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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인데

 

햇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적어봅니다~!

 

 

 

 

그럼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지 10층 석탑

 

 

경천사지 10층 석탑하고

 

원각사지 10층 석탑하고

 

둘중에 뭐가 오래 됬느냐?

 

 

 

서로 너무 똑같기 때문에

 

되게 햇갈리는데요~!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경천사의 석탑 입니다.

 

 

 

 

 

 

광고도 한번씩만 눌러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굉장히 화려한데요~!

 

 

 

높이 13.5m이며 특이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어요.

 

 


1348년 고려 충목왕때

 

만든 석탑 입니다.

 

고려 후기의 작품입니다.

 

 


국보 86호 입니다.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지금의 탑골공원에

 

만들어진 석탑.

 

 

 

 

크기는 남은 부위만 12m

 

이것도 역시 대리석 입니다.

 

 

 

 

1467년 세조때 만들어진 석탑.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시대 2층 전각!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2층 건축물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석탑 가장 윗쪽의 기록에

 

기록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궁궐하고 매우 가까운데

 

사찰이 있는게 신기하죠?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탄압한 조선시대...

 

 

 

 

그러나 사학도 님들의

 

의견을 하나씩 보면,

 

 

 

 

 

광고도 한번씩만 눌러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의외로 조선시대

 

또한 그렇게까지 심하게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궁궐 근처에서

 

저렇게 미친 화려함을

 

자랑하는 석탑을 가진...

 

 

 


사찰과 석탑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원각사는 한양도성에서

 

꽤나 중요한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경천사 10층 석탑이 만들어진, 14세기 원간섭기 고려시대 건물.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시대별 단청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궁금증에 대한

 

결론은 이것 입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경천사지 석탑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국립중앙 박물관 석탑이

 

먼저 만들어진 석탑~~!

 

이라고 외우시면 됩니다~!

 

 

 

 

탑골공원 석탑이

 

후대에 만든 석탑!

 

수덕사 대웅전 출토, 13세기 고려시대 단청!

여기를 클릭하시면, 수덕사 대웅전 고려시대 단청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탑골공원 원각사 10층 석탑을

 

보고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숭유억불 정책을

 

사용하던 조선시대 초기...

 

 

 


저렇게 화려하고

 

수많은 인력과 시간을

 

동원한 정교한 석탑을,

 

 

 


한양 도성 안에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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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 석탑으로

 

인하여 조선 또한

 

불교를 마구 탄압하지 않았고,

 

 

 

 

상황 봐가면서 때에 따라

 

적당히 다뤘을 것이다~!

 

 

 

 

뭐 이런걸 예측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원각사 10층 석탑 입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 광고도 한번씩만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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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한국인들에게

 

그렇게까지 흔하고 익숙한

 

나무는 아니죠?

 

 

 

 

옆쪽 중국,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는 왜 대나무를~

 

 

 

야산이나 산에서 쉽게

 

볼 수 없는걸까요?

 

 

 

아니,

 

 

 

자생은 하고 있을까요!?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대나무는 서울, 경기 수도권 지방에서 자생 가능한가요?

 

Feat -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어쩌다 가끔씩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 서울 경기 인천같은 수도권 산에서는 "
" 왜 자연산 대나무밭이 없음? 왜 못봄? "

 

 

 

 

이래서 보통은 수도권에

 

대나무가 서식을 못 하는줄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나무, 수도권에 살고 입니다!

 

 

 

 

 


사실 대나무는 서울, 경기도는

 

물론이고 북한 함경도 지방에서

 

자생하는 대나무까지 있습니다~!

 

 

 

 

 

 

즉, 추운지방에 서식하는

 

대나무 종류가 실제로 있고,

 

 

 


전국토에 이게 고루

 

퍼져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수도권에 살면서 산이라던가

 

뒷동산 산책했을때 자생하는

 

야생 대나무를 본적이 없을까요!?

 

 

일단,

 

 

 

대나무의 특성부터 짧게 알아봅시다!

 

대나무는 온대기후, 냉대기후를

 

구별해주는 "풀" 입니다!

 

 

 


근데 왜 대나무는

 

풀일까요?

 

 

 


대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개의 대나무가 나오는,

 

 

 

 

말 그대로 풀같은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5개~10개의 대나무가 나오는거죠.

 

 

 

 

한마디로 대나무는

 

거대풀 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하튼 보통 대나무는

 

따스한 지방에 주로

 

서식하기 때문에~

 

 


겨울날씨가 아주

 

지랄같은 한국에선

 

자생하기가 쉬운 종은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몰려사는 수도권에서

 

더욱 자생하기 쉽지 않죠.

 

 

 


그러나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자생이 쉽지 않지, 자생을 하긴 합니다!

 

 

 

 

 

 

 

 

 

이론적인 대나무의 자생가능 라인은

 

 


태안반도 - 추풍령 - 대관령을

이곳들을 라인으로 잡았을때,

 


이 아랫쪽 라인에서는

 

거대 대나무들이 자생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남부지방에서

 

번성하는 풀이라 그런지~

 

 

 


수도권및 추운지방에서는

 

대나무 군락을 이루는 수준으로

 

자라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한국의 대나무 자생지와 죽림은

 

전남, 경남 지방에 전체의~

 

84%가 몰려있다고 합니다!

 

 

 

 

 

한반도 중부지방 부터는~

 

 

 

대나무 거대 군락을

 

형성시킬 생장환경은

 

일단 아니란 것이죠!

 

 

 

 

일반적인 서울,경기 수도권

 

야산들에서는 대나무가!

 

 

 

 


매~~~~~~우

 

극~~~~~~히 드물게~

 

 

 

 

매우 작은 자생 대나무만

 

희소하게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것 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한국 산림자원에서

 

대나무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0.11 % 정도로, 거의 없다네요.

 

참고로 지금 현재도, 특히

 

서울에서는 야생 대나무가

 

자생중 이라고 합니다!

 

 

 

그 자생종의 이름은

 

"고려 조릿대" 입니다.

 

 

 

이 종은 다 자라면 1m 정도

 

자라는 작은 종 입니다.

 

 

 

 

근데 주목해야 할 점은,

 

요즘 서울에서는 이 작은

 

고려 조릿대가 아닌~

 

 

 

 

훨씬 거대한 10m 넘는

 

대나무가 자생은 아니지만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가

 

이루어 지면서 10m 이상

 

대나무 월동 라인이 무려~!

 

 

 

 

서울시 관악구 도림동


여기까지 올라왔데요!

 

 

 

도림동까지는 대나무가

 

겨울을 날 수 있는 환경이

 

됬다고 합니다!

