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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빵은 실온에 두는데

여름철이 되면 빵을 안전히

보관해야 되는데...

 

그러다보니 어떻게 보관을

해야될지 몰라서 그냥

냉장고에 넣으시죠?

 

그런데 빵은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면 안됩니다!

 

이제부터 빵 보관방법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 빵은 냉장고에 넣으면 안된다!? *

 

 

 

 

보통 빵은 그냥 실온에

보관하느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름에 상하지 않게 하려고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는데~

 

빵은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됩니다!

 

 

이유는 간단한데요.

 

냉장고가 빵의 수분을 모두

증발시켜, 빵이 푸석푸석~

 

해지면서 결국 딱딱하게

변해버립니다.

 

 

빵의 신선도가 실온보관보다

6배이상 빠르게 퍽퍽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빵은 무조건

실온 보관이 최강이지만...

 

그래도 여름에 빵이

많이 있을때는 또 문제니...

 

그럼 어디에다가 넣어야

상하지 않게 장시간 보관

가능할까요?

 

"빵은 냉동고에 보관해야 합니다"

 

러시아도 호밀빵 종류가 많습니다.

 

냉동 보관을 하고,

먹고싶을때 해동을

해서 먹으면 되는데요.

 

빵을 해동하는게

귀찮으시더라도~

 

반드시 냉동보관을 해야합니다.

 

 

얼었다가 녹으니까

식감이 이상할꺼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식감이 의외로

쫄깃쫄깃, 갓 구매한 빵

정도는 아니지만~

 

구매 당시의 식감과

상당히 똑같습니다!

 

아무래도 냉동이 되면

수분이 얼기 때문에...

 

수분 손실이 없는데다가!

 

해동을 하면 수분이 다시

활성화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냉동고 보관을

하셔야 합니다.

 

해동은 전자레인지로

상태 봐가면서 다 녹을떄

까지 돌리시거나~

 

실온에서

45분 정도 두시면 됩니다.

(겨울은 좀더 두셔야겠죠?)

 

 

실온에서 녹여도 전자레인지에

안 꿀릴 정도로 구매시 맛봤던

식감이 상당히 잘 살아 있습니다!

 

러시아의 보르딘스키!

 

 

 

* 냉동 보관할때 팁 *

 

 

냉동보관하고 난 뒤

해동을 해야하기 떄문에,

 

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빵을 소분해서 얼리는 것을 추천해요"

 

 

전자레인지에

녹이는 시간도 줄어들고,

 

전자레인지의 열이 골고루

들어가서 더 빠르게,

 

더 확실하게

식감이 살아나게 됩니다.

 

 

귀찮으시면 그냥 해도 되는데

해동시간이 오래걸리므로...

알아두시길!

 

 

 

 

 

 

모든 빵 종류는 대부분

냉동 보관이 최고입니다.

 

 

그럼 간단하게 빵 종류별

보관방법을 한번 볼까요?

 

팥빵이나 크림빵은

상하기전에 빨리 드세요.

 

빨리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빵들은 굉장히

보드라운 빵이 많지요!?

 

그래서 구매시 딸려오는

비닐에 넣어두거나,

 

많은 양을 보관할때는

호일에 넣어 보관하거나,

 

빵 전용 용기에

넣는게 좋아요.

 

 

그런데 장시간 보관해야한다!

 

그럼 그냥 냉동고 ㄱㄱ

일반적인 아무것도 첨가

안된 빵보다는 식감이 별로,

 

그래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그럭저럭 식감이 비스무리하게

살아납니다.

 

고려시대는 지붕에 청자기와를 얹고, 금장식을 잔뜩 사용해서 매우 화려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2층 건축물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유기농 빵도 자주 드시요?

유기농 빵은 방부제가

없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3일뒤에 상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드시고,

 

대량 구매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만일 유기농 빵이 많다면

역시 그냥 냉동고 ㄱㄱ

 

유기농 빵도 실온에서는

그냥 비닐에 보관하시고...

 

여름엔 개인적으로 빵전용

용기에 넣어두는게

맘편하더군요!

 

 

 

* 바게트 빵 보관 방법 *

 

 

 

바게트는 구매후 바로

드시는것을 추천해요.

 

바게트는 일반적으로 2일

이후부터 눅눅해집니다.

 

바게트는 구매할때 주는

종이에 실온 보관해주면

됩니다!

 

비닐이나 호일에

넣어서 보관하면 금방~

눅눅해 집니다.

 

제빵 강국 프랑스에서도

이틀까지는 그냥 먹고,

 

그 뒤는 오븐을 사용하거나

그냥 버리거나 한답니다...!!

(혹은 마늘빵을 만들기도 해요)

 

만일 바게트를

대량 구매했을때,

 

장시간 보관을

하고 싶으실때는~

 

잘 나눠서 비닐봉지에

적당량을 나눠 넣은후~

 

냉동고에 넣어주시면 된답니다!

 

냉동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바삭바삭한 식감 보다는

뭔가...

 

쫄깃쫄깃한 식감이 생기며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수 있어요.

 

고구려 50m 건축물! 북한에서 가로 50m 건물터도 발견 되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통일신라 건축물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해동은 전자렌지에 녹여도 되고

실온에 그냥 녹여도 됩니다.

 

그러나 바게트는

바삭한게 매력이니...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냉동 보관보단 되도록~

 

이틀안에 모두 드시는것을

강력 추천합니다.

 

마늘빵도 똑같이

적용하면 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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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날짜를 나눌때
양력, 음력으로 나누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양력이란 무엇 일까요? -

 

 

 

 

 

1. 양력의 기본 개념

 


네.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태양의 1년주기를 기본으로
만든 날짜 입니다.

 

동양의 달을 주기로 한
날짜와 정반대 랍니다.

 

 

양력의 정식 명칭은 태양력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현재 전세계 공용 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태양력이
언제부터 도입 됬을까요!?

 

 

1895년 10월 26일 조선 정부에서
태양력을 쓰자고 채택을 하여,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순간 바꾸었습니다.

 

말그대로 불과 하루만에
1년이 빨라진 것 입니다!

 

 

그 해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였다네요.

 

* 연호란? *

 

 

왕의 제위 년도를
년도 처럼 표시한것으로써
왕의 제위기간을 알 수 있어요.

세종20년 - 1500년 5월 1일
이런식으로 표기하는 것이고
(그냥 예 입니다..!)

연호는 세종 20년
이것 입니다.

1500년 5월 1일은 세종이
20년째 통치 하는 해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사용중!
(일왕 나루히토부터는 연호가 바뀐다고 하죠)

 

 

5세기 고구려 건축물은 이런 모습!

지금과 엄청나게 다른 모습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고구려 건축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2. 양력의 시초와 탄생배경

 

 

그럼 양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시초는 율리우스력 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실제 해와 계산상 날자를
최대한 근접하게 맞춘 과학의 결과물!

