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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고려 병력 20만 이상

요 10만 이상 평야에서

1:1 총력 전투 대회전 입니다.

 

 

###############################

 

* 전투에서 대회전 이란?

 

 

 

특정한 날 두개의 진영이

근접전및 각종 공격으로

이뤄지는 1:1 한타 전면전.

 

둘다 물러서지 않고 1:1로

근접, 기병, 화살 등등 각종

무기로 전투하는것!

 

#############################

 

이 전쟁으로

요나라는 고려에게

10만대군이 거의 전멸하여,

 

다시는 고려를 무시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못했으며,

 

살수 대첩, 행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리우는 전투 입니다.

기마민족으로만 이루어진 오랑캐

거란을 1:1 맞짱으로 대완승을 거둔,

 

"우리나라 최후의 1:1 한타전 전투"

승리라서 더욱 의미있는 전투라고

합니다.

 

고려시대 산성 성문과 산성성벽 강화 건축물 성랑

 

요나라는 왜 고려를

쳐들어 왔을까요?

 

요나라 (거란)은 애초부터 고려와

거리를 둘 수 박에 없었어요.

거란이 발해를 점령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고려한테...

 

계속 땅 내노으라고

처들어 왓거덩요.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로써

고구려 옛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북진 정책이 기본이라서,

거란하고는 당연히

이견이 있을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거란은 슬슬

별 지랄같은 이유로

처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처음 공격은 993년

고려가 방어에 성공,

 

요나라는 1차 이런 시부럴

을 외치며 계속 주구장장~!

 

"협상하자 ㅅㅂ 협상장으로 나오셈!ㅅㅂ"

지럴지럴 시전을 하게 됨미다.

 

거란은 배후를 안정

시키기고 싶어했어요.

 

배후 안정을 위해서

거란의 소손녕이 끈임없이

회담하자 회담하자 시부렁 거렸고,

 

전투 보다는 협상 ㄱㄱ 시그널을

알아챈 고려는 결국 협상을 했어요.

 

 

서희 장군님꼐서 담판을 지으셨고,

결국 담판에서 승리를 거두시며...!!

 

결국 우리 고구려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사실상 고구려의 후예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비하고 악랄한 오랑캐

거란은 협상을 했는데도 계속해서

침공을 하기 시작했어요.

 

1010년에 2차 침입을 했었어요.

 

그러나 우리 고려가

굉장히 방어를 잘해서,

별 소득없이 돌아갔답니다.

​고려가 하도 기세 등등해지고

자기랑 맞먹으려 드니까,

 

제 2차 이런 시부럴을 외치며

고려를 완전히 작살 내야겟다!!!

 

 

라는 목표와 함꼐 미친 거란이 드디어

1019년 드디어 개성으로...

 

소배압이라는 장군과

서열 5위 황제 친위군

우피실 군을 보냅니다.

거기서 드디어

강감찬 장군님이

나서기 시작합니다.

봉정사 극락전 출토 12세기 고려시대 단청을, 그 틀 안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적용해본 고려시대 단청과 문루

 

거란은 귀주대첩전에

가금씩 압록강 근처로

군사를 보내 위협했어요.

 

북쪽 나라들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꾸준히 도발하여,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 것 이지요.

 

더럽고 사악한 것들...!!

 

아무튼,

1014년 요나라 소적렬이

처들어왓지만 방어 성공!

 

그러나 거란은 고려를

확실히 손봐주겠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했기에,

 

압록강 인근에 진지를

구축하여 거기서 합숙을

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근데 그때 고려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거란군이

​아무튼 잘 방어했어요.

 

그래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하여 또 다시 그 카드를

꺼냅니다.

 

"강동 6주 다시 내놔 씹새들아"

 

만주벌판과 평양에 있던​3~5세기 고구려 건축물은 이런 느낌!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고구려 건축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당연히

고구려 후예로 인정받고

다시 영토 회복을 했기 때문에,

 

" 조까 ㅅㅂ ㅗㅗ "

 

하며 당연히 올태면 와봐

모드를 취하고 있었어요.

 

참~~ 염병같은 거란은 협상한걸

다시 조까 ㅅㅂ 모드로

지럴을 떨지 뭡니까!?

 

그러나 저 지랄같은

거란의 대부분의 공격을

아주 ~~

 

잘 막아낸 우리나라

고려는 자신감이 생겨!

 

염병질을 일삼는

거란 외교관을 체포했어요.

 

그래서 벼루고 있던 요나라는

​1015년 9월에 다시 쳐들어왓지만,

 

고려군의 우주 방어로 인하여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 합니다.

 

좆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마민족 거란의 공격을

아주 잘 막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굉장히 강력한

산성 축성 실력 때문 아닐까요?

