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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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驪) -

 

 - 중국 구당서 199권 : 〈상열전〉 제149 :  고구려조 -

 

- 중국 신당서 -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는 산을 따라 집을 지었는데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가집 이었다.

 

 

그러나 절과 신당, 왕궁, 관아들은

 

민가와 다르게 기와 지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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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쪽 기록에서 하나같이

 

고구려는 산을 따라 집을 짓고...

 

 

민가는 초가지붕 같이 이엉을

 

엮어만든 지붕이며, 관아나 궁궐은

 

기와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 다른 기록을 하나 더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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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읍루(挹婁)

 

 

그들은 산림 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가장 잘 사는 큰집의 경우에는...

 

 

 

계단으로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

 

( 움집 : 심혈 深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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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동이열전은 말 그대로


여러 동이족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역사서 입니다. 

 

 

 

고구려 , 부여, 읍루, 숙신 등등

 

꽤나 여러 동이족들이 등장 합니다.

 

 

 

근데 고구려가 이런 동이족들을 전부

 

흡수하여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잖아요!?

 

 

땅굴 반움집 생활을 하던 읍루까지 흡수한 고구려 도성의 풍경은 이러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해본다.

 

 

 

후한서 기록에 나오는 이엉지붕및

 

땅굴 반움집이 실존하던 저 시절...

 

 

 

수 많은 동이족을 흡수하여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는 초기 고구려 제국.

 

 

 

붉은 기와지붕 + 움집이 섞여있는 모습이

 

초기 고구려 제국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번 합성은

 

부여 읍루 옥저 동예 등등...

 

 

근처 동이족을 전부 제압하고

 

흡수하여 거대해지기 시작하는...

 

 

초기 고구려 제국 시절 도성의

 

모습을 표현해본 합성 이랍니다.

 

 

 

 

또한 고구려도 토성을 만들어

 

운용했다는 사실도 있어요. 아마

 

초기 고구려 제국 도성의 모습은...

 

 

 

선사시대 움집 비슷하게 생긴

 

이엉집이 산등성이를 따라 모여있고...

 

 

 

높다란 토성벽과 그로 인한 약간은

 

초원지대 같은 푸르른 개활지와 들판,

 

 

 

중간 중간 붉은 기와가 돋보이는

 

붉고 하얗고, 엄숙한 기와집들 등등...

 

 

 

 

이제 막 시작하는 제국의 아침은

 

조금은 거칠되 약간은 어설프고,

 

 

 

무규칙인듯한 모습 사이사이

 

굉장히 엄격하고 체계적인 모습이 뒤섞인...

 

 

 

콜라와 와인을 섞은듯한 조금은 혼란스럽고

 

언밸런스한 모습이 강하게 대비되는 독특한,

 

 

 

고대 제국의 태동과 시작을 알리는

 

풍경이 아니었나 하고 상상해봅니다.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 선사유적 공원. 앞에 갯뻘과 오이도 수산시장도 있고... 공원도 작지만 정비가 잘되서 한번쯤 방문할만 하다.



 

참고로 제가 합성한 이 장소!

 

움집 억새집 가득한 공원은

 

바로 이 장소입니다...!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이라는 공원입니다. 오이도 빨간등대

 

바로 뒷쪽에 있는 동산 입니다.

 

 

 

근데 오이도는 고구려랑 하등 하나도

 

관계없고 되려 통일신라 유구만 발견된...

 

 

 

선사유적지겸 , 통일신라 유적지 인데요!

 

그래도 초기 고구려 도성 느낌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 이렇게 합성을 해봤습니다...!

 

 

 

- 안악1호분 고분벽화의 2층 누각 상상재현 복원 -

 

 

 

그런데 윗쪽 석탑이나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합성 사진을 보다보면, 고구려 2층 건물이

 

눈에 띌 겁니다.

 

 

이번에 만든 고구려 2층 우진각 지붕

 

건축물은 바로 이 고분벽화를 참조해

 

만든 건축물 이랍니다.

 

 

안악1호분 회랑및 누각이 그려진 전각도

 

 

 

안악 1호분 고분 벽화에는

 

고구려 4세기 후반 정도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그린 전각도가 하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 ~ 장수왕 시절 즈음의

 

고구려 건물 외형을 조금이나마 유추

 

가능한 벽화라서 매우 중요한 벽화 입니다.

