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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1. 성랑에 대하여

2. 성랑의 외형 유추해보기

3. 흑유와 건축물

4. 개성 나성의 성랑규모
5. 성랑 실제 적용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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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랑에 대하여

 

 

 

고려시대에는 성벽에 설치하는

 

성랑이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성 성벽 윗쪽에 설치하거나, 혹은

 

성벽 뒷쪽에 설치하는 건물로 알려져 있어요.

 

 

 

지금은 그 아무도, 어디에서도 재현및

 

복원을 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고,

 

 

 

우리의 전통 문화인데도

 

굉장히 낮선 그런 성곽시설 입니다.

 

 

 

 

고려시대 성랑의 모습은 대략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네요.

 

 


성랑은 기본적으로 성벽에

 

설치한 방어건물 / 혹은 회랑같은

 

방어 건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산성 성벽을 강화하는 건물로써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이 성랑의 기록은 귀주 산성의

 

 

 

고려시대 귀주전투

 

(귀주대첩 아님!)

 

 

 

그리고 고려의 수도 개성의 산성인

 

개경 나성 또한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높이의 건물이 산 위에

 

2km 길이로 이어져 있는게 성랑!

 

 

2km로 이어진 이런 모습...

 

굉장히 멋질거 같지 않나요?

 

 

 

 

비록 건축물 자체는 방어용이라

 

창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세히 모르고...

 

 

 

건물 자체도 단순하게 생겼기야 했겠지만

 

방어 때문에 여튼 기와도 설치 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성랑은 어느정도의 스펙인지

 

어느정도 축약해서 알아 볼게요.

 

 

 

먼저 고려시대때 남아있는 기록이 있어요.

 

 

- 귀주산성 성벽 윗쪽에 건물을 올렸다-

- 그 건물들은 250여채 정도 있었다 -

 

 

그리고 또 다른 고려산성 기록입니다.

 

- 몽라골령(현 함경북도 길주) 산성에 -

- 성랑 950여칸을 설치했다 -

 

 

 

 

 

더 엄청난 기록도 존재합니다.

 

고려의 성랑은 생각 이상으로

 

어마무시한 규모를 보여줍니다.

 

 


- 고려사 기록 : 개성 나성에는 나각이 13000칸 있다 -

 

 

 

성랑으로 추정되는 나각이란게

 

무려 13000칸이 있다는 기록인데요,

 

 

 

이걸 대략 계산해보면 2000여채의 건물이

 

산성에 쭈욱 설치되어 있었다는거죠.

 

 

 

고려시대때는 이렇게 성랑에 대한

 

기록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습니다.

 

 

출저: printest.com

 

 

 

그리고 의외로 가까운곳!

 

 

 

서울 북한산 북한산성에서

 

발굴된 성랑터도 있습니다.

 

북한산 성랑터는 기와가 발견됬어요.

 

 

 

 

그래서 성랑은 기와를 올린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한양도성 사진에 남아있는

 

성랑으로 예상되는 건물 사진군,

 

 

 

기타 조선 실록 등등 의외로 기록이

 

굉장히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랑 건축물의 높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대 6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실 고려시대 성랑의

 

높이는 자세히는 모릅니다...

 

 

 

 

성랑 기록이 있는

 

유적군이 대부분 북한이라, 연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연구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으로 어느정도

 

성랑 건물의 높이 유추가 가능하다고 하네요.

 

 

남산의 서울도성 성벽. 이 근처에 실제로 성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600년대쯤 기록에 성벽위에

 

대략 2길 ( 대략 6m )로 성랑을

 

만들수 있겠니!?

 

 

 

뭐 이런 의견을 냈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성랑 보고

 

어찌 2길로 만들수 있겠냐 라고

 

말한걸로 보아 6m 이상일수도,

 

 

 

혹은 5m내외일수도 있을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도 그쯤되지

 

않을까? 라는 예상을 한다네요.

 

그래서 이 게시물의 성랑은 6m로 만들었습니다.

 

 

 

 

현재로써는 성랑 높이는 6m 정도!

 

라는 기록밖에는 없는 실정이고,

 

 

 

그 마저도 조선시대 기록으로

 

유추를 해야만하는 상황입니다.

 

 

 

고려 수도 개경을 지키는

 

개경성 나성 성벽 최대 구간이

 

8.1m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성랑은 스샷이랑 비슷한

 

느낌의 높이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 성랑의 외형 유추해보기

 

 

 

 

고려시대 산성 성랑의

 

외형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림자료 하나 없고, 그리고

 

실물자료도 사실상 없어서 입니다.

 

그러나 외형을 유추 정도는 가능합니다.

 

 

 

이유는 외형 유추 정도는 가능한 기록도 있고,

 

남한에서 실제 고려 성랑터가 발굴됬으며!

 

 

 

조선시대 후기 성랑의 모습으로

 

어느정도 유추는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성랑은 회랑타입 / 개별 건물타입 이렇게 2가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랑의 외형은 2가지 정도로

 

예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 회랑 타입의 성랑 -

 

- 개별건물 타입의 성랑 -

 

 

 

필요에 따라서, 성벽의 모습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거라 합니다.

 

 

 

일단 처음에는 회랑 타입

 

성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회랑같은 모습의 낭무타입 성랑

 

 

 

////////////////////////////// 회랑타입 성랑 알아보기 ///////////////////////////

 

 

보통 성랑이라하고 하면 뜨문뜨문

 

개별 가건물형 성랑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짜 의외인데요,

 

 

 

의외로 성벽위에 회랑같은 모습으로

 

설치된 모습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 기록 때문이고,

 

조선시대 기록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단 고려시대 기록을 보겠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성랑무] 라는 기록이 있어서, 회랑형 성랑의 존재를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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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권53 > 지 권제7 > 오행1(五行 一) 

 

성랑무(城廊廡)가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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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53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내용은 성벽의 낭무가 소실되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성랑이 소실됬다.