 

 

고려시대 기록에는 개경성 나성의 성벽 높이는 8.1m,

산성 강화 건물인 6m 정도 높이의 성랑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욱 많은 고려시대 성랑 사진과 건축물을 볼 수 있습니다!

 

 

 

거란은​ 1018년 10월

다시 공격햇지만,

 

고려는 다 막아냇고

드디어 살수대첩이 시작됬고,

결국 우리가 대승을 거둡니다.

 

아무튼 여기서

대승리를 거둔 고려!

 

그러나...

 

 

소배압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황제 직속군을 이끌고 있으니까.....

 

 

소배압은 고려 개경성을

향해 냅다 달려갔어요.

 

산성 파워를 맛본 거란은

최대한 빠른시간안에...

 

전투를 끝내고 후방 안정을 위해

"멀티 무시 본진 밀기 ㄱㄱ"

작전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우리에겐

이런 더럽고 사악한 공격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으므로,

중간중간 강감찬 장군이

별동대를 보내 조금식

기습 작을 펼치고,

내구산에서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부대를 이기고,

평양 근처 미탄진에서

조원도 거란군 한부대를

격파하게 됩니다.

 

 

청야전술과 각종 게릴라전으로

그렇게 거란의 진군을 늦추며...

최대한 막았지만!

 

거란은 꾸역꾸역

고려 영토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진군 속도를 늦춰가며

전투 준비에 시간을 번 고려는,

 

그 사이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수비 강화를 했어요.

​즉,

소배압이 이렇게

힘들게 처들어갈때,

 

고려도 사력을 다해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소배압은 계속 타격을 받아도

일단 본진 밀기 ㄱㄱㄱ 를 했는데요,

왜냐면 여요전쟁 처럼 수도만 작살내면

뭐가 어찌됬건 고려가 님들 ㅈㅅ

할거란 생각을 햇기에...

슬픈건 우리

발해도 이렇게 점령당함.

​더러운 거란 오랑캐놈들!!

 

아무튼 그 시각 수도 개경성.

개경성은 전투하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써있길 성벽에 성가퀴도 딱히

설치하지 않은, 그런 성 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산성에 성랑을 올려 거의 13~15m급 성벽 높이를 보여줍니다.

 

고려 최고 중심부의

도심이라 그런것도 있고,

또한 평지에 만든 성 입니다!

 

그래서 방어력이

좋을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고려는 그 당시 방어 병력을

불러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북진 시켜서 더 병력이 없었어요.

그걸 알고있는 거란 소배압이

ㅅㅂ 어떻게던 개경만 잡으면 됨

그니까 일단 빨리 ㄱㄱ

 

 

한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란의 그런 속내를

어느정도 알고있었던 고려!!

 

그 뒤를 고려 장수 김종현이

빨리 따라 잡아서 조져야 한다!

 

를 외치며 추격을 하셨읍니다.

 

 

그리고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현종.

 

고려 현종님 꼐서...!!

"두 번 도망은 없다"

 

라는 의지로 각종

청야전술을 준비하며,

 

최후의 방어전,

개경성 방어전을 준비합니다.

전번에 먼저 치뤄진

2차 여요전쟁 에서는...

 

고려 수도 개경성이 한번

작살나고 왕 또한 피난

갈 정도 였습니다.

그런 슬픈 과거가 있기에,

할수있는한 최대한 방어준비를 하고,

 

할수 있는한 최대한의 방어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요나라와 고려가 공존하던 시기의 건축물인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감 실사 건축물

 

 

국내 단 하나, 유일한 고려시대 최대 전성기 건축관련 보물인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감"을 실사화 건축물로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간송미술관 금동삼존불감 사진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성문 성벽, 산성을

미친듯이 업그레이드 시키고

마을주민도 최대한 대피시켰어요.

 

그리고 드디어 소배압의 공격이 옵니다!

 

그러나...

소배압은 생각 이상의

방어력을 보여주는

고려수도..로 인하여

소배압은 꽤를 냅니다.

고려군에게 우리 철수해요 말 하고

300명의 기습대원을 보내려는거,

 

고려 성문 통덕문으로 가서

그걸 전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고려는...

 

더러운 오랑캐들이

그럴리가 없지!!하고

방어하고 있다가 고려기병 100명이...

 

거란군의 기습대원을 쓸어버립니다!

​무튼...

 

거란은 보급 신경 안쓰고

냅다 ㄱㄱ작전 펼쳐서 ,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보급문제 때문에 빨리

끝내야 됬습니다.

근데 고려가 청야작전및

각종 우수한 방어력을 보여줘서,

 

결국 요나라 군대는 보급까지

애매해지자 결국...

 

고려군을 최대한 피해 우회하며

퇴각, 드디어 귀주성에 이릅니다.