 

 

위의 안악1호분 전각도를 복원한 모습. 정면1칸의 2층 누각이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알아보기 힘들죠? 그래서

 

북한쪽 학자들이 연구해서 복원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복원한 그림을 보면 회랑 한가운데에

 

2층 누각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만든 고구려 2층 누각은...

 

 

바로 안악 1호분 그려진 2층 누각도

 

이걸 참조해서 만든 건축물 입니다.

 

 

 

제가 만든 이 2층 누각은

 

안악 1호분 2층 누각도를 기준으로 하되

 

 

 

아무래도 고분벽화 그림은 실제보다

 

많이 축약해서 그린  그림이다 보니,

 

 

 

실제로는 이런 건축 양식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으로 각종 고구려 건축 양식을

 

추가해서 만든 고구려 2층 누각 입니다.

 

 



일단 고구려 안악 1호분 고분벽화에 그려진

 

회랑과 2층 누각 , 협문 그림 특징을 볼까요?

 

특징은 대략 이 정도 입니다.

 

 

 

- 회랑 기와는 일반적인 검회색 기와다.

 

- 2층 누각은 고구려 붉은색 기와다.

 

 

 

- 2층 누각은 모든층이 정면 1칸이다.

 

- 2층 누각 지붕을 인자화반 / 동자주가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 2층 누각 모든층에 치미가 달려있고, 내림마루는 뿔 장식이다.

 

 

 

제가 만든 2층 누각과 회랑은

 

안악 1호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검회색 기와지붕의 회랑들,

 

 

 

모든층 치미 적용과 내림마루의

 

뿔 같은 장식, 붉은 기와지붕 및

 

인자화반 + 동자주 등등...

 

 

 

안악1호분 누각 그림에서 보이는

 

모든 특징을 전부 집어넣은 건물 입니다.

 

 

 

 

다만 고분벽화 누각도는 정면이 모든층

 

1칸이지만, 제가 만든 건물은 4칸이죠?

 

위에서도 설명 했지만...

 

 

 

정면 1칸 / 측면1칸 건물이 2층인

 

경우가 없지는 않아도... 벽화 그림은...

 

 

 

정면 1칸 / 측면1칸 건물 이라기엔.....

 

지붕도 너무 크고 ,  1층 기둥간격이 너무 넓고,

 

인자 화반은 또 엄청 많고, 치미는 전층 설치했고... 등등.

 

 

 

고분벽화 그림은 실제 건물과 다르게

 

그냥 여러가지 많이 생략하여 그려낸

 

축소된 그림으로 추정 되므로.....

 

 

 

실제로는 좀더 복잡한 건축 설계와

 

기둥이 훨씬 많았을 가능성도 있어서,

 

 

 

실제로는 기둥이 훨씬 많고 건축

 

구성도 훨씬 복잡한 건물이 아닐까?

 

 

 

라는 현실적인 내용을 가정하여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일 회화가 축약된 그림이 맞다면 실제론

 

기둥이 훨씬 많고 , 복잡한 포작일 수도 있으니까요...

 

( 치미가 모든층에 설치된 건물이 정측면 1칸인거도 좀 안맞기도 하고 .... 그쵸!? )

 

 

 

 

그런데 용마루가 벽화에 비해 짧죠?

 

( 용마루 : 지붕 가장 윗쪽 치미달린 일자정렬 부분 )

 

 

 

그 이유는 사실.....처음 건물 구성할때

 

지붕 크기 보려고 임시로 설치하는....

 

 

 

지붕 크기 가늠용 임시 지붕을 설치했을땐

 

안악1호분 정도의 크기로 지붕 정도였습니다만...

 

 

 

이게 지붕 크기 가늠용 임시 지붕을

 

설치한 모습인데요. 설계 할때 당시에는

 

안악1호 2층 건물 그림하고 거의 같은 비율인데...