 

라고 되어있는데 한문으로는 사실

 

낭무라고 적혀있습니다.

 

 

 

城廊廡 = 성 낭무

 

 

 

바로 이 한문 때문에 성랑의 모습을

 

회랑의 형태로 예측할 수 있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고려시대때 [ 낭무 ] 이 단어는

 

지금의 회랑이나 행랑채를 말한다네요.

 

그럼 고려시대 회랑에 대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고려시대 성랑은, 성벽에 회랑처럼 일자로 쭈욱 설치된 모습도 존재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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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권22 > 세가 권제22 1225년 10월 20일(음) 정미(丁未)

 


궁성의 저상전(儲祥殿) / 봉원전(奉元殿) / 목친전(睦親殿) /함원전(舍元殿)

/ 그리고 궁궐의 낭무(廊廡) 137칸이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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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전각과 함께 낭무가

 

소실되었다는 기록 입니다.

 

 

 

눈여겨 볼점은 바로 이 것 입니다.

 

궁궐 전각과 함께 낭무가 137칸이

 

소실 되었다고 기록에 적혀있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 낭무 ]

 

 

 

이 단어가 회랑이나 행랑채같은 길쭉하게

 

만들어진 건물로써 예측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낭무] 는 이런식의

 

회랑 or 행랑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고려시대 낭무는 이런 회랑이나 행랑채였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궁궐에서 전각이 소실되면서

 

같이 137칸이 소실 되었는데요,

 

 

 

137칸이 소실 될 만큼의

 

방대한 규모를 보여주는건

 

행랑채 or 회랑 둘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었죠?

 

궁궐에서 전각이랑 같이 소실될만한건...

 

 

 

 

진짜 무조건!

 

 

 

전각을 둘러쌓듯이 만든

 

회랑이나 행랑체 둘중에 하나라서

 

이러한 예상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궁궐의 전각 주변에 설치되는건

 

행랑이나 회랑뿐이라서... 당연히...

 

 

 

고려사 기록의 [ 낭무 ] 는 당연히

 

행랑이나 회랑으로 예측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중요한것은 이겁니다!

 

한문을 주목해 주세요!

 

 

 

 

고려사 기록의 성랑 기록 = 성랑무( 城廊廡 )

 

고려사 기록의 궁궐 회랑 or 행랑채 기록 = 낭무( 廊廡 )

 

 

성벽에 사용된 한문도 낭무 (廊廡)

 

궁궐 회랑에 사용된 한문도 낭무 (廊廡)

 

 

낭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일자정렬

 

쭈욱 늘어선 건물을 가르키고 있어요.

 

 

광화문은 높이가 18.93m 정도다.

 

 

 

이런 한문의 사용 때문에

 

고려시대 성랑은 의외로...

 

 

회랑마냥 일자정렬 쭈욱 늘어선

 

모습으로 예상이 가능합니다.

 

 

왜냐면 한문을 그렇게 사용했으니까요.

 

성벽의 회랑 = 성랑무( 城廊廡 )

 

 

성랑의 최대구간 높이는 광화문에 필적한다. 이런높이의 성랑이 산성에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 고려도경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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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

 

 

바깥쪽은 해자가 없고

 

여장도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낭무(廊廡)처럼 나란히 건물들을 두었고

 

그 모습은 높게 쌓은 적루[敵樓]하고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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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에서 말하기를 마치 낭무처럼,

 

그러니까 성랑의 모습은 마치 행랑같이

 

나란히 건물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풀이해보자면

 

서긍은 이렇게 말한거 같아요.


[ 개성 나성 성벽위에 방어누각 닮은 건물을 ]

 

[ 회랑 마냥 일렬로 쭈욱 설치했다 ]

 

라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서긍이 적어놨습니다.

 

성벽위에 건물을 회랑처럼 올려놨다고요.

 

 

 

 

물론 4~5km가 넘는 성벽 모든구간을

 

회랑처럼 올리지는 못했을 것 입니다.

 

 

 

산성 모든 구간을 스샷마냥

 

전부 저렇게 설치하는것은 사실 좀 힘들죠.

 



5km 구간을 전부다 회랑처럼 설치하면

 

관리비가 어마어마하게 들긴 할거에요.

 

 

 

 

그러나 적어도 서긍이 본 구역이라거나

 

강력한 방어가 필요한 옹성 근처만큼은...

 


아마도 회랑이나 시전행랑처럼 건물들을

 

따닥따닥 붙여서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겠죠?

 

 

 

옹성쪽은 강력한 방어가 필요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건물을 촘촘한 설치를 해야지 방어에

 

유리하겠죠?

 

 

 

화공 방어에 유리한 기와지붕은 덤이구요.

 

그래서 서긍이 본 성랑은 아마 옹성쪽

 

성랑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옹성 부근 정도만을 한정하자면

 

저 정도로 촘촘하게 성랑들을

 

설치하는건 별 문제 없을거에요.

 

 

 

고려시대 기록에 나성 안쪽 길가에

 

행랑채 몇백개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왕도의 성문쪽에 성랑 몇백개쯤 못올리겠습니까!?

 

 

 

 

 

또한 실제 고려시대 성벽인

 

강화중성지의 성랑 추정지의 기둥홈도

 

회랑마냥 일렬로 이어져있는 모습이에요.

 

 

 

( 길다란 세로로 그린 선이 기둥홈 )

 

 

 

기둥열이 일정간격으로

 

설치된 모습을 확인 가능한데요,

 

 

 

이런 기둥 배치는 회랑같이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설치되는

 

건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 고려시대 성벽의 기둥홈. 이런식으로 성랑의 기초를 설치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옹성쪽이나 강력한

 

방어가 필요한 위치 정도라면,

 

 

회랑같은 모습으로 촘촘하게

 

설치했을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기장읍성 / 김해읍성의 고려시대 성벽층 입니다.