 

 

 

 

이걸 뒷받침 해 주는게

 

국립중앙박물관 대숲길 대나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겨울을 보내고,

 

 

 


북한산 일대에서 조경용으로

 

키우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겨울을 보냅니다!

 

 

 

 

 

또한, 경기도권에서

 

자생하는 대나무 군락도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보통 부산이나 수목원에서

 

키우는 전봇대만한 대나무를

 

"왕대" 라고 하는데요~!

 

 

 

 

이 대나무는 중국 원산으로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도 화석이

 

발견됬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나무 숲!

 

 

 

 

왕대 대나무는 충청도

 

남쪽에서부터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도권 야산, 동산, 뒷산에선

 

볼 수 없는 종 입니다!

 

 

 

 


경기도 남부쪽, 충청도 남부쪽은

 

10m정도 자라는 대나무도 있다고

 

합니다만,

 

 

 

 

서울 경기서부, 북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은~

 

 

 

 

10m 이상 자라는 대나무가

 

자생할만한 기온은 아니라네요.

 

 

 

 

1m 내외로 자라는

 

고려 조릿대 대나무만

 

아~~~~~~~~~~~주 극히 드물게 있데요.

 

 

북한 함경남도, 평안남도쪽까지

 

자생 가능한 대나무 "고려 조릿대"

 

 

 


이 대나무는 의외로

 

" 한국에만 있는 특산종 " 으로

 

서늘한 기후에 적응한 특산종!

 

 

 

 

이 종류는 제주도 - 함경남도까지

 

자생하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자생가능한 대나무 인데요~!

 

 

 

 

이 조릿대는 대략적으로~

 

1m정도만 자라기 때문에~

 

 

 


발견하기도 쉽지않고,

 

잎사귀도 작고 그냥 가지도 얇고

 

덜 자란 잡초로 보일수도 있데요.

 

고려시대 2층 건물은 이런 모습 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2층 건물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고려 조릿대는 서식 환경도

 

되게 특별한 느낌입니다.

 

뭐랄까 숨어사는 느낌?

 

 

 

 

고려 조릿대 대나무는

 

매우 높디높은 나무의

 

아랫쪽 or 근처에 서식 한데요.

 

 

 

 

즉,

 

 

 

 

응달이면서 습한 곳에

 

서식하고 이런 고목들이

 

서식하는 주변 산기슭에서~

 

 

 

 

아주 희소하게

 

발견된다고 합니다.

 

 

 

 

주변이 습하고 응달이어야 하고

 

주변에 고목들이 있어야 하는 환경.

 

 

 

 

이런 특성 때문에 그냥보면

 

삐짝마른 키만큰 잡초로...

 

보인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수도권 야산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며, 요즘엔

 

약초로 사용한답니다!

 

이런 소형 대나무들만

 

아~~~~~~~~~~주 어쩌다가

 

한번 야산에 있을까 말까해서,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서울

 

수도권쪽 산에는 자생

 

대나무가 아예 없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대나무는 서울, 경기 수도권

 

지방에서 자생을 하기는 하는데,

 

 

 

 

그 모습이 그냥 덜 자란 쪼그만

 

나무 같고, 추운 환경으로 인하여~

 

 

 

 

 

 

1m 정도 자라는 종들만 듬성듬성

 

자생하는데, 이 마저도 극히 드물어서

 

일반적으론 대나무가 아예 없는것으로~

 

 

 

 


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대나무 자체가 애초에 더운

 

지방에서 번성하는 나무가 맞는데,

 

 


서울 경기쪽은 지랄맞게 추워서

 

아무리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대나무 종류라도,

 

 

 


넓은 대나무 군락을 이룰만한

 

자생조건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10m급 대나무가 서서히

 

서울에서 월동까지하며 살아가고

 

인간과 함꼐 더불어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 광고도 한번씩 눌리주시면 굉장히 감사드리겠습니다! *

 

 

 

 

###################################

 

 

10 줄 요약

 

 

 

 

- 일반적으로 수도권에서 대나무가 아예 없는줄로 안다.

 

- 왜냐하면, 실제로 뒷동산 같은곳에 자연산 대나무가 어지간해선 없다.

 

- 사실 없는건 아니다.

 

- 수도권도 대나무가 자생하는데, 1m 내외의 작은 대나무다.

 

- 그 이름은 고려 조릿대. 근데 이 마저도 굉장히 적은 숫자.

 

- 근데 겨울 대나무라 대형 군락지를 만들지 않는다.

 

- 게다가 잎도 작고, 나뭇가지도 갈대마냥 풀같이 생겼다.

 

- 또 극소수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이렇듯 수도권 자생 대나무는 겨울에 적응한 종이라 작다.

 

- 이러한 특성땜에 눈에 잘 안띈다. 그래서 있어도 있는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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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황제의 나라!

 

라고 부르면서...

 

 

 

외교및 나라를 운영하는데

 

황제의 나라에서만 사용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사용하던!

 

 

 

황제국을 표명하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그게 바로 고려 입니다.

 

청자기와를 사용한 고려시대 2.5층 건축물

 

* 참고사항 *

 

 

이 게시물의 사진은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고려시대 건축물 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때 사용하던 건축

 

자료들을 모아모아 만들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전부 저에게 있습니다.

 

 

######################

 

 

 

 

고려시대때 우리는

 

실제로 어디까지 스스로

 

황제국가라고 칭하며 행동했을까요!?

 

 

 

첫번째는 노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풍입송조 라는

 

고려의 노래!

 

 

 

노래 가사에서 우리자신을

 

황제국으로 가르키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노래 거의 처음부터

 

해동천자 라고 칭하는

 

부분이 나온답니다!

 

 


동쪽의 천자, 황제라고

 

우리는 노랫말에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 있는 6.84m 기둥을 적용한 고려시대 주칠 건축물

 


​​그리고 노래 가사에는

 

천지 = 天墀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천자의 궁궐!

 

 

황제나라의 궁궐을

 

뜻하는 한문도 적었습니다.

 

 

 

보통 중국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이 노래는 속악 입니다.

 

 

 


속악이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 고유의 노래라는 뜻.

 

 

 


고려가 만든 노래...

 

우리나라 노래가사에

 

황제라고 정확하게 기록 한 것이죠.

 

 

 

또한 황제의 나라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노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있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출토 조선시대 초기 단청을 적용한 고려시대 팔짝지붕 2.5층 건축물

 

​그리고 고려 성종때

 

원구단을 설치 했었습니다.