 

 

 

지붕 시공하고 치미까지 설치하니 생각보다

 

안악1호 2층그림 보다 용마루가 훨씬 짧은

 

모습이 되더라구요...;; 허허

 

 

안악1호분 누각도가 축약된 그림일 경우를 가정해서 만든 2층 누각. 실제론 기둥이 많을수도 있다.

 

 

 

그리고 용마루가 고분 벽화 그림에

 

비해서 훨씬 짧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제가 만든 고구려 2층 건물은 벽화 그림과 함께

 

실제로 발굴된 어떤 고구려 건물터 평면도를

 

기초로 만든 건물 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벽화에 비해서

 

용마루가 좀 짧은 모습이 된거에용...

 

 

 

...그런데...!!

 

 

안악 1호분 누각 그림대로 건물을 만든다면 정면1칸으로 만드는게 맞다.

 

 

근데 안악 1호분 누각 그림을 보면

 

이 건물처럼 정면이 1칸 이잖아요?

 

 

 

실제로 어떠한 고구려 건물터에서

 

실제로 정면 1칸 / 측면 1칸의 누각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실제로 있긴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바로 그 실제로 존재하는

 

정면 1칸 / 측면1칸 건축물에 대한 연구

 

내용을 보도록 하시죠...!

 

 

 

 

 

 

* 참고사항 - 회랑 기와가 일반 검회색인 이유

 

고구려 고분 임강총 출토 일반 검회색 기와

 

 

 

제가 복원한 고구려 건물의

 

회랑기와가 일반 검회색 기와를

 

사용한 이유는 매우 단순 합니다.

 

 

 

안악 1호분 회랑 그림의 기와가

 

검회색이고 , 실제 고구려 고분에서

 

검회색 기와가 발견되어서 적용한 겁니다.

 

 

 

고구려는 세간에 알려진것과 다르게

 

검회색 일반기와를 4~5세기 부터는

 

자주,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고구려 불교 사찰, 정릉사 7호 건축물 복원을 위한 추정해보기 -

 

 

 

 

 

정릉사 7호건물은 차양칸이 정면1칸, 측면1칸 건물이다.

 

 

 

 

이 도면은 북한에서 발굴한 삼국시대

 

고구려 불교사찰 정릉사 전체 도면 입니다.

 

 

 

저 도면 중간 즈음에 있는 7호 건물.

 

저게 핵심 건물입니다. 7호 건물터를

 

자세히 보시면... 한번에 이해하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실제 고구려 정면1칸 / 측면1칸

 

건축물은 바로 정릉사 7호 건물터 입니다.

 

 



정릉사 7호 건물터 도면을 최대한

 

쉽게 축약해서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축약한 도면을 보면 아시겠죠?

 

차양칸으로 추정되는 외부 기둥쪽은

 

정면이 14.4m x 측면이 12.2m 입니다.

 

 

 

신기한점은 거의 15m에 육박하는 건물이고

 

차양칸으로 추정되는데 떨렁 정측면 1칸 입니다.

 

 

 

뭐 더 확실하게 말하면 내부 방 칸은

 

정면 2칸, 측면1칸이라 아주 완벽한

 

정측면 1칸 건물은 아니지만요...!

 

 



안악 1호분 2층 누각 그림입니다.

 

여러분! 그냥 그림만 보면 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안악 1호분 누각도 : 정면 1칸

 

정릉사 7호 건축물 :  차양칸만 정측면 1칸

 

 

 

고분 벽화 = 실제 건물터 평면도

 

뭔가 서로 닮아있는거 아닙니까!?

 

 

 

안악 1호분 누각도는 여러가지 생략하여

 

축소시켜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릉사 7호 건물터 하고 비슷한거도 사실 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누각은 사실

 

정릉사 7호 건물 평면도를 기초로

 

안악 1호분 누각을 참조하여 만든 건물 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해본 고구려 정릉사 7호 누각 재현건축물과 영탑사 7층 석탑

 

 

 

저는 정릉사 7호 건물터와

 

안악1호분 누각건물이 서로 어느정도

 

연관된 건축물 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건축물 이었을지

 

나름대로 추정을 하며 만들어봤습니다.