 

 


*윤년이란*

 

양력은 무조건 몇백년에

한두번씩 실제 태양과~

날짜가 하루이틀

차이나게 됩니다.

그래서 2월달에 날짜를

하루 추가하여...

실제 태양과
오차를
줄이는 방식 입니다.


2월달에 윤년이 발생하면
4년뒤에 다시 발생합니다.

윤년은 2월 29일!

근데 100단위 년도의 2월은
윤년이 생기지 않습니다!

100단위년도 중에 400년단위는
윤년이 생기는 방식이며,

이 게시물 아랫쪽에서 확인
하시길 바랍니다~!


*-*

 


그러나 율리우스력은
오차가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력의 1년 길이는
365.25.00일 입니다.


(양력으로 따지면 1년+6시간)
(0.25는 6시간 입니다.)

 

 

그러나 실제 태양의 1년 주기는
365.24.22일.


즉 율리우스력이 1년간
11분 14초 정도 길어요.

(0.0078초 모자르므로)

 

그러다 보니까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났죠.

 

 

하루는 86400초 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86400초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ㅎㅎ

 

 

 

 


아무튼~

 

이 편차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터 1250여년 동안 누적됩니다.

 

결국 325년부터 1582년까지
오차가 계속 축적되게 되면서...

 

실제 춘분 - 율리우스력 춘분은
실제로 10일 차이가 났습니다.

 

 

3월 11일 즈음이 그 당시의
실제 춘분일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교황은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에서
역법 개정에 대한 권한이 부여되고
고친 것이랍니다.

 


근데 이 누적 오차를
어떻게 알았느냐!


역사가 흐르면서 천문학이
어마무시하게 발달 합니다.

 

그래서 천문대를 통하여
교황님이 몸소 체험했습니다.

 

 

춘분을 기준으로 했던 이유는,

 


춘분을 기점으로 부활절을

알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중요하죠.

 

서양은 우리의 설날과 같이
부활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 교황은 당연히 부활절

날짜를 철저하게 지키야 합니다!

 

부활절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날짜도 정확하게 지켜기 위해
그레고리력이 탄생한것이죠.

 

 

청자 기와, 붉은 기둥, 지붕 금장식!

고려시대 건축물은 이런 느낌 입니다.

 

더 많은 고려시대 건축물 사진은, 여기를 클릭하셔서 이동하시면 됩니다!

 

 

 

 

3 -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어떻게 바뀌었나

 

 


1582년 10월 4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없애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어요.

 


그레고리력의 1년 길이는 365.24.25일,

 

실제 태양의 1년 주기보다
0.0003일(26초) 정도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나게 됩니다.

 

 

굉장히 오차범위가 좁은

매우 뛰어난 계산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통일신라 건축물은 일본과 똑같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통일신라 건축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율리우스력의
한 해의 길이는 365.25.00일

 

이는 천문학적으로 계산한 1년의
길이보다 약 11분 14초가 길었어요.

 

그래서 율리우스력의 윤년 중에서
100년단위는 평년으로 하되,

 

그 중 400년으로 나눈 해는
윤년으로 놔두게 됩니다.

 

 

 

 

*** 윤년 계산법 ***

 

4년에 한번 윤년이 생기는데

100년 단위 년도는 평년으로

만들었어요.

 

 

1700년, 1800년,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은

윤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100년 단위 중에서

4백년 단위는 윤년이 됩니다.

 

뭔말이냐면...


100년단위 년을 곱셈 4단에

맟추어 보면 되요.

 

1600년, 2000년, 2400년은

윤년이에요.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윤년이 생기죠.

그럼 400년이되면 윤년이 100번이죠.

 

그레고리력은 여기서 3일을 뺀 겁니다.

즉 이런것 이지요. 예를 들어~


1700년 - 평년
1800년 - 평년
1900년 - 평년
2000년 - 윤년


1700년 부터 2000년 까지 400년이죠?

 

4년에 한번 윤년이 생기는데

저렇게 100단위는 평년이고

곱셈 4단에 맞춘 년들은

윤년이 되는건데,

 


그럼 400년간 3일이

빠지게 되는 겁니다!

 

즉 400년마다

윤년이 97일이 되는것이죠!


***

 

이렇게 우리가 쓰는
양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 입니다!

 

######################## 10줄 요약 #######################

 


- 양력은 태양의 1년주기로 맞춘 달력

 

- 우리나라는 1895년 11월 17일에 적용됨

 

- 양력의 기원은 율리우스력. 기원전 46년에 만듬

 

- 그러나 오차가 있음

 

- 실제 태양과 율리우스력은 128년에 1일 차이남

 

- 실제 1582년 춘분은 실제 태양과 10일 차이남

 

- 천문대 관측으로 이걸 알아냄

 

- 그래서 개정 했다.

 

- 그 개정안이 아주 과학적이다.

 

- 1582년에 만든게 현재 전세계 표준 달력이 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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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왜 음력에 지낼까요?



다른나라들은 대부분

1월1일에 새해신년을

축하하지만,


우리나라는 음력에

국가 최대 명절인

설을 지내지요!


신년을 다시한번 

축하를 하는데요!


과연 왜 이런걸까요?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 왜 한국은 설날을 음력에 지내게 됬을까요? *







일단 우리나라가

설을 언제부터 지냈는가,


그리고 그 완벽한 기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완벽하게 알려진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팩트가 있어욧.




고려시대부터는 확실하게

설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 이전인 남북국시대의 경우...


설에 왕실에서

왕이 대신들에게 연회를

배풀었다~! 라는 기록은

있지만,



고려시대부터가~


지금과 거의 같은

방식의 설 명절이,


민간에 이미 널리 퍼져

모두가 지금과 같은 설을

지냈을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1200년경

고려시대 단청, 고려청자 기와,

옻칠을 적용하여 만든 봉정사 극락전



고려시대는 거의 지금과 같은

세시풍속으로냈다고 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풍습들이

아직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네요~!


손윗 사람들에게

세배를 하고~


손님들과 함께 술도 먹고

뭐 그랬던것을 보면...


지금과 그렇게까지 많은

차이가 없다고 하네요.



그리고 또...삼국시대

이전 기록도 있기는

한데요~!



그 기록에 나와있기를,



기원전 3세기부터

정월날을 신성하게

기념 했었다고 하네요.



이때의 정월은

정월대보름이 아니라

"은 정월" 이라고 한답니다.


은나라에서 달의 시간으로

만든 정월 인데요~!


이날을 지금 시간으로

계산하게 되면,



"섣달그믐"

이라고 한답니다.


(섣달 그믐은 새해 바로전날 즈음... 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아주 옛날~부터~

1월 1일즈음을 아주 국가적으로

신성히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국내 불교 건축의 최고 건축물!

봉정사 극락전의 1200년대 고려시대 단청 적용 모습.