 

 

 

원구단은 토지의 신에게

 

예를 올리는 장소로써,

 

 

 

이미 고려때

 

황제의 나라에서만

 

설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 송나라가

 

있는데도 대놓고 설치를 했습니다!

 

 

 

이런것을 맘대로 설치하면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설치를

 

해버린 것 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황제의 나라다!

 

라는 의지가 확고했던 것 이지요.

 

고려시대 팔짝지붕 건축물 ( 연옥장 계열 단청 적용 )

 

또한 의복에서도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대놓고 우리는 황제다~!

 

라는 의복을 사용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오로지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옷을 입었는데요.

 

 


그것은 통천관

자황포 입니다.

 

 

 

고려의 왕들이 실제로

 

착용했었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님이

 

착용하신 바로 그 모자! 입니다.

 

 

 

자황포는 황색옷.

 

황제가 입는 색상의 옷 입니다.

 

 

 

이런 황제를 상징하는

 

색상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고려는 매우 확고하게

 

우리가 황제의 나라다!

 

라는 의식이 있었다는데요.

 


고려 문종때 이야기 입니다.

 

 

 

문종 조상님꼐서

 

군주의 의복색을

신하에게 물어봤는데,

 

 

 

신하는 지금입는 황색,

 

홍색 의복말고는 없다!

 

라고 했다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황색 옷 ( 거의 금색 )

 

이것을 거론하는걸로 봐서,

 

 

 

고려는 우리가 황제다!

 

라는 의식이 매우

 

강했음을 보여줍니다.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의 진정한 모습과 고려시대 당간지주

 

 

그럼 국내에서만

 

우리는 황제다!

 

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외교 자리에서 조차

 

우리가 황제다!

 

 

 

라고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었다고 합니다.

 

 


일단 고려는 조공국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는, 금나라 이전

 

여진족들이나 제주도!

 



탐라에서까지

 

조공사절이 왔었다고 하네요.

 

 


말 그대로 조공을 받치러 왔고,

 

고려는 기록으로 이 사실을

 

남겨놨습니다.

 


고려의 국토 내에서

 

주변국의 조공도 받으며~

 

 

 

마음껏 황제처럼

 

행동했다고 하네요.

 

 

 

또한 고려시대 기록에

 

일본이 고려의 속국~~~!!

 

이라는 기록까지 있었습니다.

 

 

 

조공국 기록, 속국 기록 등등

 

황제나라에서 하는 행동을

 

하던게 고려 입니다.

 

 

 

이렇게 주변 나라들에게

 

조공을 받는것도 모자라!

 

 

 

거란과 송나라 외교관들

 

앞에서도 상당히 당당했습니다!

 

 

 

고려황제는 거란, 송나라

외교관을 맞이할때...

 

 


황제가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으로 외교관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황제며,

 

우리가 주인이다! 라는

 

의미를 가진 서쪽에 자리잡고~

 

 

 


거란, 송나라 외교관들을

 

초대했다고 합니다.

 

 


위치에 따른

 

의미를 이렇습니다.

 

 


왕이 남쪽에 서있으면 : 우리는 제후국

왕이 서쪽에 서있으면 : 우리가 황제다!

 

 


외교관을 맞이하는 방법

 

자체가 황제를 의미하는

 

방식이었으며........

 

 

 

이게 거란과 송나라의

 

외교관을 맞이할때 조차

 

이랬다네요!

 

 


이런것은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수 있어서~

 

 

 

굉장히 신중하게 행동하고

 

접근해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황제다!!!!!!!

 

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팔관회!

 

팔관회는 중요한 국가 연회로써

 

매년 11월 15일에 거행 되었는데요!

 

 


팔관회 자체가

고려의 왕을 황제로

설정하고 축제를 벌이는...

 

 

 

황제와 황제의 나라를

 

기념하는 축제라고 합니다!



팔관회는

 

하늘, 별, 용, 오악, 산, 물의 신에게

예를 올리는 민족의 축제 입니다.

 

 


################################

 

 

 

* 참고사항: 오악이란?

 

 

 

오악= 5개의 민족의 명산.

 

고려떄 5악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네요!

 



지리산, 공산은 대대로

 

내려오던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합니다.


여튼 고려때

 

덕적산, 백악산, 목멱산의

 

산신에 예를 올린 산 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목멱산은

 

지금의 서울 남산!


################################

 

 


...................

 

 


팔관회 자체가

 

고려가 황제의 나라고

 

고려의 왕은 황제다!

 

 

를 만천하에 공표하는

 

수준의 연회였습니다!

 

고려시대 산성모습. 성벽에 성랑을 올려 대략 15m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재미있는것은!



이렇게 고려의 왕은 황제,

 

고려의 국토는 황제국!

 

 

 

이라는 설정을 담아

 

지내는 팔관회.

 

 


이 팔관회는 송나라및 중국쪽

 

외교관들도 다수 참석하는

 

초거대 국가 연회였습니다!

 

 


실제로 송나라, 여진족의

 

외교관들이 많이! 잔뜩!

 

참석 했었다고 해요.

 

 

 

송나라 사람들이 있는데도

대놓고 고려의 왕은 황제!

 



이걸 알리는 행사를 열고

 

기념했다는 것 이지요!

 

 

 

 

..................

 

 

 


알게 모르게...

 

국제 외교관들이 참석하는

 

자리에서 대놓고 우리가 황제!

 

 

 


라고 말은 안해도

 

몸으로 표현하며

 

별별짓을 다 하던게 고려!

 

 

 

우리가 황제의 나라다!

 

라는 주체성을 상당히

 

표현하며 보여주던게 고려 입니다!

 

주칠을 섞은 옻칠 기둥과, 흑유 기와라는 유약 기와를 적용한 고려시대 2층 건축물

 

 

​연호도 우리만의 연호를

 

사용하던게 고려시대 입니다!


 

연호는 세종 10년 or

 

일본 날짜를 보면

 

헤이와 20년.......

 

 

 

뭐 이런게 있죠?

 

세종대왕의 10년째 되는 해

 

뭐 이런건데요~!

 

 

 

연호는 일반적으로

 

자기들을 황제국이라고

 

설정을 할때, 독자 연호를 사용합니다.

 

 

 

동아시아는 보통 중국 황제의

 

연호를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우리만의 연호를

 

사용했지요!



천수, 광덕, 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요~!



이때가 고려초기

 

시절이라고 하네요.

 

 

 

고려는 무조건 중국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황제로 설정했다는!

 

 

 

황제 국가를 지향하는

 

목적과 주체성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그리고 만월대 안에는

 

자그마한 별궁들이

 

있었다는데요!

 

 

 

별궁들의 이름은

계림, 낙랑, 조선, 금관 등등...