 

 

 

이제부터 정릉사 7호 건물과 안악1호분 건물이

 

어떤 건물이고, 어떤 역할을 했던 건물인지

 

제가 추정한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2층 경루설 ( 책창고 ) + 너와지붕 (나무기와) + 두꺼운 주심도리 타입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정릉사 7호 건물은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도 꽤 높다고 생각합니다.

 

 

 

차양칸 정측면 1칸씩에 지붕은

 

나무지붕인 너와지붕으로 꾸민

 

책창고 , 경루로 저는 추정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일단 어째서 책창고, 그니까 경전 보관소인

 

경루로 추정하는지 부터 보자면 사실은 꽤

 

간단한 내용 입니다.

 

 

 

건물 규모 대비해서 1층 차양칸이

 

너무 넓고, 내부 기둥들 하고 차양칸

 

간격이 4m 정도로 꽤 넓기 때문입니다.

 

 

 

그니까 건물 차양칸은 거의 15m에 육박하는데

 

내부 방으로 추정되는 기둥하고 차양칸 간격이

 

4m 정도 입니다.

 

 

 

이 정도 크기의 건물 치고는 나름대로

 

차양칸이 많이 넓고, 방이 너무 작습니다.

 

 

근데 외부 기둥이 모서리에 딱 1개씩만 있어서

 

여러모로 생활 건물용으로는 비효율적 입니다.

 

 

정릉사 7호건물 위치는 경루 혹은 종루가 있기에 최적인 위치다.

 

 

 

그리고 위치 입니다. 경릉사 7호 건물은

 

사찰 경내 가장 중심인 대웅전터 그니까...

 

 

 

법당이자 금당터로 추정되는 6호 건물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니까 7호 건물은

 

이런 건물들 딱 한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초대형 건물 정릉사 강당터 ( 41.5m x 11.5m ) = 8호 건물

 

5 ~ 7층 목탑으로 추정되는 정릉사 목탑터 ( 기단 한면 7.3m씩 8각 ) = 2호 건물

 

사찰의 중심인 정릉사 금당터 ( or 대웅전 터 / 기단만 17.8m x 14.8 m ) = 6호 건물

 

 

 

 

이런 중요한 건물들 사이에 샌드위치

 

처럼 있는게 정릉사 7호 건물 입니다.

 

 

 

근데 보면 강당터 바로 아래 있고,

 

대웅전 바로 옆에 있고, 목탑 바로

 

윗쪽에 있습니다. 님들 그렇다면!

 

 

 

위치만 보면

 

건물 용도가 결국 뭐겠읍니까!?

 

알람벨 타워 아니면 책창고에 가장

 

최적화된 위치라고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범종각 계열인 종루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위에서 말했던 [ 차양칸 너비 ] 입니다.

 

 

 

그니까 범종각은 보통 2층에 종 하나 달아놓고

 

1층을 간혹 창고 개념으로 사용하긴 합니다만...

 

 

 

시간되면 한번씩 종만 치고

 

그냥 창고로 잠깐씩 사용하기에는

 

4m가 넘는 차양칸은 너무 넓지 않습니까?

 

 

실제 부석사 범종각 ( 알람벨 타워 ). 그냥 평이한 2층 정자 모습이다. 여러모로 차양칸이 굳이 필요가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책창고라면

 

충분히 차양칸이 넓은게 설명이 됩니다.

 

 

 

님들 보셈!

 

 

 

대규모 불교 행사 때문에 경전을

 

엄청 꺼내야 할때 , 그리고 눈이나

 

비올때 불교 경전 옮겨야 할때...

 

 

 

잠깐이지만 책을 빗물과 눈으로 부터

 

보호하려면 차양칸이 넓은게 무조건

 

도움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정릉사 강당만 봐도 길이가

 

41.5m 정도로 ... 고구려 사찰 중에서는

 

굉장히 많은 인원을 수용했던 대사찰 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정릉사 라면 책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서울 종로 보신각 , 조선초기 초석을 발굴해서 초석을 기초로 복원한 종루다. 역시 무난한 누정 건물이다.



 

행사할때마다 무수히 많은 책을 꺼내고

 

넣어야 할탠데... 그렇다면 당연히 차양칸,

 

 

 

그니까 4면 퇴칸 부계가 설치된 모습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실용적이지 않겠습니까!?