여기를 클릭하시면, 봉정사 극락전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아무튼 다른나라들은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린

대부분의 나라는 거의 모두

1월 1일에 신년 명절을 보내는데~


왜 한국만 유독 음력 설날을 고수하는가!



*그 이유는,


각종 탄압에 굴하지 않고,

우리나라 최대 명절인 음력 설날을 끝까지

지켜낸 우리나라 시민들 덕분 이랍니다!*




음력설날 탄압은,

생각보다 역사가

꽤나 되는데요~!



일제시대부터 확인 해 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지내들과 같이 태양력(요즘 달력!),


즉~새해 1월1일에 조선도

신년을 지내야한다!


...라는 명목으로...


음력 설날에 조선인들에게

각종 탄압과 일을 강제하여

음력설을 못 지내게 하였지만,



그것에 굴하지않고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든 음력에 설을 지냈답니다.



20m에 근접하는 고려시대 2층 누각



그리고 1945~1980년대

사이의 정부들 또한

마찬가지로~


음력 설날 보다는 되도록

양력 1월1일에 설을 지내게

정책을 시행 했는데요,


세계화를 추구하려던

이유에서 그랬을거라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음력설에 기업들의

휴가에 제재를 가해서

음력설에 무조건 일하게 하고,


되도록 1월1일에

설을 지내라고 모든 국민에게

각종 교육을 했어요.



그래서~ 대도시는 슬슬

신년 1월1일날 설날로 변했지만,



하지만 시골마을에서는!

계속해서 음력에 설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6공화국을 시작하는

보통사람 노태우 정부부터,


음력설을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니까

명절로 확실하게 정하자!


라는 여론이 미칠듯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때부터,


음력에 설을 지내는것이

사실상 합법화 되었답니다!


보통사람 정부부터는

입법화 하기 전 까지~


양력인 1월1일,

음력인 1월 1일을


둘다 기념하기 시작한 것이죠...!!


기록에 의거한 기둥 높이로 만들어본 고려시대 2층 전각.

이런 건물이 고려에 드문드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20m에 달하는 고려시대 2층 건축물에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


그러므로 6공화국

시작~~즈음 부터

명절로 정해지고,


민주정부에 들어서서야!


완벽하게 신년, 구정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최대 명절로써,


우리만의 풍습을 국가가

인정하여, 정식 국가명절

등극에 성공한 것 입니다!









***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신정과 구정으로 구분하게 됬고,


음력으로

새해를 축복하게 된 것이죠!


아무튼 올해도 하는일들

모두 다 대성공을 하고,

건강하게 한해를 보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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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대의 갑옷과


건축물을, 보다 고증에


맞게 만들어 봤습니다~!







뭐 100% 완벽한


고증이다! 라고~~~


당당히 말 하기엔.....






개인적인 각종 예측과


상상이 어느정도는


첨가됬지만..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사실들,


실존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서~








어느정도는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삼국시대는


자료가 많은게 아니므로


어느정도는 감안하시면서~










영화 안시성에 나온 갑옷과


물들을 기억하며 보시면


유익한 게시물 일 거여요!








그런데 글이 매우 길답니다~!



글이 길어서 부담 되시는 분들은!







글 읽는게 귀찮으신 분들은!


그냥 사진만 쭉~보시다가~






마지막 10줄 요약만 읽으셔도


맥락은 파악 할 수 있습니다!









- 안시성의 스펙 -









상상으로 만든 고구려 토석혼합성. 토성과 치, 성벽을 구축했으며 성벽은 10m 정도 입니다.






안시성은


우리나라 전통중의


전통인 "산성" 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것과



사실 살짝 다르답니다.








실제로는 돌로 쌓은 성벽



산등성이 + 토성이 합쳐진



"토석혼합성"이라고 합니다.









그 말인 즉슨 실제로는


성벽 겉면에 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성벽은 흙으로


판축을 쌓거나.....







산등성이를 이용한


산성의 모습으로 예상


한다고 합니다~!






입구나 주춧돌들


제외를 하게 되면...







성벽 겉면은


그냥 동산마냥~


풀들이 무성한 뭐 그런거죠.









성벽돌은


일반적으로는


강력한 방어가 필요한~







성문 입구만


돌을 쌓았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다고 예상이 가능하데요!




상상으로 만든 고구려 성벽!






안시성은 평지와 산지가


만나는 곳에 입구가 있고,







뒤로 갈수록 가파른


역 ㄷ자 모양의 산세가


만들어지는 천해의 요새며~






산 한가운데는 평평하고


완만한 지형인데~~







그래도 어쨌든 약간은


올라가는 지형이라~







외부에서


성 내부가 어느정도 보이는


지형의 산성이었다 합니다.







문 입구로 예측 되는 부분은


매우 높은 판축공법으로


만든 부분이 발견되어~!







입구나 성벽의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안시성의 성벽 자체는


그냥 뒷동산 모양처럼


자연스런 언덕 모양으로....







예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안시성으로


예측되는 장소는!


영성자 산성 or 해룡천 산성!







이 두 산성이


고구려 안시성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저의 글은 영성자 산성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영성자 산성은 실제로


고구려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는.....







실제 고구려 산성이


맞기는 맞습니다~!








중국 정부의 방관및


야비한!!! 출입 통제로


자세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아주 옛날에


영성자 산성을


실측했었습니다.






영성자 산성을 기준으로


그 내용을 보자면~





성문은 옹성 입니다.


(안으로 들어간 문)






문 옆에는 판축으로 다져서


만든 흙 성벽이 있습니다.






성벽은 총 4.5km, 성벽 높이는


구간에 따라 8~10m 내외.






그리고 흙 성벽이지만


고구려 성곽의 특징인...





"치"


"(저 누각 아래 내모난 거)"





"각대"


"(성의 굴곡진 곳 윗쪽이나 성벽

모서리 부분 위에 올린 누각 건물)"





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상상으로


만든 모델링 건축물은.....






나름대로 안시성


( 영성자 산성 )





의 특징을


기반으로 제작


해봤습니다~!












- 심심해서 만들어본, 고구려 개마무사 -







고구려 개마무사의


갑옷은 실제로는 거의


이런 모습일 것 입니다.






엄청 빤짝빤짝 하지는


않고 은은한 광택이


나는 무거운 느낌의 철갑!









일반적인 철을


주조한 색상,





고구려 벽화에


나온 채색방식과~






특이한 장식등을


전부 적용해 봤어요.









영화에 나온거 보다


훨씬 은색같은 느낌이 드는


갑옷이었을 것 입니다.





게다가 포인트가 대부분


붉은색이라 뭔가~~





울트라맨 같은 느낌이


상당히 강했을듯 (...)








아무튼 영화보다 좀더


은색을 강하게 했냐면...








고분벽화에 나온


그림만 보면 완전 은색이죠!