 

 

 

고려 이전 국가들의

 

이름을 별궁들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려가 이 나라들을

 

거느린 황제국! 이라는 뜻!!!!!!!

 

 


그리고 수도의 이름에서

 

우리의 황제 의식을 다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수도는 개경.

 

수도 개경이라는 뜻은

 

성을 열다! 라는 뜻인데요~!

 

 

 

 

개경은 여러가지 이름이 있었고

 

송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세간에서는

 

황도 라고도 불렀답니다.

 

황도 = 황제의 도시 라는뜻!

 

 

 


외교관및 외국에서 쉽게

 

기록할 수 있는 도시이름부터...

 

 


민간에선 황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었습니다!

 

 


송나라, 거란이 있지만

 

아주 당당하게 우리의

 

주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생각대로 실행하고

 

자유로이 도시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국내 유일 고려시대 초기 건축물 모습을 알 수 있는, 실제 고려시대 유물인 금동삼존불감 실사화 건축물

 

고려는 주변국들도 고려를

 

황제의 나라로 느낄수 있게~

 

 

여러가지 행동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고려는 이렇게 자신들을

 

황제로 만들어 나갔으며,

 

 

실제로 황제의 나라에 걸맞는

 

여러가지 행동을 행하였고,

 

 

왕을 황제로 설정하고 그것을

 

대놓고 공표하지는 않아도...

 

 

누가 봐도 우리가 황제다~!!!!!!!!

 

를 알 수 있게 행동하고 다니며~

 

 

우리만의 주권과 주체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실행하던...!!

 

 

우리나라 최고 전성기

 

나라중 하나 였습니다!

 

대략 7m 외부기둥을 적용한 고려시대 건축물

 

 

외왕내제로 유명한 고려이지만

 

외교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부분들,

 

 

 

혹은 기록으로 쉽게

 

남길 수 있는 그런 부분들~

 

 

 

그리고 외국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각종 부분들을.....

 

 

 

모조리 황제와 관련된

 

양식과 이름을 사용하여,

 

 

 

외왕내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가 황제다!

 

 

 

를 마구마구

 

뽐내고 다닌......

 

 

 

대한민국 마지막 가장

 

커다란 주권을 가진

 

황제의 나라였습니다.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역사상 진정한

 

마지막 황제의 국가는~!

 

 

 

고려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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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의 어원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고려시대가 아닌 삼국시대,

조선시대는 개성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이제부터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삼국시대 개성시

 

​- 고구려 -

 

 

 

98세까지 장수하신!!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개성시는 고구려의

영토가 됩니다.

 

고구려 시절 개성의

이름은 조금 다른데요~!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

이었습니다.

이 시절 개성은

동비홀과 부소갑!

 

두가지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요~!

모두가 "송악산"

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금의

개성 최고 핫플레이스!!!!!

 

그곳이 바로

송악산이었나 봅니다.

 

 

참고로 부소갑은 부소압

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2층 누각. 고려청자 기와, 배흘림기둥, 3층같은 2층 등등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2층 건물입니다.

 

 

또한 동비홀은 조금더

독특한 우리 고유의 언어로

만들어진 단어인데요,

 

고구려 당시 발음~!

동비홀 발음을 예측하면,

 

"도비구루 or 두비구루"

 

로 예측이 된다고 하네요.

 

동비홀은

도비구루를

한문으로 적은것!

 

 

그리고 동비홀은 송악산

보다는 지금의 개성시

도심쪽을 뜻하는...

 

것으로 더욱 가깝게

예측한다고 하네요.

 

 

 

 

 

- 백제 -

 

개성시는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습니다.

청목산 혹은

​청목령(靑木嶺)

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청목산은 송악산을

백제쪽에서 부르던 말!

 

 

신기하죠!?

 

 

고구려나 백제나

송악산을 기준으로

마을 이름을 만들었네요!

 

 

 

 

 

 

2. 통일신라 ( 개성시의 어원 )

 

 

 

통일신라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이 됩니다.

부소갑은

송악군(松岳郡)이 됩니다.

 

 

 

드디어!!!!!

 

 

 

 

이때쯤 되서야

개성이 나옵니다!

 

송악산도 이때부터

출현하게 된답니다!

 

개성(開成)의 뜻은

“성을 연다”라는 의미이며!

고구려 동비홀의 의미를

계승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송악군은

송악산(松岳山)

뜻풀이 그대로~

 

“소나무가 있는 큰 산”

이라는 의미이며!

 

부소갑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 된다고 하네요.

 

 

 

개성시, 그리고 송악산

모두 어원의 시작은

통일신라 입니다~!

 

...

 

 

재미있는 사실 하나~!​

개성시의 지명들 대부분은

“열린 성”이라는 의미

 

or

 

송악산으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 입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

고려 초기는 처음에

송악군으로 시작했어요.

 

개성은 송악군에

들어있는 현.

 

(지금의 ~~동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듯 합니다!)

 

고려 초기는

개성보다 송악군이

훨씬 큰 행정기관 이었어요.

 

그러다가 919년 드디어

송악과 개성이 합쳐져서

개주가 설치됩니다.

 

( 송악에 속한 개성이 아닌 )

( 개성까지 송악이 된 그런것 )

( 서로 퓨전해서 개주가 됨 )

 

그리고 드디어!

개주로 쭈욱 지내다가~

 

995년에 "개성부"

이름이 바뀝니다~!

 

 

 

만...

 

1018년 현종때

개성부->다시 송악현

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봉정사 극락전 출토 12세기 고려시대 단청을 적용한 고려시대 2층 건물

 

 

아마 이때 송악현

개성현은 동등한~

 

크기의 행정기관으로

따로따로 나누어집니다.

 

이때쯤은 지금의

의정부시, 포천시

마냥 다른 동네였죠.​

그러다 1062년에 개성현이

한레벨 높은 개성부로 렙업!

1308년 개성부가

송악현 까지 차츰

관장하면서~

 

결국 송악현도 개성부로

불리게 되었다네요.

 

 

1308년에 우리에게

익숙한 개성시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개성시 안에

송악산, 송악군 다 들어있는 형태 )

 

 

............

 

 

고려시대 또한

개성부는 여러가지

이름이 있었습니다!

개경(開京), 황도(皇都), 황성(皇城), 경도(京都), 송도(松都) 등등

​이런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쯤 되면 이제

 

개경(開京), 송악(松岳),

송도(松都), 송경(松京) 중경(中京)

등등~ 역사 많이 배우신

분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조선시대때는 1438년에

개성부가 또 다시 설치되서~

개성부 개성군으로

쭉~~~~~이렇게

불리게 됩니다.