기장 / 김해읍성의 고려시대 성벽층 쪽에서

성랑으로 추정되는 기둥홈들과 함께...



성랑에 사용된걸로 추정되는

기와더미들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저는

성랑에 기와를 적용한 것 입니다!

 

 

당나라 벽화에서, 성랑의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이 벽화는 당나라의 둔황석굴의 그림인데요,

당나라의 전돌 성벽위에 행랑같은게 보이죠?



전돌 성벽 윗쪽에 마치 회랑같은 건축물을

올렸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성랑의 시초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려도경에서 성랑을 보고 회랑같이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적루같다!

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그 적루가 둔황석굴 당나라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저런 모습의 형태가 아니었나 싶네요.



이렇듯 중국쪽 당나라 벽화로 인하여 성랑은

이미 통일신라 시절부터 있었을걸로 짐작됩니다.

 

 

 

 

 

또한 중국쪽에서 낭무라고 하면

 

이런식의 회랑들을 지칭합니다.

 

 

 

전통 회랑부터 최신식 복도까지

 

이런 복도같이 생긴 회랑들을

 

전부 낭무라고 합니다.

 

 

廊廡 (낭무 ) 이 단어로 검색해 보시면

 

온갖 회랑 복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의 제작자 서긍이

 

성랑을 보고 낭무라고 했다는점만 봐도,

 

성랑은 회랑하고 비슷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또한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회랑 형태의

 

성랑을 나름대로 유추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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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인조 6년 무진 ( 1628년 ) 8월 16일 *

 


정충신의 말을 듣건대, 

 

성랑이 섬돌위의 행랑과 같아서

 

 

 

적이 쳐들어와 공격할 경우,

 

방어하기가 어려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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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 인조10년 임신(1632년) 4월 5일 맑음 *

 


인조가 성랑이 초막 같은거냐?

 

하고 물어보니까 관리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말하기를...

 

 


성랑이 높고 크지 않은 것이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성랑은 긴 행랑이라, 사람이 들어가서

 

서 있기도 힘들며 사용하기도 힘들다. 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기록에서 조차도

 

성랑이 행랑채 같다고 말합니다.

 

 

 

그 기록을 어느정도 보여주는게

 

구한말 북한의 평안북도 창성읍

 

산성에 설치된 성랑 추정 건물입니다.

 

 

성랑 추정 건물을 확대해본 사진. 벽체가 없는 모습이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벽

 

바로 옆쪽에 성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성벽쪽에 설치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 강화부에서 조차 벽체가 없는듯한

 

맞배지붕 형식의 성랑 추정 건물이 발견되었어요.

 

 

 

1칸이 아닌 3칸 정도의 모습이고, 기와지붕을

 

올린 모습이며, 벽체가 없는 모습 입니다.

 

 

고적도보에서 발견된 인천강화부의 성랑모습. 벽체가 없는 회랑형태의 성랑이다.

 

 

 

그래서!

 

 

성랑 문화가 퇴락한 조선시대 조차도

 

정말 최소한의 회랑 형태는 맞습니다.

 

못해도 3칸 정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랑이 1칸일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방어가 널널한 장소일 경우에 한해서

 

1칸일 가능성이 크고,

 

 

 

실제 성랑의 외형은 거의 대부분의 자료들이

 

최소 3칸 정도의 건물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 조선시대 성벽에 설치하는

 

성랑은 회랑 타입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라는 유추가 가능한 상황입니다.

 

 

 

 

 

 

 

////////////////////////////// 개별건물형 성랑 알아보기 ///////////////////////////

 

 

 

그렇지만 성랑은 산성의 성벽 방어시설.

 

무작정 모든 구간이 회랑같은순 없겠죠?

 

 

 

그래서 성랑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개별 건물형 모습도 존재했을겁니다.

 

 

 

이런 개별적인 형태의 성랑이 존재했다는

 

고려시대 기록은 특별히 없기는 합니다만,

 

 

 

의외로 이런류의 개별 건물형 성랑은

 

실제로 터가 발굴이 되었습니다.

 

 

 

그 고려시대 성랑터는 충북의

 

추선산성 이라고 한답니다.

 

 

 

 

충북 증평 추성산성에서

 

온돌건물지 3개 동이

 

발굴 되었는데요,

 

 

이 건물터를 성랑으로 본다고 합니다.

 

 

 

추성산성은 토성인데 고려시대때

 

한번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발굴하면서 고려시대 성문터는 물론

 

각종 고려시대 물건들이 발굴되어서

 

고려시대때 개축 했다고 밝혀냈습니다.

 

 

 

 

특히 온돌 건물지는 이렇게 토성벽하고

 

가까운 위치에서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랑으로 예측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굴된 모습은 회랑형 모습이 아닌

 

개별 건물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개별형태 건물의 성랑모습은

 

조선시대 자료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북한산 서암사터 회화. 성랑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그려져있다.

 

 

 

북한산 서암사가 그려진 조선후기 회화.

 

회화의 왼쪽을 보시면 성벽뒤에 성랑을

 

그린게 보입니다.

 

 

 

심지어 우측 하단의 남문쪽의 성벽도

 

성랑이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습니다.

 

 

 

 

근데 어째서 이런 건물들을

 

그림만 보고서 성랑일 것이다!!!

 

라고 생각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선왕조 실록에 실제로

 

북한산성 성랑 기록이 계속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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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숙종 38년 5월 12일 *


북한산성의 큰 공사는 거의 다 끝났고

 

아직 못 마친건 중성 / 성랑 공사인데,

 


예네들은 시급하게 끝내야할

 

공역까지는 아닙니다. 라는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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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정조 9년 1785년 6월 17일 기록 *

 


성랑, 체성, 여성, 문루의 수리해야할 부분을


별단에 기록하였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함북부령 읍성 북벽. 성랑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고서화처럼 성벽 근처에 건물을 올렸다.