게다가 각종 박물관에서


복원한 제품들도 대부분은


저러한 색상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일반적으로


주조된 철 제품의


색상을 기준으로 했고...







많은 고구려


무사들이 쇠로만든


비늘갑옷, 찰갑을 입었을때는...






대다수의 무사들의 모습은


이런 느낌일 것 입니다.




고구려는 이런 금색나는


찰갑을 입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실제로 금색 찰갑 파편들이


발견이 됬기 때문이지요...!!


( 광개토대왕 님의 갑주였던 걸로..... )








실제 금은 아니고 구리에다가


황칠을 하거나 그런 식으로


만든 것으로 예상한데요.








실제 출토품으로는


금색 나는~~~






비늘무늬 갑옷의


파편들만 출토


된 상황이네요.








아무튼 우리


고구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친 이미지와 달리,








생각보다 굉장히


금빛나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사용했었습니다.








의외로 고구려는......


거친 모습 보다는............








고급진 느낌이 많이


나는 국가였을 가능성도...







나름대로 있다고, 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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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의 실제 위치 -










안시성은


아직까지는 지금의


"요녕성(랴오닝성) 영성자산성"







바로 이 장소가


가장 유력하다고 하네요.







위치는 중국 요령성 해성시


(랴오닝성 하이청시=海城)









"팔리진 영성촌"










八里镇 营城村


직접 답사하신분이


여기가 맞다고 합니다.








Yingcheng


영청이라 발음하는 장소가


해성시에 3군데나 된데요.







그래서 직접 방문 하신다면


八里镇 营城村 이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몇년간


중국 정부에서 외국인


출입통제를 한 구역이라서,








사진 자료가 찾아봐도


실제로 거의 없습니다.







영성자 산성은


성벽은 돌로 기초를 쌓고,







흙과 돌을


섞어 벽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혼합산성이며~








총 길이는


4.5km로 산성중에선


작은편이라고 하네요.







이곳은 평지에서


산악지구로 들어가는


천혜의 요새 지형에 속하며,








실제 남쪽 입구로


예상하는 곳은






평지와 산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고 합니다.







성은 외성은 서쪽, 본성은


그외 나머지 구역이라네요.



출저:구글맵


실제 중국 만주의 영성자 산성 위성.

동그라미 부분이 입구와

토산으로 추정되는 언덕!







두번째로는


대석교시 주가진에 있는


"해룡천산성"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영성자 산성은


작은 산성에 속하는데,







해룡천산성은 본성터가


꽤 큰 걸로 예상되는거


같더라구요.







그리고 안시성


이름의 기원이


"요동군 안시현"에서 나왔는데,








여기 근처에


"영수구 고성" 가 있고,







그게 안시현에 있었던


거라는 추측 때문인것 같네요!








해룡천산성


역시 자료가


거의 없는데,









일단은 토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토산의 여부는


잘 모른다고 하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두 성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있는


편에 속하며








( 조금 먼데 근처라고 봐도 무방...!! )









둘다 하이청시


안에 포함되어 있더군요..!








또한 둘다 확실한


우리 땅! 만주땅!







고구려 산성은


맞다고 하네요.








영성자산성, 해룡천산성


이 두곳 모두~







고구려 시대 기와가


쉽사리 발견된다고


합니다.







만일 안시성이


아니더라도,






명확하게 두곳 모두 우리


고구려의 성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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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 전투에 대하여 -








안시성 전투는 645년에


벌어진 고수 전쟁의 하나로,








당나라 50만 대군에 맞서싸워


엄청난 우주 방어 수성전과


행운이 맞닥드려,







결국 우리의


고구려 조상님들이


승리를 하게된 전투 입니다.







일단 왜 당나라에서


쳐들어 왔냐면,








중국 대륙은 통일됬는데~






근처에 매우 규모가


어마어마한 고구려가


매우 거슬린 당태종 이세민.









신하들의 만류에도 몰래몰래


치밀한 준비를 한 뒤...








연개소문의 막리지 등극과


새로운 왕위 계승 관련


일들을 빌미 삼아~!!







일단 핑계대고 쳐들어


간거라고 한답니다.







그리하여 당나라 군대 및


거란과 돌궐 같은 이민족들


까지 끌어들여~ 출발했죠!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대,


이세민이 이끄는 본대,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 통합 약~










5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의 고토, 요동과


요서를 치러 갑니다.








이 전쟁은 당나라의


황제 이세민이 직접


참가한 전투였고,







각종 기만 전술과 기습


등등으로...








결국 고구려 장안성


가는길을 수호하던


여러 성들과 개모성을 공격해서 이겼고,








이후로 요하를


건너 갑니다. 그 후~







천연 요새 비사성,


거대한 요동성과~








지금도 성벽이 남아있는


백암성 공성전에서


모조리 승리합니다.







그 후로도 연전


연승을 하게 되는데,








이 근처에는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


이렇게 3개의 성이 있었다고 해요.








이런 저런 전략전


이유로 인해 안시성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









그리고 당나라는


베이스 캠프를 안시성


남쪽으로 옮깁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전통의 지랄같은


지형과 산성 전투의 특징 떄문에,







무적을 자랑하던


당나라의 최신식






공성무기인 포거,


충거와 같은 각종~






포차들이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고 해요.







역시...산성의 나라 답습니다!







성벽이 부서지면


재빠르게 재건하고


각종 소음및 도발 등등...







엄청난 저항으로


방어전을 성공하는


안시성을 보고...









당나라 황제는


길어지는 시간에다







미친 방어력을


보여주는 안시성을


보고 혀를 내두릅니다!








상상 이상의 강력한 방어력을


실감하여 어리둥절해진 당나라..!








그때부터 별별 의견이 다


오고 갔다네요~!







배타고 평양 장안성을 바로


가서 드랍 작전으로 쳐부수자!










라는 의견과...







평양 장안성을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성인


오골성을 먼저 접수하자!










라는 의견들이 나왔다는데...








이세민의 심복 장손 무기가


천자의 원정이라 요행을


바래선 안되니까,









안전하게 안시성부터 이기자!


라는 이유로...이후에는


안시성에 몰빵합니다.







그 50만 대군의 몰빵 공격을


막아내며, 모든 전투 전략을


총지휘 하시던 분이 바로...







양만춘 장군님 이었습니다!



구려는 태양과 삼족오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지금과 전혀 다른


붉은색 계통이 예전 우리 고구려의 최고 색상 이었습니다.






건물 기와나 벽화, 최강의 개마무사 깃발이 붉은색이였던게그것을 증명합니다.


붉은색이 힘과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15만명을 투입한 거대한


요동성도 막기 힘들던 당군을,







훨씬 작은 크기의 성에서


강인한 삼한의 기상으로


막아서며,







당나라 황제군을 당황하게


만드신 우리의 위인 입니다!








아무튼~!








당나라 입장에서는,


공격할 루트는 사실


많았지요.