 

 

 

책을 보관하는 책창고 경루이므로 항상 책이

 

운반 되어야 합니다. 4면 퇴칸 부계 ( 차양칸 )

 

공간이 넒은게 사실 무조건 도움됩니다.

 

 

 

또한 귀중한 책을 보관 하는 장소 입니다.

 

습기에 강하고, 그나마 책을 좀 먹는 벌레들

 

방지에 2층 건물이 그나마..... 유리합니다.

 

 

 

그니까 중요한 경전 보관소 이면서

 

경전은 수시로 운반되기 때문에 ...

 

 

 

혹시 모를 눈 , 비올때를 대비하여

 

많은 경전을 임시로 쌓아놓을 수 있는

 

4면 퇴칸 부계 차양칸은 거의 필수 입니다.

 

 

 

또한 건물을 2층으로 만들어서 습기와

 

벌레 방지를 해야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전부 갖춰진 것이 바로 7호 건물 입니다.

 

 

 

건물 위치 / 입지 / 건물 평면도

 

모든 조건이 책창고에 부합 합니다.

 

 

 

그리고 1층 차양칸 / 2층 책창고

 

이런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까지

 

전승되는 문화 입니다.

 

 

 

그럼 1층 차양칸 / 2층 책창고로 사용되는

 

조선시대 건물을 실제로 보겠읍니다...!!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



 

이 건물은 태백산 사고, 그러니까

 

태백산에 설치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璿源譜)를 보관했던 책창고 입니다.

 

 

 

솔직히 뭐...  그냥 딱 보면 이해되죠!?

 

제가 만든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거의

 

비슷한 모습 입니다!

 

 

 

특징으로는 1층이 사실상 빈공간으로

 

부계 , 그니까 4면 퇴칸 차양 처럼만

 

1층 공간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1층 기둥간 간격을 보면 꽤 넓어요.

 

10m 뭐 이정돈 아니라도 꽤나 넓직합니다.

 

그리고 2층은 정면 2칸 측면 1칸 이랍니다.

 

 

 

어.....

 

 

이 모습 어디선가 본거 같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추정 재현해본

 

정릉사 7호 건물이랑 매우 여러모로

 

비슷하게 생겼다는게 딱 느껴지셨죠!?

 

 

 

제가 정릉사 7호 건물터를 알람벨 타워가 아닌

 

책창고 경루로 추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입니다.

 

 

 

조선시대 책창고 태백산 사고 건물하고

 

평면도가 여러모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은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연이 없는 홑처마 서까래 라던가

 

1층 차양칸은 창방이 없는 무창방

 

건물이라는 점,

 

 

 

1층 차양칸 포작은 무창방 이면서

 

실박공의 모습에 소로만 올려놓은

 

굉장히 삼국시대 스러운 포작이라는 점...

 

 

오대산 선원보각 또한 태백산 선원보각하고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개인적으로는 왕실 서적 보관소인

 

태백산 사고 책창고 선원보각은...

 

 

 

1층을 4면 퇴칸 차양인 부계식으로 사용하되

 

사실상 빈공간으로 남겨 두었다는 점,

 

 

 

2층이 정면 2칸 / 측면 1칸으로 만들었다는 점,

 

홑처마 그리고 단순한 가구양식 등... 여러모로

 

삼국시대 스러운 면모가 보입니다.

 

 

 

그래서 태백산 사고 선원보각 건물의 경우는

 

삼국시대 부터 내려온 경전용 건축 양식이

 

조선시대까지 전승된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편견하고 다르게 조선시대 까지 삼국시대

 

건축 양식과 활용법이 전승되어 왔다라는 저만의 주장 입니다.

 

 

 

 

 

 

그러나 선원보각은 전층 기와지붕이지만

 

저는 정릉사 7호 건물 1층을 나무 기와.....

 

그니까 너와로 설정해봤는데요.

 

 

 

이유는 선원보각은 차양칸 기둥이 많아요.

 

근데 정릉사 7호는 차양칸 기둥이 딱 모서리 4개뿐.

 

 

 

그래서 정릉사 7호는 건물의 흔들림 + 하중에

 

선원보각 보다 훨씬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와 + 흙으로 지붕을 매우는 방식은

 

너무 무거워서 추녀와 주심도리, 기둥이

 

하중을 엄청 받게 됩니다.