 

 

조선시대때 이런 기록들이 있어서

 

북한산성에 성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게다가 실제로 북한산성 성랑터가

 

발견 되면서, 조선시대 기록들이

 

사실인게 확인 되었습니다.

 

 

출저: printest.com

 

 

이런식으로 실제로 북한산성에서

 

성랑터가 발굴이 되었습니다.

 

 

 

성랑 정면은 창문없이 그냥

 

벽만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또한 기와까지 다량 발굴 되면서

 

조선시대 성랑은 무조건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밝혀졌습니다.

 

 

 

 

북한산성에서 발굴된 성랑

 

북한산성 회화에 그려진 성랑

 

여기서 발굴된 건물크기와 기와들

 

 

 

이런걸 조합해보면...

 

 

 

고려시대 성랑도 창문이 없고

 

기와가 올려진 건물이었음을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건물형 성랑같은 경우는

 

의외로 아주 가까운곳에 있었습니다.

 

[ 바로 숭례문과 한양도성 입니다 ]

 

 

서울 한양도성하고 숭례문에

 

성랑이 있었다는 기록은 진짜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기록을

 

딱 3개만 확인하면 이렇습니다.

 

 

성랑인지 아닌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랑추정 건물들이 실제 존재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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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실록 - 영조 23년 1747년 2월 5일 *

 


어영 대장 구성임이 끊임없이

한양도성을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결국 받아드려졌다.

 

결국 한강쪽의 모든 창고를 싹다

성안으로 옮기고, 성벽을 돌아가며

성랑을 쌓았다. 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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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도감 1745년 기록 *


돈의문에서 숙정문까지는 4850보이며

 

성랑 24개소가 있다. 라는 기록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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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기록 1894년 10월 13일 기록 *


숭례문 동쪽 제1성랑 / 제2성랑

근처의 개축된 성가퀴하고 성벽을

다시 수리했다 라는 기록이 존재함.

 

 

수원의 근대사진. 성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성랑하고 비슷한 기능을 했을것이다.

 

 

 

이런식으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성랑은 실제로 존재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훌륭한 문화죠.

 

 

 

참고로 개성 나성에는 성랑이

 

4910칸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에 개성 성벽은 8미터쯤 되고

 

성랑이 13000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개별성랑을 정면3칸 / 측면1칸

 

건물로 단순하게 계산해서 보면!

 

 

 

개성 나성 성벽에는 성랑 건물만 거의

 

2000여채가 있었던 걸로도 예측 됩니다.

 

 

 

 

정말 엄청난 규모 아닌가요?

 

조선시대 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물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규모로 따진다면은...

 

 

 

평균 3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길이 4~5m 정도의 건물들이

 

가깝게 붙어 2km 내외로 설치된 형태겠죠...?

 

 

개성의 나성에서는 이런 성랑이 900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랑은 조선시대 모습은 앞면은

 

가려져 있고 뒷면은 열려있다고 하고,

 

 

 

나름대로 사진이 남아서 외형유추가

 

가능합니다만, 고려시대 같은 경우는

 

 

 

규모가 엄청난건 알겠는데, 성랑의

 

모습은 아예 모르는 상황 입니다.

 

 

 

고려 귀주전투 (몽골과의 방어전 성공한 전투)

 

쯔음엔 대포를 사용한 시기라서

 

창문이 있을수도, 없을수도...!?

 

 

 

 

그래서 고려의 성랑 모습은 자세하게

 

모르니까, 이번 게시물에서는...

 

 

 

창문 있는 버전

 

창문 없는 버전

 

길쭉한 회랑 버전 ( 낭무버전 )

 

한칸 한칸 개별설치 버전 ( 개별건물 버전 )

 

 

 

있는대로 전부 다 만들어 봤습니다.

 

뭐라도 좋으니까 고려시대 성랑의

 

자세한 모습을 알았으면 좋겠네요...ㅜㅠ

 

 

저기 네모난게 성가퀴 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조선 성벽의

 

성가퀴는, 성랑을 묘사한 거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가퀴 윗쪽 경사진 부분이 마치

 

지붕 처럼 생겼다는 점이 뭐랄까

 

왠지...

 

 

목조 건축이었던 성랑을 대신해서

 

돌로 훨씬 견고하게 쌓은 성가퀴가...

 

 

 

기능, 성능, 심지어 모습까지 성랑을

 

전부 대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벽쪽에 설치한 성랑. 어쩐지 성가퀴가 연상되는 모습이다.

 

 

 

 

비슷한 구도로 보면 목조 건축물인

 

성랑을 성벽에 설치한 모습하고,

 

 

 

조선시대 성가퀴 모습하고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보고는 합니다.

 

 

 

아무튼 목조 성랑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과, 흑유와 건축물을 설치한

 

건물을 언젠간 실제로 보고 싶네요.

 

 

 

 

성랑은 성 축성 방식에 따라

 

성벽 위에 올렸을 수도 있고...

 

성벽 뒤에 서있을 수도 있고...

 

 

 

성벽 방식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방어 강화 건축물이라 환경에 맞게

 

유동적인 모양이었을 수 있다는거죠.

 

 

 

 

저는 당나라 벽화및, 조선시대 성가퀴가

 

고려시대 성랑의 모습이 왠만큼

 

외형이 닮은점을 고려해서...

 

 

 

창문 버전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성랑의 자세한 모습이

 

최대한 빨리 밝혀졌으면 좋겠네요.