게다가 전 왕조에서,


말도안되는 미친짓으로


결국 다 만들어놓은!









중국에서 고구려까지 가는


운하까지 있었기에,







배타고도


갈 수 있었거든요!







어짜피 운하도


만들었겠다...






그냥 평양까지


배타고 드랍작전 혹은


걍 오골성 뿌수면 되는거 아님!?







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고구려가


요동성까지 먹어가면서


성을 축성하는데,






되게 전략적으로


성을 배치했다네요..!








거주지이자 평지성인 본성과


방어성인 산성을 동시에 두면서~






많은 성들을 평양 장안성


오는길에 적절히 배치하여,







한군데라도


무시하고 왔다가는


포위 섬멸 당하기 좋게~!






포위망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산성들이


배치가 되었다고...








여러 전문가분들이


예측 하시더라구요.









당나라가


운하로 배타고 와서


안시성 드랍 작전 또한...~!








까딱 잘못하면


근처 건안성, 신성같은~







주위 성에서 도와주면


당군은 꼼짝없이 완전히


포위 당한다고 예상 된답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고구려의 성 배치+황제 출정 전투








...라서


당나라는 하는 수 없이...








그냥 fm대로 기습및


보급로를 포위할 수 있는


안시성부터 잡으려고 했죠.








***




전략, 전술에 능통하신


분들의 의견을 봤을때,








안시성을 먼저 공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위의 이유도 있지만,


앞전에 이긴 주필산


전투 때문인데요,







그 전투에서


포위하여 사로잡은





고구려군은


대략 3만명이었지만,


약간 개별부대 같은 성향이었고,







포위된 2명의


장군 휘하 3만명을 제외한


고구려 주필산 방어군은






9만명 정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골성을 먼저 치면


주필산 주력 병력들과 안시성,


건안성의 병력에~








당군이 둘러 쌓이고,








건안성을 먼저 치면


주필산 부대와~







고구려 정예군이 오골성으로


모일수 있는 시간이 벌리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며 신속하고,


당나라 보급로를 정확히!







지킬수 있는 안시성을


먼저 공격했다고 하네요.






***






산에서 전투하는


산성전이라 공성


무기도 별로고,







미칠듯한 방어를 보여주는


안시성 방어군들의 저항으로,








전쟁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당군은


드디어 그 유명한...








60일동안 미친듯이


흙 퍼날라서 산을


만드는!







토산 작전을


실행합니다!








안시성 동남쪽 에서부터


흙산을 쌓아 올리면서~







차근차근 성쪽으로


접근했다고 하네요...;;








보통 고구려 성은 높이가


5m~10m급이고, 산성이라


체감은 15m를 가뿐히 넘죠!









그래서 어지간히


지랄맞은짓을


하지 않으면,







고구려 산성 높이를


이겨낼려면....







토산을 거의


20m정도는


쌓아주는게 맞겠죠...!?









;;;









무튼;;









이지랄을 무려


60일 동안합니다!!








그 와중에도


전투는 이뤄졌고,








가끔씩 성 누각과 성위의


작은 담들을 부섰지만,








그때마다 목책으로 바로바로


수리를 하며 산성의 엄청난


방어력을 보여줬답니다.









계속해서 길어지는


전장 시간으로 인해


초조해진 이세민은~









안시성 서쪽을


6~7회씩 공격하고,








동남쪽으로는 토성을 쌓아가며


양쪽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펼쳤다고 합니다.







50만명의 대군을 막아서는


고구려 조상님들의 기백과,








지형의 점으로 미칠듯한


방어력으로 버티는 와중에~!








드디어 우리에게


천운이 따르게 됩니다!



안시성 입구에서 고구려 개마무사의

시선으로 당군의 토산을 바라본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안시성 입구 문과 맞먹거나, 혹은 훨씬

크거나... 하여튼, 상상이상의 크기로

매우 장엄했을 것 입니다..!









참 신기한게 이 미친짓을


하며 만든 토성이 실제로...








거의 5~10m에 달하는


성벽보다 높아서,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산성이라 체감율은 더 높았을 겁니다.)







넓이는 사람이


500명이나 올라갈수있는







거의 학교 운동장


반만한 사이즈 였을


가능성이 크죠!!








게다가 전투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만든건지 신비로울


정도로~!







토산과 고구려 성벽까지


생각보다 매우 가까워서,







토산에서 정찰하다가,


전략적으로 빠르게







성안으로 진입이


가능할 정도였나 봅니다.








아무튼 토성이 완성된후,


각종 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황제 이세민의


군대중 일부가~







토산 정상에서 대략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상에서


주둔하여 대비를 했는데,








갑자기 미친듯한 폭우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땜에 토산에서


주둔하던 부대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







그 토산이


성벽쪽으로


기울어 흐르게 되고,









결국 토산이


성벽을 덮치게 됩니다.







(이건 폭우가 내렸다는 설과,


그냥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설


뭐 조금씩 말이 다르네요!)








경사진 지형+ 산성인데...








성곽쪽으로


흙이 덮칠 정도로.....







좆나게 미친 산을 50만명이나


뺑이 시켜 만들었다는게...허허;








영화에서 볼때나,


그냥 글을 볼때나


참으로 대단하네여;;








아무튼 토산이


미칠듯하게 커서,






그게 성곽과


합체하는 상황이 발생,







결국 우리의 안시성


쪽에다가 흙 성벽하나






더 만들어주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런 기습적인


상황에 생긴 엄청난 천운으로,









엄청난 크기와 지형적


잇점까지 추가된...!!








거대한 토성벽을 하나 더


가지게 된 우리의 고구려


조상님들은,






바로 그 토성으로 달려가 전투,


점거하여 참호를 쌓고, 그 짧은


시간에 해자를 만들고~









(성을 둘러 싼 강 같은거,


상황상 걍 물 없는 구덩이로


사용된 듯 합니다.)







할수 있는한 최대한


방어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이거땜에 토산을 기점으로


공성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투 상황이 바뀌고,









3일 내내 50만 대군이 토산을


공략했지만, 이걸 다 이겨낸게


우리의 고구려 조상님들입니다!








아무튼 성곽보다


약한 토성에서 조차~






미칠듯한 방어전을


펼쳐서 3일내내 그


공격을 다 막아냈고,







결국 88일동안


미친듯이 공격했찌만,







요동성의 추운 날씨,


보급 문제로 결국


퇴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9월 18일이며,








안시성에서


요하 하류->요택으로


가는 길로 당군은 퇴각을 하는데,








요동성은 그때부터 물이


얼고 녹아서 진흙탕에


아주 난리여서,








당태종 이세민도


나서서 수레를 밀어야


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나중에 집에


가서 춘추필법으로,






퇴각했지만


우리가 대승함!





이라는


글을 냄겼다네요.






요택말고 그냥


여지것 점령했던






고구려성 루트로


가면 편한데 거기로 간 이유는...