 

 

 

특히 주심도리에 무리가 많이 옵니다.

 

그래서 기와보단 가벼워야 하는데

 

근데 억새나 초가지붕은...

 

 

 

벌레 미칠듯이 번식하는 벌레 양성소 ,

 

진정한 스포닝 풀 입니다...! 벌레 천국이 되므로

 

책 보관소 지붕에 알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뭐 시공하는 방법마다 다르긴 한데 여튼

 

가장 가벼운 지붕이 초가 입니다. 그런데

 

정릉사 7호 건물터 같은 경우는...

 

 

 

기둥이 몇개 없어서 적당히 무거운 지붕이어야

 

지붕 하중으로 건물 흔들림을 보완해야 하는데

 

초가지붕 계열은 좀 가볍다 보니까...

 

 

 

그나마 벌레 덜 몰리고 + 흔들림 보완을 위한 적당한 지붕무게

 

이 모든걸 갖춘게 너와지붕 이라고 생각하여 적용해봤습니다.

 

 

 

딱 기와+흙채움 보단 가볍고 초가보단 약간 무겁고

 

기와보다는 벌레가 발생해도, 초가만큼 벌레 천국은 아닌...

 

 

 

책창고와 저런 말도 안되는 평면도에 가장 이상적인

 

기와는 나무기와 지붕이라고 판단하여 적용해봤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55권 - 평양쪽 문화기록인데

 

널이엉이므로 빗소리가 높다.는 기록이 존재하여...

 

 

 

고려시대 이전의 이른 시기 때부터 나무기와인

 

너와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여 적용해봤습니다.

 

 

 

그리고 1층이 정면 1칸이고

 

초가지붕이나 나무기와로 추정되는

 

아무튼 기와지붕이 아닌 표현으로 그린...

 

 

 

그런 그림이 실존하는데요.

 

그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요동성총에

 

그려진 요동성도 3층 누각 그림 입니다.

 

 

 

요동성에 있던 고구려 3층 누각으로 추정되는데요,

 

정릉사 7호 건물처럼 1칸이고, 다층 누각그림 입니다.

 

이번 너와 책창고 건물은 이 그림도 참조를 했습니다.

 

 

 

이 그림을 참조했기 때문에

 

1층 지붕을 나무기와로 적용했고

 

2층은 기와지붕으로 적용해봤습니다.

 

 



 

 

 

-  전층 기와지붕  + 두꺼운 창방 + 화반및 동자주 보조 형태

 

 

 

 

이번 건축 양식은 1층 차양칸 까지

 

기와 지붕을 설치했을 경우 입니다!

 

 

윗쪽 1층 너와지붕식 + 두꺼운 주심도리

 

이 방식하고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점은...

 

 

 

주심도리는 평이한 크기 이지만

 

대신 창방이 거의 가로로 눕혀놓은

 

기둥 수준의 크기와 두께 수준으로 적용했고,

 

 

 

나머지 기와 지붕과 서까래 무게 분산은

 

인자화반과 동자주가 분산해주는 방식 입니다.

 

 

안악 1호분 전각도

 

 

위에서 2층 누각 설명할때 한번

 

말했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안악 1호분에 그려진 2층 누각은

 

축소 / 축약 / 약식 그림으로 추정되지만

 

 

정 / 측면 1칸인 점은 의외로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같기 때문에 .....

 

 

 

안악 1호분 누각은 정릉사 7호 건물하고

 

관련있는 건물이거나 , 혹은 7호 건물하고

 

거의 같은 양식의 건축물 일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건축물의 경우에는

 

안악 1호분 누각도에 그려진

 

특징들을 전부 집어넣었습니다.

 

 

 

인자 화반과 동자주가 교차하며

 

나오는 양식은 용강대총 에서도

 

보이므로 이게 나름 건축 양식적으론...

 

 

 

그래도 쬐끔이나마 검증을 거쳐서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징으로는 창방이 사실상

 

가로로 눕혀놓은 기둥 역할을 하고

 

 

윗쪽의 기와지붕과 서까래 무게를

 

인자화반 / 동자주가 분산시켜 줍니다.