 

 

################################# 5줄 요약 ###############################

 

 

 

- 고려시대때는 성랑이라는게 있었다.

 

- 성벽 위에다가 설치하는 방어용 가건물 이었다.

 

- 보통 3칸 / 너비5m 내외 / 높이 6m 내외로 예상 가능.

 

- 산성에 설치될때 몇십개의 건물이 2km씩 설치되서 규모가  엄청나다.

 

- 지금 한국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3년 12월 31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

 

 

 

3. 고려시대 특수기와, 흑유와

 

 

 

흑유와 라는 기와를 아시나요?

 

이 기와는 어지간히 전통건축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아무도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기와 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소개해 봅니다.

 

 

지온인 미륵하생경도의 흑유와는 실제로 발굴 되었다.
출저: 국립중앙박물관

 

 

 

흑유와는... 말 그대로 기와에

 

흑칠을 한 다음에, 유약을 발라

 

만든 흑칠 유약기와를 말합니다.

 

 

 

고려시대때 잠깐 반짝 유행했다가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는지, 조선때는

 

거의 완벽하게 멸종하게 되는 기와 입니다.

 

 

 

이 흑유와의 사용법은 의외로 고려시대

 

불교회화에서 꾸준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1312년 작품, 일본 대은사 소장 관경서분도. 내림마루에 흑칠 잡상과 용두가 있다.

 

 

 

고려시대 불교회화


일본 대은사 소장 관경서분도

 

 

여기에서 흑유와가 어떻게

 

사용이 되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죠?

 

흑유와는 엄청 많이! 잔뜩!

 

사용하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용마루나 내림마루,

 

혹은 잡상에 소량으로만 사용합니다.

 

 

흑유와 추정 잡상 - 대은사 관경서분도의 흑칠 잡상은 실존한다.

 

 

 

 

참고로 윗쪽 불교 회화의 흑색 기와를

 

흑유와로 예상하는 이유는 간단 합니다.

 

 

 

실제로 고려시대 흑유와 잡상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교회화

 

기와색상이 매우 검정색이라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아주 미묘한 푸른 색상이 첨가되있습니다. 그래서 회청색으로 분류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불교회화에서

 

일반 기와를 채색할때는 생각의외로!

 

완전 검정색으로 채색 안합니다.

 

 

 

불교회화에서 완전한 검정색으로 칠한 기와는

 

흑유와로 보는것이 굉장히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전통기와 색상은

 

윗쪽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검정색 보다는 오히려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빛이 입니다.

 

 

 

불교회화에서는 흑유와 / 일반 기와를 철저하게 분리해서 채색한다.

 

 

 

일반적으론 기와색을

 

검정색! 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 회청색 ]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회화에서는

 

일반기와를 회색이나 푸른색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지온인소장,

 

1294년 작품인 미륵하생경도 또한!

 

흑유와가 발견 됩니다. 그리고...

 

 

 

미륵하생경도 또한 흑유와는 용마루에

 

아주 약간만 사용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렇듯 흑유와는,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은 특정부위에 한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흑유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회화는 생각보다

 

무조건적 상상력으로만 건축 그림을

 

그린게 아닙니다. 그 시절 실제 건축양식을...

 

 

 

생각보다 굉장히 많이 적용시켜 그린게

 

고려시대 불교회화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짧은 지식: 잡상이란?

지붕 마루에 장식하는 좋은 기운과 뜻을 가진 모형들.
비교적 여러 모양이고 많게는 10개 넘게 설치해서 그냥 전부
퉁쳐서 "잡상"이라 부른답니다! (모형마다 실제 이름이 있어요!)

 

 

 

 

불교회화에 나오는 흑유와가 이렇게

 

실제로 출토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무작정 상상화가 아니라는것을......

 

 


"생각보다는" 고려 불교회화가

 

실제 건물 고증이 괜찮습니다.

 

(딱히 사서에 언급도 없는 흑유와까지 표현)

 

 

 

 

 

그런데 불교회화에서는 너무

특정부위에 소량으로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궁금했습니다.



흑유와를 지붕 전체에다가 적용하면

과연 어떤느낌일까? 이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이번에 흑유와라는 알려지지않은

기와도 소개해볼겸, 직접 지붕 기와를 전부

모조리 흑유와로 설치해서 건물을 만들어 봤습니다.

 

 

흑유와는 좌우의 회청색 기와하고 다르게, 가장 완벽한 검정색을 보여주는 기와다.

 

 

 

어떤가요? 생각보다 되게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 좋지 않나요?

 

 

 

흑유와는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서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일반 기와하고

 

다르게 완벽한 검정색 입니다.

 

 

 

그래서 흑유와는 건물에 무게감을

 

느껴지게 해주며, 의외로 굉장히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랑에는 일반기와를 설치했고

 

문루에는 흑유와를 설치한 모습.

 

 

 

일반 기와하고 흑유와의 색감은

 

이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흑유와도 실제로 사용하면 일반

 

기와하고 느낌이 많이 다를꺼라...

 

 

 

굉장히 이쁠거 같은데 아무도

 

활용을 하지 않아서 아쉽네요.

 

그럼 이번엔 청자기와하고 비교해볼게요.

 

 

 

 

고려시대 청자 기와 2층

 

우진각 지붕 건축물 입니다.

 

 

 

옻주칠로 도색한 고려시대 2층 누각에

청자기와 / 고려사 기록에 존재하는...

 


금과 은으로 만든 지붕마루 용모양 장식인

치미 ( 혹은 취두 )를 적용하면 이런 모습입니다!

 

 

 

 

이번에는 흑유와를 적용한

 

고려시대 누각을 다시 보겠습니다.

 

 

같은 디자인의 건물이 색감과

 

기와 때문에 꽤나 다르게 보입니다.