전선이 지연되면서,


시간이 길어지 틈을 타~!







고구려군이


몰래 다시 성들을 수복하여~!






당나라 군대를압박 해서 일수도

있다고 합니다..!


( 그만큼 성을 전략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죠!)



안시성 전투가 있을 쯔음인

650년을 기준으로 만든 고구려 건물.


7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의 모든

무늬들을 넣어서 만들어 봤어요.









아무튼 우리측 방어군은


사실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당나라의 50만 황제 출정


대군을 다 막아냈다는 것,








우리의 전통인 산성 문화가


고대 방식의 제식 전투같은


상황에선 진짜 엄청나다는 것








등등~~!








고구려부심


꽉차기에 딱 좋은,







정말 멋진 수성전


승리였습니다.











- 토산에 관하여 -










토산에 관해서는 전략,전투


관련자분들이 잘 아시는데,








그 분들의 의견들을 쭉 봤을때~







왜 하필이면


성벽쪽으로 흙이 덮쳤는가...








에 대한 전체적인


의견과 결론은,







토산 뒷편에 나무 계단식으로


흙을 눌러가며, 대충 쌓아가며


토산을 만들었기 때문









이라는 의견이 많더군요~!









나무 계단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냐면, 사서에 나무로


길을 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죠?







단단히 다져가며 만들수


있는 상황이 아닌,








최대한 빠르게 진격하기


위해 만들어야되는 상황!







흙으로 산을 만들었기땜에,


이동을 쉽게 하려면...








계단 같은게 당연히


있어야 이동이 편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로


길을 냈다는 것은,







토산에 올라갈 계단+


효율적으로 흙 다지기+







이동에 꼭 필요한 길 확보...


이 모든것을, 나무로 길을 내며~







토산 뒷부분에다가 나무로 계단


만들면서 쌓은거라 예측된다네요!



당나라의 토산을 점령한 인면조 갸릉빈가!









전투 상황에서 각종


무기들을 다 막아내며


만들어야 하는데,








흙을 다지고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가며, 판축법에 따라~







산을 만들기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속전 속결로 빠르게


성안에 들어갈껄 예상해서~!








그냥 적당히 다져가며


나무로 최대한 눌러서


계단 만드며 쌓는게 가장...








그 상황에선 합리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네요.








그런데 제대로 다지지 않고


속전속결로 막 쌓는데다가,









매우 많은 인원이 항상



상시 이동을 하고, 주둔


했다고 합니다.








(500명이나 흙으로


만든산에 주둔했었다니...;;)








상시 이동을 하다보니,


흙산의 하중이 앞으로


쏠릴수 밖에 없었고,








결국 우리 안시성에


거대한 흙성벽 하나


만들어준 셈이 됬죠.









그리고 크기가


정말 엄청난게,


위에서도 적어놨지만...







사람 500명을 수용 가능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크기!!








게다가 고구려의 성벽이


기본 5m~10m이고 또한


안시성은 산성 이었죠.








그런데...






그런 산성조차 내려다


볼 정도로 미친크기로


만들었고,









개인적으론


영화에서 보여주던 그~






엄청난 크기가 사실과


가까울것 같은 느낌이네요.








***** 영화 안시성의 토산 장면은 전부 진짜 있었던 일!? *****









영화에서 나온 내용은 반은


맞고 반은 판타지 라고 생각...


하시면 되시겠습니다.








땅굴을 파서 작살을 냈다!!


라는 기록은 아예 없습니다!


기록으로는 오로지...





" 갑자기 소나기가 미친듯 와서"


" 500명의 주둔군이 잠깐 이동했는데"









이 정도의 기록만이 있습니다.








영화 내용은 좀더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양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외 공성전 시설물이나


공성전 불바퀴 등등 또한~







어느정도 영화의 영상미나


재미를 위한것이라 생각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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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이전 500년대 삼국시대 고구려 건물은 이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인면조 갸릉빈가와 고구려의 피라미드 왕릉을 모티브로 만들어본 전각.



여기를 클릭하시면, 자유롭게 복원해본 고구려 건축물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 안시성 성주에 관하여 -









안시성의 성주이신


우리의 고구려 조상님


양만춘 장군은,







사실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저 안시성 성주 라고만


짧게 기록 되있다고 하네요.








양만춘 이라는 이름은


16세기 명나라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


라는 중국책에서 처음


사용된 이름이라 하네요.









삼국사기에 안나온


이름이 조선시대나


되서 나온것이죠.








고당전쟁 1000년


후인 조선 후기쯤에...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 열하일기 등등~








이 시기부터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1000년뒤에나 소설책에


나온 이름이기 때문에~!







그냥 창작된 이름일거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네요.







그리고 연개소문의 막리지


등극 사건으로 인하여 생긴


유명한 야사가 있는데요!









그 야사에 의하면,


안시 성주님은 연개소문의


그러한 행동과 인품때문에,









연개소문의 명령에


복종을 하질 않아서,








연개소문의


공격까지 받았지만,








결국 그것또한 다


막아 내셨다고 하며~!








이러한 이야기가


당나라쪽에도 이렇게


저렇게 퍼트려지면서~!









안시성 전투 이전에 이미,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이세민과 당나라 장수들은


약간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 안시성으로 예상


되는 성의 성벽을 봤을때,








현명하고 실용적이면서


애민정신이 있으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우리의 엄청난


대완승 수성전!






승리의 역사인 안시성


전투에 대해서 알아


봤습니다~!








################### 10줄 요약 ###################






- 당나라 황제가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옴.








- 안시성은 험준한 산에 만든 천혜의 요새.








- 안시성은 흙으로 만든 토성인데


치와 누각까지 겸비된 산성 이었다.










- 그래서 당나라 공성무기의


위력이 감소됬다.








- 그래서 88일간 당나라 황제 직속


군대의 공격을 다 막아냈다.








- 현재까지는 중국의 영성자 산성이


우리의 안시성일 확률이 매우 높다.








 - 양만춘은 명나라때 만들어진 이름,


실제론 안시성 성주라고만 기록됨.







- 실제 안시성 관련


기록은 중국 기록에


몇줄 정도 적혀있는게 전부다.









- 영화 안시성은 적은


사서 기록에 어느정도


양념을 나름대로 잘 쳤다고 생각하면 된다.








- 고구려 건축물은 지금과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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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도심 가장 중심에

있기 때문에,역사적으로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짧게나마 청계천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청계천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의 백운동 계곡이

발원지며, 청계광장 부근 쪽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이 합쳐지며 중랑천까지 물이

이르는 길이 13.7km의 하천입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그냥 개천(開川)

이었습니다! '냇가를 파내다' 라는 의미

이구요~!!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죠.