 

 

 

 

 

 

 

5. 조선후기

 

 

1896년에 경기도로

잠깐 환원. 그러다 1년뒤!

 

1897때는 완전히

경기도 개성군이 됩니다.

 

이때 드디어 경기도

편입하게 됩니다~!

 

어떠한 행정기관에 속하지

않은 거대한 행정기관인!

 

개성군 타이틀을 거의

450년에 가깝게 유지하다가~

 

그러다 1897년 드디어

훨씬 큰 행정기관에~

통합된 것이죠.

 

또한 개성은!

 

조선의 거의 모든 시간동안

개성시 이 하나의 이름으로

굉장히 오래 유지됬습니다.

 

 

 

 

 

 

6. 구한말-현대

구한말쯤인 1914년

개성군은 렙업을 합니다.

 

1914년

개성군, 풍덕군을 통합해

개성군을 또다시 합쳐요.

 

개성이 영토 확장을

하게 된 것이랍니다!

 

근대 또 바뀝니다!

 

사실상 조선시대때

사용하던 "개성부"

1930년 송도면이

개성부로 렙업합니다!

 

개성부가 또다시

생겨나면서~

 

1914년 개성군은

개풍군으로 이름이

또 바뀌게 됩니다..!

 

 

신기한것은,

 

 

송악과 개성은 자기들끼리

계속 이름을 교환하며 바꿉니다!

 

허허~~

 

 

또한 항상 송악산이

중심축에 속하는듯.

 

예나 지금이나 송악산이

엄청난 랜드마크 인듯!

 

고려시대 2층 건물의 더 많은 사진을 보고 싶으시면

여기를 클릭하셔서, 링크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1949년 남한, 북한이

각자의 정부를 수립하며

개성은 이름이 또 바뀝니다.

1949년은 경기도가 미친

레벨업을 하면서부터~

 

 

1949년 드디어

경기도 개성시가 됩니다.

 

그 후 북한은 1955년 1월

개성직할시로 최강 레벨업

시켜줍니다!

 

개성직할시로

잘 지내다가 2003년이 되서야

황해북도로 개성시는 통합됩니다.

 

.....

 

 

우리한테 그나마 친숙한

황해북도 개성시는 사실~

 

고작 17년밖에 안되었다는것!

 

아무튼

앞으로 우리도 개성시를

마음편하게 다닐수 있는~

 

그러한 평화로운 세상이

빨리 다가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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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마시는

수돗물 아리수!!

 

당췌 이 아리수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아리수는 한강의

또다른 이름인데요!

 

이 아리수 라는 이름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사용했을까요?

 

이제부터 알아봅시다!

 

 

 

 

 

- 한강의 이름은 왜 아리수 일까요? 그리고 역대 한강의 이름을 알아봅시다 -

 

 

 

 

아리수는 사실

고구려가 사용한

이름 입니다!

 

고구려는 3세기쯤부터

한강을 "아리수"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 광개토대왕비 -

 

여기에 아리수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아리수의 어원과

기원은 바로 여기!

 

광개토대왕비가

출저라는 것!!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하네요.

 

 

###################################

광개토대왕이

 

아리수를 건너

백제를 정복했다!!!

 

 

###################################

 

 

요로코롬 써있다네요!

 

여러가지 정황상

한강을 가르키는 말은

100%에 가깝다고 하네요.

 

 

그러나!

 

사실...

 

 

아리수가 확실하게

한강의 이름인지,

 

그냥 거대한 강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배흘림기둥과 고구려 단청을 사용한 3~5세기

길이 50m 고구려 팔작지붕 건축물.

북한에서 가로 50m급 고구려 건물터가 발겼되었습니다!

 

 

 

 

왜 아리수가

한강을 뜻하는지

그냥 거대한 강을 뜻하는지,

 

왜 자세히 모르냐면!

 

​아리수는 한문으로

阿利水 이렇게 써있데요.

 

 

 

########################################

 

삼국시대 당시 아리의 뜻은

" 크다 or 물 " 이라고 예상합니다

 

 

 

아리= 크다or길다or물

가람= 강

 

근데 아리...뒤에

요게 붙어있지요!

 

#########################################

 

 

 

 

아리수는

그냥 써있는데로 해석하면,

 

물물 or 많은 물 or 큰물

이런식으로 해석이 된다네요.

 

​그래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

사람들은 한강을 보고~

 

그냥 물물 이런식으로

부른거 아닐까 라고...

예상을 합니다.

 

( 동의반복 어구 )

 

 

한강공원에 고구려 건물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겁니다!

 

 

 

 

아무튼

그 당시 백제는 한강

주변에 한성이 있었죠.

 

 

 

그래서 아리수를 건넜다!

이 내용은 거의 100프로~

 

한​강을 건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뭐가 어찌됬든간에

한강을 보고나서~

 

강북 쪽에서 강남 위례쪽을

쳐들어갈때 아리수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런 해석을 한다고

합니다!

 

 

 

#######################################

 

 

한강보고

" 큰강을 건넜다! "

 

라고 해석하면 그냥

물을 가르키게 되는거고,

 

 

" 한강을 건넜다! "

라고 해석하면 말그대로

아리수가 한강의 진짜 이름!

 

 

########################################

 

 

 

 

아무튼 자료부족으로

아직은 이렇게 두가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77년간 위례성이건

북한산이건 모조리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

 

 

장수왕이 98까지 살았는데

장수왕 인생의 8/1 시간동안,

 

강남,송파,종로 할거없이

모조리 고구려 땅!

 

 

 

 

지금의 서울은

1945 대한독립부터

2020년 지금까지의 시간!

 

이 정도의 기간동안

서울 전 지역이 모두

고구려 땅 이었습니다!

 

 

한강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고구려 건축물을 이렇게 재현해보는것도 좋지 않을까요!?

 

 

 

두번째 가설!

 

 

아주 옛날에는

​한강을 보고 "아리가람"

 

낙동강을 보고도 "아리가람"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두만강을 보고도

보고도 " 아리가람 "

이라고 말했답니다.

 

 

 

아주 옛날 큰 강을

민간인들이 부르던 이름은

아리가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뭔가 아리수와 아주

굉장히 비슷하지요!?

 

이 처럼 아리가람은

그냥 크고 길다란 강을

표현하는 순 우리말인데...

 

고구려가 한강 보고

아리수라고 불렀죠!?

 

그래서!!

 

아리수는 아리가람과

비슷하기 때문에,

 

아리수를 그냥 큰강!

으로 부른것으로 해석

한다고 합니다.