 

 

 

신기하죠? 건물이 순식간에

 

화려함이 가라앉고, 깔끔하고

 

무게감 있는 건물로 변했습니다.

 

 

 

청자기와 / 일반기와하고 다르게

 

흑유와는 이런류의 다른 매력이 있는

 

멋진 아이템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나요?

 

 

 

 

흰벽에 옻주칠 기둥/ 청자기와/ 금동장식

 

전부 적용하니까 꽤나 멋지게 보이죠??

 

 

 

깔끔하면서도 잘 정돈된 느낌이 있으며

 

분명히 엄청 화려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차분한 느낌이 딱 검이불루 화이불치.

 

 

 

이 말하고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항상 보면서 생각을 한답니다.

 

 

 

그런데 저는 어째서

 

옻주칠 기둥을 적용했을까요?

 

 

그냥 주칠도 아니고?

 

옻주칠 기둥? 궁금하지 않으세요?

 

 

[ 고려 ] 주칠/옻칠 기둥이 있었다!? 고려시대 옻주칠 건축에 대하여 - with. 숭례문 단청 기둥색 고

안녕 얘들아? 너네들 고려시대 건축물에 주칠이나 붉은 옻주칠 적용해도 크게 문제 없다라는 사실 알고 있니? 그리고 실물로도 나름대로 검증되어서, 되게 긍정적인 상황이야. 이게 왜 이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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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주칠기둥이 아니라 옻을 바른

 

옻주칠 기둥에 알고 싶으시다면...

 

 

 

윗쪽 링크를 눌러서 옻주칠 기둥에 대한

 

고증및 검증에 대한 글을 읽어봐 주세요.

 

 

 

생각외로 옻주칠 기둥이 우리의 전통양식

 

이라는 것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실 겁니다!

 

 

 

 

 

이번에는 고려시대 불교회화에서

자주보이는 황금 기둥단청 적용및...

 

 

 

11세기부터는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는 노랑 벽체를

 

사용했습니다.

 

 

 

이 정도로 꾸미면 이제야

 

우리가 상상하는 고려건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만든 이 건물은 이렇게...

 

 

 

여지껏 출토된 것들,

 

2차 사료와 외국 자료의

 

교차검증으로 추측 적용 가능한 양식들,

 

 

 

그리고 발굴된 것을 그 양식의

 

틀에 한해서 약간 활용한 것들 등등~

 

 

 

대부분 실제 출토된 것들과

 

기록에 존재하는 양식을 매우

 

공격적으로 적용한 것 입니다.

 

 

 

 

단청은 이렇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에서 발견되었던

 

12세기 추정 실제 고려시대 단청을

 

거의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아랫쪽은 실제로 발굴된 단청들

 

모습입니다.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

 

 

 

이런식으로 실제 고려시대 단청을

 

사용했고 고증에 맞춰서 적용하려

 

노력해봤습니다.

 

 

아랫쪽이나 윗쪽 사진하고 비교하면

 

윗쪽 단청들을 사용한게 보일겁니다!

 

 

 

 

그런데 기둥단청은

 

금박을 입힌 주칠 기둥이죠?

 

 

 

어째서 이런 금칠을 바른 화려한

 

금박 주칠 기둥을 적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름대로 저 기둥은 실제로 있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적용해봤습니다.

 

 

 

[ 고려 ] 고려후기 다층 누각 양식에 대하여 /각종 고려 건축양식 고증및 적용해보기 with 송도 센

예들아 안녕? 여지껏 만든 고려시대 건물을 활용해서 고려시대 2층 누각을 만들어봤어. 보는 사람 돈 들어오라고 배산임수로 만들어봤어! 고려시대는 건물 조차도 돈이 들어오는 모습을 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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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금박을 그린 주칠기둥에 대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윗쪽의 링크를

 

누르셔서...

 

 

 

동그라미 금박 단청이 생각보다 고증에

 

맞다! 라는 사실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매우 긴 게시물 입니다! )

 

( 위에서 35%쯤 위치에 기둥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

 

 

신선원전 들보는 동그라미로 그린 단청이 존재한다 - 출저:문화재청 트위터

 

 

 

이번에는 조선시대 단청하고

 

고려시대 단청을 비교해볼게요.

 

 

확실히 조선시대 단청하고

 

느낌이 굉장히 다르다는걸

 

느끼실 겁니다.

 

 

 

 

지금의 한국 단청은 일명

 

"상록하단"

 

 

아래는 붉고 위는 초록

 

뭐 이런거죠?

 

 

그러나 저의 작품을 보시면

 

조금 다른것을 느끼실 겁니다.

 

 

 

고려시대 단청은

 

상록하단 같은데 상록하단은

 

아닌 뭐 그런 느낌이지 않나요?

 

 

 

 

상록하단은 분명 아닌데 초록색을

 

너무 많이 사용하다 보니까는...

 

 

상록하단은 아니지만

 

상록하단 처럼 보이는것이...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시대 단청 이랍니다.

 

 

 

고려시대 사서를 보면

 

이런 말이 가끔씩 나온답니다.

 

" 금벽이 붉고 푸른게 건물이 간지나는구나!!! "

 

 

( 금벽은 고려시대 최고 수준의 단청을 뜻한다고 합니다. )

 

 

 

 

 

 

 

이 문장은 조선시대 시각으로 보면

 

그냥 상록하단 표현한것 이지만...

 

 

 

고려시대의 시각으로 보면

 

실제로 금색 안료를 칠하고,

 

 

 

초록색과 붉은빛이 뒤섞여서

 

금빛으로 빛나는 단청을 보고

 

저런말을 한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부터는 조선시대 단청하고

 

고려시대 봉정사 12세기 단청을

 

사진으로 보면서! 비교해 봅시다.

 

 

성랑 게시물이고 흑유와를

 

소개하는 파트인데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고 있는데...