 

 

 

그러다보니 창방쪽에 아주 골고루

 

무게가 분산되서 창방이 얆거나

 

조금만 작으면 바로 부러지는...

 

 

 

어찌보면 건축역학적으로 발전이

 

어느정도 되어 있어야지만 실행이

 

가능한 위험한 건축 방식 입니다.

 

 

 

그런데 이런 매우 위험해서 건축학적

 

지식이 쌓였을때 실행해도 위험해 보이는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건물에서 확인 됩니다!

 

 

 

북한 보현사 상원암 건축물 1794년 중건 추정

 

 

 

이 건물은 북한 보현사 부속 암자

 

상원암 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냥

 

이해가 되시죠!?

 

 

 

상원암은 본전의 크기가

 

정면 11.06m 측면 5.7m 입니다.

 

 

11m에 육박하는데 정면 툇칸이 겨우

 

기둥 1개씩으로만 구성한 정면1칸 퇴칸 입니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기술이 가장 올라간

 

시점인 조선 후기 건물에서 이런 위험해

 

보이는 건축양식을 실제로 사용한거죠.

 

 

 

 

제가 만든 건물은 이 건축물을

 

참조해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면 퇴칸은 눈대중으로 한 8m 정도로 매우 넓고

 

안쪽 툇보 ( 퇴량 - 차양칸 같은곳에 사용하는 작은 보 )

 

 

 

이걸 전부 다 창방에 올려놓았습니다.

 

게다가 겹처마 / 일반적인 주심도리 크기 입니다.

 

 

보현사 상원암은 본전만 정면 11.06m 라고하는데 옆칸까지인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이렇게 만들어도 창방이 일반 건물에 거의

 

3배 정도 크기, 그니까 거의 근정전 대들보

 

수준의 크기로 만들어서 사용하니까.....

 

 

 

창방이 지붕의 모든 무게를 버틸수 있다

 

라는걸 실제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 입니다! 1794년 건물이라고 합니다.

 

 

보현사 축성전 1875년 / 툇칸이 정면 1칸으로 된 건물이며 눈대중으로 봐도 10m 정도에 근접한다.



 

이 건물은 1875년 건물로 추정중인 보현사

 

축성전 이라는 건축물 입니다. 역시나 정면

 

1칸의 툇칸을 가진 건물 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건 ,건축적 역량이 발달해야

 

가능할꺼 같은 이런 건물을 ... 이미 삼국시대 ...

 

 

 

고구려 정릉사 7호 건물이 먼저 사용하고

 

있었을수도 있다는 점, 그래서 의외로 훨씬 오래전에

 

높은 건축적 역량을 가지고 있던게 고구려 였다는 점 이겠습니다!

 

 





 

- 꺾음 팔작지붕 1층 + 문얼굴 받침목 형태 -

 

 

 

위에서 설명했지만 정릉사 7호 건물은

 

사실 1층 건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부 차양칸과 내부에 있는 방하고

 

간격이 넓어서 차양칸이 건물 크기에

 

비해 많이 넓은축에 속하고...

 

 

 

차양칸이 저렇게 넓은데 내부에 방은

 

건물 크기에 비해 좁아서, 1층 건물로

 

보기에는 너무 비효율 적 입니다.

 

 

 

기둥이 저런 모습이면 구들이 있어야 좀 효율적

 

일탠데 딱히 구들이 발견 된거도 아니라...

 

 

 

왠만하면 2층 건물 이었을 겁니다만

 

그래도 뭐........ 혹시 또 모르잖아요...?

 

 

 

실제로는 뭐 1층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1층안을 아예 배제를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이번엔 1층안을 보겠습니다.

 

 

 

 

만일 1층 건물이었을 경우에는

 

꺾음 지붕 건축물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면 / 측면이 1칸 건물입니다.

 

모서리 4개의 기둥이 하중을 엄청나게

 

받는 그런 건축물 입니다.

 

 

 

근데 보면 내부에 2칸짜리 방이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생각해본게...