 

단어의 연관성이 큰강을

뜻하는 아리가람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죠!

 

한강은 77년간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건물을 재현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아리수의 어원

그 세번째!

 

일본서기에 기록되

있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 적혀있기를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

라고 써있는데....

이 단어는 한강을

뜻할수도 있고,

 

경주의 알천 or

그냥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도 예상한다네요.

 

 

이런 모호함이 있지만,

 

이 아리나례하라는 단어가

아리수와 매우 흡사한데!!!

 

경주의 하천 이름인 알천과

매우 흡사하기도 한답니다.

 

 

이래서 아리수를 보고

한강의 이름이다!

 

라고 해석할 여지가 매우

상당히 많은 것 입니다.

 

 

 

 

뭐가 어찌됬든!!

 

 

 

 

서울시에서 항상 사용하는

마시는 수돗물 아리수는!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순 우리말이라는 사실과~

 

한강을 일컫는 단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여의도 여의나루역 근처 한강 시민공원에

고구려 건축물을 만들면 이런 느낌일겁니다!

 

의외로 서울시는 고구려

영토였던 기간이 77년이라~

 

충분히 고구려 건축물을

만들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있어요!

 

 

이렇게 무조건 100% 복원만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양식들을

창작, 활용만 잘해도 상당히 멋진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고,

 

우리의 사라진 전통을 다시

이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구려및 삼국시대 건축물 CG사진을

더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 삼국시대-고려-조선까지 한강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허리띠 처럼 둘렀다고 해서...

 

삼국에서 통합적으론

"대수" 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데요!

 

 

 

그럼 고구려 말고

다른 나라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렀을까요?

 

여의도 한강공원 캠핑장에 크기 50m 고구려 건축물이 있다면 캠핑 시설로 사용해도 좋을듯 합니다!

 

 

 

################################################

 

 

 

 

백제 시조 온조왕때: 한수

그 후 백제의 한강 이름 : 욱리하

 

백제 온조왕때쯤 이미

한강과 거의 같은 이름인

"한수"로 불렀습니다.

 

이게 "한강"의 어원의

유래라고 보고있답니다!

 

 

 

​###########################################

 

 

삼국시대 신라의 한강 이름;

 

한강 상류를 이하,

한강 하류를 왕봉하.

또 다른 기록에서는

한산하, 북독 이라고 부름.

 

 

##############################################

 

금으로 만든 어룡치미, 금동토수, 고려청자 기와를 얹은 고려시대 2층 건축물

 

고려시대 한강의 이름;

열수, 사평도, 사리진

 

 

한강의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강!

 

이라는 뜻의 열수.

모래가 많아

사평도 라고 했다네요!

조선시대때는

경강이라고도

일컬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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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관심없거나 전통주에

관심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3가지가 댕~췌 뭐가

다른지 별로 알지 못하죠!?

 

그래서 한번 알아봅시다!

 

 

 

막걸리, 동동주, 탁주의 차이점

그리고 다른점을 알아봅시다~!

 

 

 

* 가장 아랫쪽 결론을 읽으시면

더욱 쉽게 다른점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

 

 

 

 

 

1. 탁주에 대하여

 

 

탁주는

흐릴탁(濁)에 술주(酒)를

사용하며 일본에서도~

 

탁주라는 한문을

사용하고 있는 등,

탁주는 뿌옇고 흐린 술을

포괄적으로 이르는말 입니다.

막걸리는 맑은 술은

아니니까 탁주에 속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비유를

할 수 있답니다~!

 

한국안에 서울이 있듯이,

탁주안에 막걸리가 있어요.

 

쉽죠!?

 

 

 

단어 자체가 일본도 사용하고

한국도 옛날부터 사용하는 등,

 

탁주라는 단어는 그냥

흐린 술의 대분류 입니다!

 

술->청주or탁주->막걸리

이러한 큰 카테고리!

 

그러나 탁주라고는 막걸리만

남은 수준인 한국에서는~

 

결국 거의 막걸리를

칭하는 단어가 됩니다.

 

 

 

 

 

​2. 막걸리에 대하여

 

막걸리는 말그대로

구멍이 엉성항 체에~~~

 

마구 걸러내서

만든 술 입니다.

 

여하튼 탁주는 흐린술을

통칭하여 부르는데요~!

 

보통 대중적인 탁주라고는

막걸리밖에 없어서 탁주=막걸리.

이렇게 됬습니다.

아무튼 막걸리는 그냥

서민들만 부르던 이름인데,

일제가 주세령을 발령합니다.

 

일제시대 만들어진 일본 가옥들

 

 

 

이 주세법은~

 

일제가 물탄 탁주와

물 안탄 탁주를 구분해서!

 

각 부분별 세금화 계획하에

만들게 된 세금법 입니다~!

일제 땜에 쌀이 조금씩

부족해지자 물을 타서 만든걸...

 

어뜨케든 세금 더 뜯을려고!!

일제는 막걸리라는 명칭을

완전 공식화 시키게 됩니다.

 

이때부터 막걸리라는

이름이 대표 이름으로써

여기까지 온거라 예측한다네요.

 

 

즉 탁주는 흐린술을

모조리 통칭하는 말,

 

막걸리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술지게미 마구 털어

물 섞은 술을,

세금 뜯으려는 일제가

이름 붙인게 공식화되서~

 

오늘날까지 온 것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려시대는 흑유와 라는 아주 새깜한 유리기와를 사용했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흑유와 2층 건축물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2-2 막걸리의 어원과 막걸리의 유래를 알아봅시다.

 

막걸리는 고려시대

부터 그 존재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서긍의 고려도경

(1123년 만듬)

 

여기에 막걸리로 예상

되는 술이 기록되

있다고 하네요.

 

고려 서민들은

빛깔 짙은 맛이

탁한 술을 마신다.

 

라고 적었다네요.

막걸리와 매우 매칭되므로

이걸 막걸리로 보고있는 것!

높이 20m에 근접하는 고려시대 2층 누각 ( 근정전이 22m )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2층건물 높이에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고려시대 남아있는

기록으로써는~

고려 후기때는

백주라고 하였는데,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쓴

백주시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이 내용을 보면,

 

백주 or 박주

라고 했다네요. 

( 동국이상국집: 1241년 출간)

흰색이라 백주,

술 도수가 약해 박주.

뭐 이렇게 예상하고 있답니다.

 

고려시대 기록에 의거한대로 기둥길이를 조절해 만들어본 고려시대 전각

 

 

백주시 내용;

 

요새 벼슬에서 물러나서

녹봉이 줄어든 탓에...