 

 

ㅋㅋ 그냥 이왕 이렇게 된거

 

재미나게 한번 비교해 봅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전통 건축의 모습입니다.

 

 

일반 기와에 창호문,

 

상록하단 단청 건축물.

 

 

윗쪽의 사진들과

 

천천히 비교해보세요.

 

 

단청 / 기와 등등 여러가지

 

비교를 하시면 재밌을 겁니다.

 

 

 

 

 

 

 

고려시대 단청은 비록 시간이

 

갈수록 초록색 범벅이 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붉은색도 많이 쓰고

 

조선시대 보다 더 자세하고

 

누구나 알기쉬운 무늬로 인하여,

 

 

 

누구든 쉽게 알아볼수 있는!

 

쉬운 단청 가독성이 장점인

 

건물을 보여주었을 겁니다.

 

 

 

 

조선시대 금단청 입니다.

 

사실 조선시대 사찰 금단청이

 

고려시대 단청보다 훨씬 화려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있죠.

 

 

 

[ 조선시대 금단청 ]

 

[ 무지하게 화려하긴 하지만 ]

 

[ 일반인은...당췌 뭘 그린건지 분간이 안간다 ]

 

 

조선시대 단청은 알아보기 힘든 기하학무늬, 디지털 이미지 같은 패턴을 굉장히 많이 사용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단청은 지금 봐도 현란한"


"기하학 무늬를 엄청나게 사용합니다"

 

 


게다가 기하학과 함께

 

사물을 특징만을 잡아

 

굉장히 단순하게 축약, 축소 표현하여...

 

 

 

도대체 뭔 그림인지 모를

 

뭔가 그래픽적인 그림이 많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조선시대


단청은 사이버 펑크풍의 느낌이

 

생각보다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 단청은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단청하고 굉장히 다릅니다.

 

 

 

 

사진을 보면 아실겁니다.

 

더 설명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고려시대는 무슨 그림인지 분간이

 

굉장히 쉽습니다. 그냥 풀과 꽃이에요.

 

 

 

누가 봐도 풀과 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에 훨씬 더 쉽게

 

와닫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출저: 방방콕콕 bbkk.com

 

 

 

이런 무늬의 차이점이

 

조선시대하고 고려시대 단청의

 

가장 큰 다른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는 풀꽃이기는 한데

 

뭔지 모를 그래픽적이고 이해가

 

쉽지 않은 무늬들이 주류.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매우 힘들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화려한 그런 단청이죠.

 

 

 

근데 분간이 잘 안가니까 보통은

가슴에 잘 와닫지가 않습니다. 뭐가

뭔지 잘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하지만 고려시대 봉정사 출토

 

10~12세기 단청 같은 경우는~!

 

 

 

남녀노소 누가 봐도 그냥

 

... 풀밭 꽃밭 입니다.

 

 

 

이게 고려시대 단청의 매력 같습니다.

 

알기쉽고 단순한 매력이랄까요?

 

 

 

 남녀노소 알기 쉬워서

남녀노소 모두 예쁘다고 느낄만한

요소가 많은게 고려단청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로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시대 단청도...

 

 

솔직히 맘만 먹는다면

 

상록하단화 시킬 수 있습니다.

 

 

 

상록하단화 시킨 고려시대 단청을

 

조선시대 상록하단 단청하고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세요!

 

 

 

 

사진을 보면서

 

비교하니까 비교하기 쉽죠?

 

 

 

둘 다 상록하단 단청이지만

 

고려시대 단청은 멀리서 봐도 꽃과풀

 

조선시대 단청은 멀리서 보면 뭔지 모르겠음;

 

 

 

이 두가지가 잘 구별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훨씬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사진을 봅시다.

 

 

 

파랑색 디지털 무늬 / 사각형 형광 레이저 빔 무늬 / 엄청난 기하학 창호문 /

오색 컬러 레이저포/ 형광 사이버 에너지 브라켓/ 온통 형광 초록색... 진정한 사이버 펑크. 조선단청.

 

 

 

조선시대 궁궐의 단청 입니다.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죠??

 

 

전문가는 되야 뭐가뭔지

 

구분되고 알 수 있습니다만,

 

 

대신 오방색을 강력하게

 

사용해서...그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멋지다는게

 

느껴질거라고 생각합니다...!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고려단청 또한, 상록하단처럼 보이게 만들수 있다.

 

 

 

윗쪽의 조선시대 궁궐 단청하고

 

아랫쪽 고려시대 건축 단청하고

 

보기만 해도 알 수 있겠죠?

 

 

 

고려시대 단청은 풀과 꽃 위주,

 

조선시대 단청은 풀과 꽃이 맞음.

 

근데 뭔가 간략화 되어서 알아보기 힘든 그런 단청...

 

 

 

둘다 각자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만 하여튼간에

 

이러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처럼 봉정사 극락전의 고려시대 단청은

 

의외로 조선시대 단청하고 비교해보면,

 

 

 

다른것처럼 보여도 사실 단청의

주제와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보셨듯이,

똑같은 상록하단이더라도...



이 정도로 시각적 구분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것이 바로!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단청입니다.

그러나 서로 각장 다른 매력이 있기에...

 



두가지 단청 모두 더 많이! 더 널리!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정. 상록하단 단청을 적용했다. 단청 고증에는 문제가 없다.

 

 

 

참고로 청자기와의 색감은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정의

 

기와색상을 기준으로 색감을 잡았어요.

 

 

 

사진이 아닌 실제 눈으로 봤을때의

 

색감을 기준으로 만들었답니다.

 

 

 

날이 맑을때 청자정을 한번 가보세요!

 

제가 만든 건물들의 기와색상하고 거의

 

같은 색상을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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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성 나성의 성랑규모

 

더 엄청난 기록도 존재합니다.