고려는 해안가 통로를 모두

틀어막고 거란을 귀주로

몹몰이 하듯 몹니다.

그때까지

거란 추격대인 김종현 장군님의

1만 기병은 도착못햇는데,

 

도착 전에

귀주대첩이 시작됩니다.

 

귀주산성에 성벽 건축물인 성랑 250여 개소가 있었다고 하며, 성랑을 모두 합친 길이는 2km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1019년 3월 10일 양력!

여튼 ​어거지로 귀주에

몰린 거란은...

귀주성 앞쪽에서 포진하고

있던 고려군 20만이랑

진짜 말그대로!!

 

1:1 맞짱을 뜹니다!

 

필드에서 한타 싸움 제대로

하게 된 것이죠.

한타전 전에 요나라 쪽은

나름대로 전략을 세웁니다.

귀주성 앞쪽은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뒤쪽에

구릉지대가 있는데,

요나라 군대 도감 야율팔가는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하천 2개를 건너

공격하게끔 하자는 의견에 반대하고,

 

배수의 진을 쳐서 최대한의

공격력으로 승부 보자고 했고,

결국 소배압도 야율팔가

말대로 개천 하나를 등진채

전투하게 됩니다.

 

거란은 사실상 스팀팩 빨고

한타 하려고 하는것과 같은

작전을 실행한 것 이지요.

 

드디어 한타 개전!!

​평원에서 한타전을 하는데,

 

고려시대 건축 양식인 쌍하앙을 접목한 고려시대 문루 (2층 뾰족한 2개 부자재가 쌍하앙)

 

 

 

드디어 김종현 장군님의

1만 기습 병력이 하천을 등지고

싸우는 거란군 등뒤로 나옵니다!

 

1:1 전하는데

뒤에서 소환몹 5마리 나온 그런것!

게다가 상당히 추운날씨인데,

 

갑자기

바람 방향이 고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고 소나기가 내렸어요!

전투중에 엄청난

바람으로 인하여...

 

화살 화력도 약해지고

비가 내려 시야 확보도

약화되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만큼

엄청난 소나기와

풍량이었다고 하네요.

 

(스콜인가..?)

 

거란의 10만 정예 기마부대로 이루어진

단단한 전투 진열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이속, 공속감소 디버프

걸린 거란 군대 뒷쪽에,

 

그 상황에 1만 기습 대원들이

뜨든!! 하고 갑자기 나온겁니다!

 

소배압과 거란 병사들은 이렇게 생긴 15m에 근접하는 미친 산성을 통과하고 개성으로 미친듯이 질주했습니다.

 

게다가 1만명은 정예 기습부대,

정예 기마부대로 이루어진...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부대!

정면, 측면이 둘러 쌓이는데 뒤로 강을

끼우고 싸우는 거란, 완전 포위!

이런 운이 따라주는데,

사실 이 전쟁을 준비한

강감찬 장군님은....

 

귀주 대첩이 일어났을 즈음에는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풍량이

전환되는걸 알고 계셧을 거라고 해요.

 

그러니까 평지에서

거란의 정예 기마부대랑 1:1

한타전을 계획할 수 있었을 것이라네요.

 

​참 슬픈 사실은

이 전투에서 발해인들이

거란군으로 투입됫을걸로 보인다네요.ㅠㅜ

 

 

말그대로 중국은 이 시절부터 우리를..;;;

아무튼 온갖 광역기와 기습,

생각 외의 엄청난 공격력으로

요나라 황제 직속 5위 군대를...

 

말그대로 포위 섬멸해버립니다!

말그대로 지금의 미국, 중국급인

거란 5손가락 안에 드는 정예 부대를,

 

평원에서 포위 섬멸하여

작살을 낸 엄청난 성과!!

 

봉정사 극락전 출토 10~12세기 고려시대 단청

 

그로 인하여,

 

26년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투를 종지부를 찍어버립니다.

 

 

거란은 황제 직속군중

큰 축 하나가 완전 섬멸당해서,

 

그 부담감으로

더이상 못처들어왔데요.

 

또한...

이 전투가 평원에서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완전 승리를 성취한,

 

우리 민족의 마지막 1:1

한타전 대승리 전쟁 입니다.

 

거란군은 송나라와 몽골

등등과 짱떠야 되는데,

 

황제 호위하는 큰축인 5위

군대가 전멸하다 싶이 되서...

 

그냥 거란은 어휴

고려야 미안 ㅈㅅㅈㅅ

모드로 가게됩니다.