청계천이란 이름은 이런 저런 설이

많은데요, 백운동 계곡의 물줄기를

'청풍계천(淸風溪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구요,



혹은 영조때 공사가 잘 마무리 되자

영조가 직접 나와서 확인을 했는데,

개천을 깨끗히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

이라는 글귀가 청계천으로...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네요.


확실한 건 일제시대때 완벽하게 청계천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 입니다.


옛 문헌에는 이 하천은 서울 물길의

주류를 이루면서 우리나라의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가는데,


이 하천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물기운이므로, 한나라 도읍지에 있는

명당수가 되는 개천이라 하였다네요.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준설 등

치수사업 대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의

하천인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양쪽에 둑을 쌓았으나 비가 많이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네요.


하여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인 개천도감(開渠都監)

을 설치하고, 그후에 큰 공사를 했어요.


양쪽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드는 등 여러가지를 했고,

이때 동원된 민간인들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군인들 52800명 이었다네요.


***


그 후 딱히 없다가 세종대왕때 다시

개천 정비에 여러가지 노력을 많이

기울이셨고, 시행 하셨다고 합니다.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이라고

하는 '상설시장 건물 단지'의 뒷편에

도랑을 파낸 뒤,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키는 공사를 했다네요~!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네요,


또한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언제든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준설이 거의 없었다 합니다.

1669년, 서울에는 인구가 대략적으로

 19만명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사람이 모이고

나무를 많이 사용했기에, 나무들이

없어지면서 비만 왔다하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였고, 청계천도 더욱

오염되갔다고 합니다.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다시

준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영조 28년 1월에, 실제로 개천의

주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모두들

개천 준설에 찬성 했다고 하네요.



하여 일당을 받으면서 일을 할

인부들을 모아서 준설을 하였고,

하천 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인공산인 가산을 쌓았습니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인공산이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20만명의 인원이 57일 동안 석축

쌓기, 개천 넓이와 수로 직선화를

작업했고, 그곳에다가 버드나무를

심어서 지반을 탄탄히 했다네요.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에다

기록했고,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에,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부터~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습니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이

지금의 일직선 모양으로 잡혀졌습니다.


흙 산이었던 가산은 일제시대때, 도시

근대화로 인해 사라졌고, 현재는 그저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만 남아있죠.



그 이후 일제시대, 일제는 '제1기

하수도개수계획 (1918~1924)'

수립, 이때 세종로부터 마장철교

5.9 km 구간과 배수가 불량한

17개의 지천을 개수하였어요.


1925년 10월부터는, 또다시 일제는

제2기 하수도개수계획을 수립했고

백운동천이 신교동부터 도렴동까지

1395m 구간을 복개를 했다 합니다.


 또한 동시에 옥류동천,누각동천,

사직동천 271m 구간 부분을 복개

공사를 해서 길을 만들었다 합니다.


1926년에는, 남대문로1가 부근의

'광통교'에서부터 주교까지 전부

복개하여, 유원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1935년에는, 청계천을 싹 다 복개,

도로와 고가철도를 건설하는 별별

계획 또한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이듬해에 모든 청계천을 복개하여

지상에는 전차를 놓으며, 지하에는

지하철을 놓은 방안도 있었다네요.



허나 실제로는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까지의 구간만.. 복개되었다죠.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 "대경성계획"

이라는 것을 1934년에 계획했고

청계천을 복개하기로 한것입니다. 


그 위에 도로로 만들고 고가철도를

넣어서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이동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나 몇몇

부분까지만 복개후, 결국 독립했죠!



그 후 계속 방치되다 광복후

1954년, 5265만 환을 투입해

하수도 개수를 추진했고, 그뒤

1955년에, 광교 상류 135.8m를

일제 이후 처음으로 복개 합니다.


그후 1958년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 복개를 완공했으며,

 이 기간동안 '교와 동대문 까지'

오간수문 다리까지 복개 했습니다.


그 후 1965년~1966년까지 또한

오간수문 다리~제2 청계교까지 복개,

1978년에 마장철교까지 복개를 했습니다. 


그 유명한 청계 고가는 1967년 8월 15일날

공사, 1971년 8월 15일날 완성되었다네요.



그 후 2003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7월 1일부터, 복개되어 숨어있던

청계천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만드는,


복개를 다 뜯어내고 개천을 들어내는

복원 작업을 해서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습니다.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의

2.50 km 구간은 일제시대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은 없다 합니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물을

끌여들여서 시작점인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

방류하는 형태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


아무튼 서울이 도성이 된 이후,

끊임없이 보수하고 모습이 변한

청계천..지금은 정말 좋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 했죠. 상당히

긴 역사가 있어서 놀랍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퍼가실땐, 출저를 꼭 표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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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2월은 28일인데, 한번씩

29일일때가 있죠? 왜 이렇게

한번씩 29일이 생기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셔서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2월 29일 윤일은 왜 생기는 것 일까요? *




29일이 생기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바뀌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65일 6시간

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365일로만 날짜 계산을 하죠.


그러다보니, 4년 정도 흘러가면

남는 6시간들이 계속 더해져서

결국엔 24시간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4년째 되는 해에

실제 요일수가 하루정도 차이

나버린답니다.



그래서 4년마다 한번씩 맞추며,

2월달에 하루를 추가하면 거의

날짜가 정확하게 맞춰지게 되요!


그래서 29일이 생겨나는 것이며,

이 하루가 추가되는 해를 가르켜

'윤년'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리고

1년이 366일이 됩니다.


통상적으로 '윤년'이라고 칭하는

것은 '윤일'이 추가가 되는 해를

말하는 것 입니다. 29일은 윤년

이 아니고 '윤일' 이라고 합니다.



윤달은 음력에서 사용하지만,

윤일은 양력에서 사용합니다.


음력인데 윤달이 들어가거나

양력인데 윤일이 들어간다면,

그 해는 윤년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윤달은 3년에 한번씩

오며, 계절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윤일은 언제나 2월29일

입니다. 윤년이 아닌 보통의 년

일 경우는 '평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9일이 생일일 경우엔

2월 28일날을 생일로 한답니다!


양력의 윤년은 12지에서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해당하며,

해마다 하계 올림픽이 열립니다.



***


양력은 그레고리력 이라 합니다.

국제 표준 달력이구요, 양력에서

쓰는 윤년의 법칙은 이렇습니다.


서력 기원 년도가 곱셈법 4단과

같이4로 나누어지는 해를 윤년

으로 정한다고 합니다.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2020년~)


 이 중에서 년도가 100년이

되는 해는 평년으로 합니다.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


 그중에서 400년으로 나눈 해는

평년이 아닌 윤년이라고 합니다.


(1600년, 2000년, 2400년~)


그레고리력은 상당히 치밀하게

역법으로 만들어진 달력입니다.


1582년에 만들어졌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수정된 적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 졌다네요.


그러나 약 3천년마다 1일의 편차

발생이 있을 수 있어서, 4천년에

한번씩 윤년을 하루 빼자는 의견

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계산하면 '3200년에 한번'이 더욱

정확하다고 합니다.