 

 

 

내부기둥 ( 내진고주 )를 이용하여

 

꺾음 지붕을 구성하여 지붕을 2단으로

 

나누어 하중을 분산하는 방식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꺾음지붕의 장점이라면 역시 하중분산이

 

가장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부의 내진고주 기둥들 6개로 꺾음지붕의

 

맞배지붕 부분만 따로 지탱해주기 때문에,

 

 

 

1층이 비록 1칸일지라도 모서리 4개 기둥과

 

두꺼운 추녀로 버틸 수 있게 되는것이겠죠...?

 

 

 

외부 기둥 / 내부 기둥이 각기 다른 지붕을

 

받치는 형태가 되므로 일반 팔작지붕하고

 

비교하면, 꺾음쪽이 하중 분산에 훨씬 유리합니다.

 

 

 

 

또한 벽체를 구성하여

 

벽체가 그래도 쥐똥만큼 이나마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주기 때문에...

 

 

 

아마 벽체까지 구성한 건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벽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정릉사 7호 건물은 차양칸이

 

모서리 기둥 4개만 사용하기 때문에...

 

 

 

내부 6개 기둥하고 외부기둥에 설치하는

 

툇보 ( 퇴량 ) 이걸 걸었을때, 툇보를 받쳐주는

 

기둥자리가 발견이 아예 안된거에서 착안했습니다.

 

북한에서 그린 정릉사 7호 건물 상세도면

 

 

 

툇보를 주심도리에 걸면 되도록

 

기둥자리에 그걸 거는게 일반적인데...

 

정릉사 7호건물 도면을 보면 그런게 전혀 없죠.

 

 

 

그래서 생각해본게 이겁니다!

 

 

 

문지방 위에 , 사실상 문얼굴로 사용하는

 

얆은 샛기둥을 올린 방식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중간의 판문을 구성할때, 문얼굴을 따로 설치하지 않고

 

그냥 얆은 기둥으로 퉁쳐서 기둥겸 문얼굴겸 사용하되...

 

 

 

기둥겸 문얼굴인 샛기둥을 문지방에 올리거나

 

혹은 천두식 마냥 홈을 파내서 끼워 맞추게 되면,

 

 

 

내부 기둥 때문에 발생하는 퇴량을 받쳐주는

 

기둥 역할을 문얼굴이 대신 할 수 있게 되며...

 

 

 

문지방이 기둥을 받쳐주므로, 

 

4개의 우주 사이에 평주 기둥자리가

 

발견 안되는게 당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렇게 길다란 문지방을 사용할 경우

 

줄기초라도 구성하는게 맞는거 같지만 뭐...

 

줄기초가 발견된 거도 아니니까...

 

 

 

솔직히 1층 건물은 아닐꺼 같지만 굳이

 

1층 건물이라면 이런식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만들어 봤습니다...!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출토된 실제 고구려 사다리랑 기둥홈을 뚫은

 

 

나무에 기둥홈을 뚫어서 기둥을

 

설치하는 건축 양식은 여튼

 

완벽한 건물은 아니지만...

 

 

 

지하 목곽고 그니까...

 

 

 

고구려 산성 물류 적재하는 땅굴 창고에서

 

그 방식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나름 고증에

 

맞기는.....쬐끔은 맞기는 합니다.....허허

 

 

 

참고로 대전 월평동 산성이며 남한내에서

 

고구려 창고가 이만큼 온전하게 발견된건

 

대전 월평동밖에 없습니다...!

 

 

김제 금산사 천왕문. 하앙말고도 문얼굴을 기둥처럼 사용했고, 그 기둥위에 받침목을 사용한 마치 삼국시대 방식같은거도 발견된다.

 

 

 

참고로 얇은 기둥을 기둥겸 문얼굴로

 

동시에 이용하여 지붕을 받쳐주는

 

정면 1칸 건물.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 건물이 바로 금산사 천왕문 입니다.

 

 

 

금산사 천왕문은 하앙 건축물로 유명한데요,

 

보면 정면은 1칸인데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지방 위에 기둥겸 문얼굴 위에 화반 혹은 첨차같은

 

받침목을 설치해서 하중을 받쳐주는 건물 입니다.

 

 



정릉사 7호 건축물의 문얼굴에 받침목을 설치한

 

이유는 이런 여러가지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엄청나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4년 12월 31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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