 

너무 엄청나서 믿기도 힘든 기록인데요;


- 지봉유설 : 개성 나성에는 ( 나각 - 성랑 추정 )이 1만3천칸 늘어서 있다 -

 

 

개성 성벽인 나성에는 이런류의

 

성벽 방어건물이 13000칸이 있었다

 

라는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어요.


경복궁 = 7225.5칸
자금성 = 8704 칸
개성나성 = 13000 칸


개성 성벽에는 전성기 경복궁과

 

자금성보다 훨씬 많은 건물들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죠!

 

 


1만3천칸을 건물로 환산하자면

 

대략 건물 2000여동 정도.

 

정말 엄청난 규모 아닙니까!?

 

 

개성 나성은 거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이런 성벽 방어 시설들을

 

2천동 쯤 만들었다는 뜻이죠!

 

 


물론 2천개가 아닐수도 있고,

 

건물 전부에다가 기와를

 

올리지는 못했겠죠.

 

 

 

또한 4~5km넘는 성벽 구간

 

전부를 회랑처럼 건물을 전부

 

따닥따닥 붙여서 올리진 못했겠죠...

 

 

그러나 여튼 성랑 건물이

 

거의 2천여개 있었다라는

 

기록은 확실하게 존재하며...

 

 

 

개성 나성은 성랑만으로도 정말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성의 옹성 부근은 방어가 엄청나게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모습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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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랑 실제 적용한 모습

 

 

서울 최고의 관광명소중 하나!

 

청계천과 1:1 사이즈로 합성을

 

해봤습니다!

 

 

 

많은분들이 청계천으로

 

비유하면 쉽게 알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봤습니다~!

 

 

 

청계천 산책 도보~

 

청계천 상층 도로까지의

 

높이는 대략 3.8m 정도 입니다.

 

 

 

성랑이 14.1m 내외로 예상 가능하니

 

성랑이 3.5배 정도 더 높답니다~!

 

청계천에 회랑버전 성랑 ( 낭무버전 )을 적용해 보았다.

 

 

 

그러므로 성랑은!!

 

청계천 산책도보~ 청계천 상층도로 가로수 끝까지

 

 

 

대략 이 정도의 높이라고

 

예상및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사이즈를 토대로

 

청계천에 성랑을 설치되면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만약 청계천에 이런식으로

 

일렬로 쫙 있을경우......그 얼마나...

 

위압감이 느껴지고 위용 넘칠까요!?

 

청계천에 개별건물 타입의 성랑을 적용해보았다.

 

 

성랑의 길이를 청계천으로 보자면~!

 

성랑은 대충 이 정도 거리였을 겁니다.

 

 

서울시청 근처 소라탑 청계천 시작점~

 

청계천 동대문 입구까지의 길이였을 겁니다!

 

 

만약 이런게 실제로 서울도성

 

혹은 개성에 아직도 있었다면,

 

 

아마 새로운 한국의 떠오르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요?

 

 

 

아마 고려도경에 나왔던, 개성의 성랑은

대충 이 정도 높이였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 기록에 성벽이

 

대략 8m 라고 적혀있고...

 



조선시대 기록에 성랑의 높이가 대략

 

6m쯤 이라고 적혀있으니까, 실제로

 

이 정도의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파트하고 비교해보면 대충

이 정도 높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략 아파트 8 ~ 9 층 높이 정도 입니다!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이런식으로

새로운 신도시에 공원형식으로.....



성랑이나 성벽 문화를 재현하여

사람들이 일상에서 우리나라의 잊혀진

문화를 즐길 수 있게 활용했으면 좋겠읍니다...

 

 

 

경기도 시흥시 월곶포구에 성랑 합성!

성랑이 이런식으로 있으면 진짜 멋있는

성벽 도시가 탄생하지 않을까요...!?

 

 

 

5천칸의 성랑을 쫙

 

이어붙이면 얼마나 길까요!?

 

 

 

합정역 메세나 폴리스 입구부터


홍대 입구쪽 연트럴 파크 시작점부터 끝까지.

 

 

 

이 정도 였을겁니다. 저기서 연트럴파크

 

끝까지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죠? 아무튼!

 

 

 

이런 엄청난것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게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제가 복원한 성랑및 건물들은

 

어느정도 오류가 있고... 나름

 

오버한것도 있습니다.

 


성벽 성문 둘다 완벽한

 

100% 고증도 아니고...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시대때 기록인 6m를

 

성랑 건물 높이로 사용했죠...!!

 

(고려시대 자료는 기록이건 연구건 뭐가 없어서...;;)

 

 

 

그러나.....

 

사람들이 성랑에 대한 관심을

 

쬐~~~~~끔이라도 가져주시고!!

 

 

대중의 약간의 관심이 씨앗이 되어

 

학계에서도 많은 연구가 되어서...

 

 

 

실제로 어땠는지 연구가 된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아무튼 재미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5줄 요약 ##############################

 

- 우리나라는 성랑이라는 성벽 위나

뒤에 설치하는 건물이 있었음.

 

 

- 개성 나성에 13000칸, 대략 2천개동

수준으로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 성랑은 조선시대 기록상 6m (대략적인 추정)

 

 

- 고려시대 개성 나성의 최대구간 성벽높이는 8.1m까지는 밝혀짐.

 

 

- 그래서 예상되는 성랑+성벽 높이는 14.1m 내외~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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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내용은 23년 12월 31까지

 

연구된 내용을 기재한 것 입니다.

 

 

 

만일 추가적인 연구로 인하여 발생하는

 

기존 가설의 변화  /  변화된 연구 결과로 인한

 

이론 변화가 발생할 경우,

 

 

 

이 내용은 언제든지 변화/ 수정 될 것 입니다.

 

연구결과 변화로 인한 내용 수정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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