***


어째서 2월달에 29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짧고

쉽게 알아봤습니다! 이젠

이 29일의 명칭과 이유를

정확히 아셨을 것 입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퍼가실땐, 출저를 꼭 표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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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음력을 사용하죠!


그런데 왜 음력은 왜

쓰는지 잘 모르고,


또한 양력 달력과

비교를 했을때 꽤나

날짜 차이가 나지요?


이런 것들이

궁금하신 분들도 많으실거라

생각해서 이렇게 써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음력이란 무엇이며, 왜 양력과 차이가 날까요? *





음력은 "달의 모양과 계절을

기준으로 만든 날짜 계산법"

입니다.


아주 오래된 동양의

날짜 계산법이며,


우리나라는 3세기 백제가

정월을 언급한것을 보아...


우리나라도 중국에서

무작정 수입한것이 아닌,


나름 우리만의 체계적인

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답니다.


아무튼...



동양에서는 이것을

태음력이라고 하는데요,

한국은 약간 다릅니다.


한국의 음력은,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하여 만든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 입니다.



태음태양력의 날짜 계산은

보통 이렇게 한답니다.



달이 보름달이 다시 보름달로

변하는 과정기준으로 했고,


계절의 변화는 계절변화에

맞는 태양의 움직임

기준으로 만들었어요!


수도 이름부터 월성으로 만든 통일 신라시대의 건물.

사진을 클릭하시면 해당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달의 모양 변화를 중심으로,

해의 변화와 계절 변화까지

관찰 하면서 만든..


상당히 정확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관찰기준은 해 보다는

거의 달(Moon)을 기준으로 해요.



그러면 보름달에서 그다음

보름달까지 변하는 실제 시간은

대략 어느정도 일까요?





보름달에서 다시 보름달이

되는 주기는 29.5306이며,

삭망월 이라고 합니다.



근데 왜 29.5306이냐면..



달의 실제 공전주기는 27.322일!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동안

"지구도 역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어서"


보름달을 우리가 보려면

실제론 시간이 약간 더 필요해요.


그래서...


음력은 날짜를 29일 또는

30일까지만 사용하며,


이로 인하여 양력과는

꽤나 차이가 나는 날짜의

갯수를 가지게 되는거라네요!


그렇기 때문에...

음력은 '1년 354일날, 1년 355일'

이 둘중 하나로 가끔씩 바뀝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계산을 하다보면

1년에 11일이나 모자르게 되죠.


그리고 이게 3년정도 쌓이면,

양력및 진짜 실제의 계절과

한달이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3년에 한번씩 '윤달'이라는

특수한 개념의 한달이 추가됩니다.


즉 1년이 13개월인 해가 생겨나게

되요! 3년에 한번씩 발생한답니다!


그리하여 1년이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일이 생기는데요.


음력은 1년이 354, 355일이 있고,

3년마다 1년이 383, 384일이 되는

년도가 있습니다.


이래서 음력은 항상 표준 달력하고

보통 한달정도 차이가 나는것이며,


1년의 길이가 그때그때 바뀌기 땜에

양력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윤달은 어떻게 넣느냐~!

이 방식은 아까 위에서 말했듯이...


항상 3년에 한번씩 넣어주며~!


날짜와 실제 계절, 달모양변화가

한달 차이나는 시점에 넣어요!





계산에 따라 계절은 조금씩 바뀝니다.



평균적으로는 5월이 가장 많아요.


11,12,1월은 거의

없는편이라 하네요.



윤달은 3년에 한번 찾아오며

차이를 조절하는 "공달" 이라는,


추가가 되는 날이라는 개념이

예전부터 있었으며...


"하늘과 땅의 신(神)이 인간을

감시하는 일을 잠시 쉬는 기간"

이라는 개념또한 있었고


"이때 아무런 탈이 없는

무탈의 기간이기 때문에"


이때 여러가지 일을

거침없이 했다고 합니다.



5월에 결혼하면 좋은 이유중 하나죠.

5월에 윤달이 많이 있어서 같네요!


'윤달에 결혼하면 무탈하게 살아간다'

는 속설이 예전부터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5월이

결혼하기 좋다는 말이 생긴것

같습니다.ㅋㅋ


따뜻한 것도 있구요.


실제로 옛날 사람들은

윤년에 결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좋은날 이기에..!



하지만 20세기부터는‘윤달에 결혼을

하게되면 조상들이 찾아오지 못한다’

는 속설이 생겨났고...


그래서 요즘에는

윤달에는 결혼식을 기피하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생겼다 하네요.


5월 결혼에 관한것은 다음에 다시

작성을 해보겠습니다..!





***


아무튼 한국의 음력에 대하여

알아봤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퍼가실땐, 출저를 꼭 표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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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설날에 무료개방을

하는걸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럼 3일의 설연휴중 어느날

무료 관람이 가능한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경복궁은 언제 무료 입장 가능할까요? *




이것만 외우시면 됩니다!

추석이나 설 연휴는 3일!



그 3일중

"설날, 추석 당일만" 

무료입장 가능 합니다.



또 예전에는 1월1일에

무료입장이 됬었는데,


지금은 1월1일 또한

정상 입장료를 지불

하셔야 합니다!




나머지 연휴및 대체 휴일들도

일단 문은 열고 개방합니다만,


"정상 입장료를 지불하셔야"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그 외에는 이럴때

무료입장이 가능해요.


( 한복 미착용 무료 입장 기준!!! )



바로...!





해마다 다르지만

"궁중문화축제" 시즌

5일 정도 무료입장 가능!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서울특별시에서 각종

행사로 인하여 주관할때!


문화재청의 주관으로

무료개방 할때!




################################################




궁중 문화축제 시즌은

반드시 알아두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한해가 지나가면 정책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 그래서 궁중문화축제 기간은 "


그 해마다 반값 요금이냐,

무료 입장이냐가 항상

바뀌므로!!



매해 체크해야 합니다! 



#####################################################



그래서 매년마다

경복궁 홈페이지를

확인하시면 상당히 도움됩니다!




Gyeongbokgung Palace




그리고 언제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


항상 무료로 경복궁을

이용하시고 싶으실 때는,


한복을 착용하시고 방문

하시면 된답니다~!









한복을 입고 경복궁

방문을 할 경우는

언제나 무료입장


정책을

시행중 입니다!


한복입고 가시면

언제나 무료 입니다!




*** 참고 사항 ***





경복궁은 매주 화요일은

무조건 휴일 입니다.


경복궁 휴무일은 화요일!



그러나 설날,

추석 연휴에는!!!


화요일이 껴있어도

무조건 개방합니다.



1월,2월 경복궁 정상입장 시간은

09:00~ 17:00(입장마감은 16:00)

입니다. 추석때는 18시까지 입니다.




***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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