 

맑은 술을 계속 못 마신다.

 

하는 수 없이 백주를

마시는데 빨리 취해서

기분 드러~

라는 글이라네요!

 

조선시대때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고 하네요.

 

굉장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답니다~!

 

농주, 혼돈주, 노주 등등

 

노인들이 마셔서 노주,

농부들이 주로 마셔서 농주,

​혼탁한 술이라는 혼돈주 등등...

 

그러다가

드디어!

 

조선시대 후기!!!!!

 

 

막걸리라는 이름이

한글로써 등장한다네요!

 

조선 후기 광물재보 라는

책에 막걸니 라는 글을

한글로 표기했데요.

 

​막 걸러 만든 술이라

막걸리라고 예상한답니다.

 

진짜 막걸러서 대충 물타서

술지게미랑 먹는 술이니까요!

 

그래서~

 

조선시대 후기에는

서민들이 이미 막걸니 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네요!

 

고려시대 불교회화에 그려진 그림과 기록대로 복원해본 고려시대 주칠옻칠 2층 누각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2층 건축물 높이에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3. 동동주에 대하여

 

 

사실 동동주는 막걸리긴

한데 막걸리가 아닌 뭐...

그런 술 입니다.

동동주는 사실

청하,소주와 같이~

 

청주에 속합니다.

(맑은 술에 속해요)

 

왜냐하면!!!!!!!!!

 

 

​막걸리나 동동주나

중간 이상 까지는~

 

만드는법이 같다고

합니다.

 

고려시대는 청자 사발에 백주or막걸리를 마셨겠죠??

동동주는 청주로써

술지게미 (막걸리 찌꺼기들)

하고 안 섞습니다.

 

윗쪽 맑은 술하고 식혜같이

풍미를 위한 쌀알만

약~간 퍼담을 뿐,

 

맑은 술만 퍼 담아

마시므로 청주 입니다.

 

근데 막걸리를 기초로

만들어지는 술 입니다.

 

그래서 막걸리이기는 한데

막걸리가 아닌 청주 입니다. 

동동주는 삭힌 밥알이

동동 떠올라서 동동주

라고 합니다.

동동주는 경기도 지방

민속주며 도수는 6~10도 정도.

진짜 제대로 만든 동동주는

​생긴거도 맛도 식혜와 같고

살짝 달달하면서~

감칠맛도 있고

구수한 삭힌 쌀알의

풍미도 좋은데다가~

 

탄산도 있어요.

그래서 맛도 좋은

라이스 와인 같은 느낌!

 

고려시대 산성모습. 고려시대는 산성 성벽에 성랑을 설치하여 높이 12~15m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산성방어물 성랑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동동주는~

 

맛있는데다가 도수가 약해

취할줄 모르고 술술 마시다~

 

눈 떠보면 술에 쩔어 아침에

숙취를 즐길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악한 녀석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맛도 뭔가 살~짝

음료같기도 한데 알콜이

느껴지는 그런 맛좋은 맛!

 

 

#####################################

 

 

막걸리 도수, 동동주 도수, 청주 도수

 

 

막걸리는 일반적으로 6도 입니다.

 

막걸리의 제왕 장수막걸리가 6도 입니다!

 

 

 

 

동동주는 일반적으로 10도 정도.

 

술마다 6도 동동주도 있고 조금씩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청주는 일반적으로 14도 입니다!

 

청주의 대표 청하가 14도 였는데

 

젊은층을 공략하려고 최근에 13도 입니다!

 

 

 

그외 참이슬 프레쉬 17도, 참이슬 오리진 20.1 도

 

진로 16.9 도, 처음처럼 17도, 처음처럼 순한 16.5도

 

 

라고 합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청자정 누각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

 

### 결론 ###

 

- 탁주와 막걸리, 동동주는

이렇게 비유하면 된다

 

-탁주: 서울시

막걸리: 서울시 종로구

동동주: 서울 종로구 - 청운동

 

- 막걸리는 탁주안에 속한다.

동동주는 청주에 속한다.

 

- 근데 동동주는 막걸리 윗쪽만

떠서 만든 술이다

 

- 동동주는 탁주로 만든거다. 청주지만.

동네는 다르지만 행정기관은 똑같다.

 

- 한국에서 탁주는 막걸리만 있어서

탁주가 막걸리를 칭하는 말이 됨.

 

 

* 광고도 한번씩만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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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초거대 도시 메가시티!

서울!

 

서울은 도대체 언제부터

서울이라고 불리었으며~

 

또 옛날에는 서울의

이름은 어땟을까요?

 

이제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서울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1.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하여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관해 학계에서는~

 

삼국시대 신라시절

부터로 보고 있데요.

 

신라 박혁거세왕 시절

내용을 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등등 이러한 이름으로

사용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서라벌"

 

이게 이미 박혁거세왕 시절

사용하고 있었던 이름 입니다!

 

 

나라 이름으로 쓰다가

이후 서벌 같은 이름들은,

 

도읍(도시)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벌, 서라벌 계열

이름들은 수도(京 : 경)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한 나라의 왕궁 도성을

서라벌-서벌-서울로 변화

해가며 부른것으로...

 

예측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고 예측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시대때는

지금의 서울시를 어떻게

부르고 있었을까요!?

 

 

 

2 . 삼국시대, 고려시대 서울은 어떤 이름이었을까요?

 

 

 

* 고구려 *

 

3~5세기 고구려 건축물

 

보통 우리는 고구려는

무조껀 북한쪽 나라!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울 전체가 고구려 영토!

 

 

강북-종로-강남

전부다 고구려의

영토 였습니다! 77년간.

 

 

고구려보고.....

 

한국의 역사 아니고

만주나 북한쪽의

역사다!!!!!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고구려는 지금 서울

노른자 땅까지 먹었고

 

요동성 고구려인 조차

나는 요동 사는 삼한인!

 

 

이라고 할만큼 한민족

역사 맞습니다!

 

 

게다가!

 

 

전라도 제외하면

우리나라 남한 대부분은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지금의 평택, 포항도 고구려 땅!)

 

 

 

고구려 또한 한강을

상당히 중요하고 좋은

지역으로 생각한거 같아요.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남하를 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산 부근의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요.

 

종로,은평,강북,

북한산 근처들을

 

"한산군"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 이후는~

 

 

이 지역을 남평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즉 지금의 서울은

평양이었습니다.

 

7세기 고구려 건축물 = 삼국 모두 비슷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남평양!

 

수도가 평양인데 남평양

이라는 호칭을 지금의~

 

종로, 강북,

북한산~ 은평구쪽이

그 이름을 획득한것~!