그 후 동북아시아는 100년 이상의

평화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광화문보다 약 6m 더 높은 성문. 산성 성벽이 8.1m, 성랑이 6m 일때를 기준으로 하면 이 정도의 높이까지 예측 가능합니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개국이 주축을 이루고,

 

그 유명한 송나라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ㅈㄹㅈㄹ 하고 막~

 

엄청 잘나가는 평화의 시대가,

민족 최전성기 시대가 온 것이죠.

 

근데 오랑캐 거란은 정신 못차리고

1033년에 한번 처들어오긴

하는데 고려가 바로 격퇴..!

 

 

​세계 최강 대국 미국과도 같은...

엄청난 공격력의 요나라를 상대하여,

고려는 초기부터 기선제압,

청야 전술, 공성전및 수도 방위,

 

전진하는 거란군 지속적 견제,

포위 유도및 자연을 이용한 공격 등등...

 

그 시절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할수있는건 다 했습니다.

 

 

그 전술 총괄이 강감찬 장군님!!

​강감찬은 구국의 영웅이 되셨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모습은 이럴수도 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단청을 적용한 봉정사 극락전 12세기 버전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이후 고려는 개성 주위에

외성을 더 만들고 그 유명한~

 

천리 장성

(고구려 말고 고려 버전)

을 만들어 방어 구축을 더욱 단단히 하며,

이 전투의 완승으로

120년간의 최고 전성기와

평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가끔 나오는

"우리나라 최고 전성기는 언제?"

 

여기서 반드시 거론되는

" 송나라도 ㅈㅅㅈㅅ 연발하는 고려초기 "

 

그게 이 귀주대첩 후 입니다.

 

 

청자 기와, 붉은 주칠, 금으로 만든 어룡 치미로 장식한 고려시대 건물
고려시대 최대 전성기 시절 2층 건축물, 흑유와 우진각지붕 건물

 

고려시대는 흑유와, 청자기와, 붉은 옻칠을 하여 지금과는

꽤나 다른 느낌의 화려한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고려시대 2층 건축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귀주대첩이

왜 대단한 승리냐면,

거란의 10만군은 대부분이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

거의 대다수가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지금으로 치면 전부다

특수부대 부대원들!!

 

게다가

​거란 황제 친위군 5위의

우피실군도 들어가 있었어요.

​전원 특수부대 출신인데

다련장 로켓에다가,

 

개인별로 소형 레일건

무기 가지고 있는 수준이죠.

 

 

그에 비하면....

고려는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모은 20만명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라를 지키자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쳐 결사항전을

결심한 우리 조상님들 이십니다...!!

 

현종 황제마저 결사항전을

생각했을 정도.

 

 

더 쉽게 볼까요?

 

거란은 모든 전투기가

f-35만 있다고 치면,

고려는 f-35 몇대에 대부분

f-15나 f-16으로 구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 건축물은 이런 모습 입니다.

사진을 더 보시고 싶으시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통일신라 건축물과 단청에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초강대국을 육지전으로 작살낸,,,

 

평원에서 1:1 평지 맞짱으로

당대 최강 대국을 작살낸!!

한민족 최고의 대첩!

 

이후 거란은 강동 6주는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려는

동아시아 3대 축으로써,

 

사실상 초 강대국 반열에 올랐으니

참으로 대단한 전투가 아닐수 없지요!

 

더러운 중국의 선빵을 모두

막고 적을 전멸까지 시켜,

 

전쟁 분위기에 휩쓸린 동북아시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든 "귀주대첩"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길 바랍니다!

 

##############################################################################

귀주대첩 11줄 요약

 

 

- 요나라 ( 거란 )은 배후 안정을

위해 고려를 공격함

 

- 서열 5위 황제 직속군

피실군을 소손녕이 지휘함

 

- 예전에 개경성을 공격해서

승리했었던 거란

 

- 빠른 전쟁 종결을 위해

다시 그 방법을 택함

 

- 그래서 개성 어택땅 본진 달려 하는데

김종현 장군과 고려군이 게릴라 전으로

진군 속도를 늦춤

 

- 1018년 10월 살수대첩으로 거란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고 소손녕은 후퇴

 

- 소손녕은 재정비후 남은 10만 병사로

고려 수도를 치러 어쨋든 ㄱㄱ함

 

- 그때 고려 현종은 "두번 후퇴는 없다"

를 외치며 수도 개성에서 최후의 방어전 준비

 

- 그러나 고려군이 귀주산성으로

거란군을 몹몰이 해서 강제 한타각 만듬.

1019년 3월 10일.

 

- 평야에서 1:1 한타전 펼치는데

우리쪽에 유리한 파워 소나기 + 김종현

장군의 기병대의 기습 배후공격 등등 행운이 따름.

 

- 거란 군대는 거의 전멸하여 ㅌㅌ하고

요나라는 두번 다시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강동 6주 이야기도 더이상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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