 

 

삼국시대부터...

한강은 매우 중요하고!

또 상징적인 장소였나봐요.

 

 

게다가 북한산,

남한산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한산"이라는 이름을

이때부터 사용 했다네요!

 

 

 

 

* 백제 *

 

삼국시대 서울은

백제의 도시로써

가장 유명하죠?

 

백제 온조왕 때

(기원전 18년)부터

제21대 개로왕 때(475년)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습니다만,

 

또 그렇다고 지금의 서울

전체를 먹은건 아니었고~!

 

지금의 강남구와 위례쪽이

기반 지역 이었습니다~!

 

발굴된 토성을 기초로 상상으로 만든, 토성안의 녹유와를 잔뜩 사용한 백제 건축물들

 

오늘날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의

왕성 ( 수도 ) 였고,

 

그 당시 백제에서

말하던 서울의 이름은~!

 

위례성.

혹은 한성.

 

" 이 한성이라는 이름은 "

" 나중에 구한말까지 씁니다 "

" 한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오래됬어요 ! "

 

처음엔 백제는

신주(新州) 이름을

북한산주로 이름을 바꿨는데,

그러다 지금의 서울쪽을

계속 북한산주, 남천주

(남천: 이천시 옛날 이름)

 

이름들로 계속 통폐합

하다가 드디어~!

 

한강 유역을

한산주(남한산주)로

완전 정했다고 합니다.

 

 

 

* 신라 *

 

통줄눈 전축기단 통일신라 건축물

그렇다면 삼국시대

신라는 서울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먹습니다!

 

한강 주위에 신주(新州)를

설치 하였습니다.

 

신주는 지금의 부천쪽

도시였는데, 확장되서

한강까지 신주가 된 것이죠.

 

(552년)

​이때는 기록상 잘 모르는데

선덕왕 때에는 드디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나

지금의 한강 유역,

 

즉 서울을 삼국시대 신라는

한산주(漢山州)로 개칭(637년),

 

이 이름을 계속 사용합니다!

 

신라도 이미 북한산, 남한산

등등 상당히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럼 통일신라때는

지금의 서울을 어떻게

부르고 있었을까요?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는데

경덕왕때는 지금의 서울,

 

즉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바꿉니다.

(757년 일이에요) 

 

 

 

그러다 지금의 은평, 종로, 강북

권역인 한강 윗쪽 지역을 통틀어

"한양군"

 

으로 바꿉니다.

 

한양이 통일신라부터

사용된 이름이라는것!

 

 

 

 

* 고려 초기 *

 

 

고려시대 산성, 성랑이라는 건축물을 올려 산성 성벽이 13~15m 높이 입니다.

 

그럼 고려시대때는

지금의 서울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매우 놀랍지만!!!!!!!

 

고려시대 초기 서울은

양주(楊州)라는 이름

이었어요.

 

지금의 서울을 양주로

불렀는데 지금의 양주의

이름의 어원이 되지 않았을까요..!?

 

즉 서울은 양주였습니다!

 

 

그 후 고려 문종때 드디어

우리한테 유명한 남경(南京)

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 이때가 1067년 )

 

고려시대 쌍하앙 2층 누각

 

지금의 서울,

 

 

남경은 신생 도시로써

당시에 피난온 거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만들고

살던 도시라고 합니다.

 

( 만주족과 우리나라는 참으로 많이 엮여 있네요 )

 

고려 불교회화를 최대한 보이는데로 만들어본 고려 중후기 2층 누각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는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게 되는데요!

 

이때 또다시 이름이

한양부(漢陽府)로 바꿉니다.

(이때가 1308)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한양이라는 이름이 있던것이죠!

 

 

지금의 서울은 되게 특이한게

상당히 비슷한 이름을 삼국시대

부터 주구장창 사용합니다!

 

한산주

한주

한양

 

등등.....

 

지금의 서울은 거의 무조건

"한" 자가 들어가네요...!!

 

 

경복궁 근정전, 가로:31m 세로:21m 높이:22m

막간을 이용한

재미있는 역사 지식!!

 

고려시대 서울은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궁궐을 하나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그 위치가

지금의 경복궁이라고 하네요!!!!!!!!!

 

즉,

 

지금의 경복궁은

고려시대 궁궐터!

 

 

그래서 경복궁 발굴하면,

고려시대 관련 물품들이

발견될수도 있고...

 

실제로 경복궁에서

청자 계열 보물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경복궁 향원정

 

사서 기록으로 유추해볼때,

 

고려가 세운 서울 궁궐은

지금의 향원정 서쪽 언덕

부근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이쯤되면 확실히 경복궁터가...

옛날부터 중요하긴 했나봐요!!

 

 

봉정사 극락전 출토 고려시대 초기~중반기 오채편장형 단청

 

​재미있는 역사 지식 2!

 

한양은 과연 조선시대부터

사용한 수도였을까요!?

 

수도로써 서울은

고려시대때 이미 수도였습니다!

 

딱 6개월이었지만요....허허

 

 

1382년 9월에

개경성에서 한양 천도,

즉 수도 이전 했습니다.

 

이미 조선 이전에

잠깐인데 고려수도 였고,

이름마저 한양이었어요.

 

그러나 하도 지럴들을 해서

6개월만에 다시 개성으로 ㅌㅌ

 

 

근데 그 이후로도 계속

수도 이전 대상 부지로써

지금의 서울이 계속 거론됬다네요!

 

 

 

 

* 조선 *

 

결국 끈임없이 서울로

천도를 거론 하다가 결국~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금의 서울,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됨!

 

(1394년 조선의 시작)

 

이때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고 해요.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한양도성이 아니라 한성부 였습니다.

 

한양이나 서울이란 이름은

그냥 민간들에서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시대는

민간인들 대다수가

서울이라고 불렀다네요!

 

 

용비어천가 1447년 기록에

수도를 서울로 표현 했으며~

 

15세기에 편찬된 "훈몽자회" 에서

수도를 뜻하는 京 경을 셔울로 풀이 했데요.

 

이 경은 서울 경 입니다.

이미 조선초 15세기 부터

한양을 서울로 부른것 입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때 지금의 서울

지역의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경도, 경부, 경사, 경성, 경조, 수선 등등

 

 

 

당시 만들어진 고지도나

문집 등에는 한양, 경도, 경성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데요.

 

 

 

 

* 일제시대 *

 

 

일제시대때 단어로 각인되있는

 

"경성"

 

 

이 이름은 조선 후기때 이미

민간에서 간간히 사용되었던

서울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인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

 

경기도에

​예속된 하위 관청으로써...

 

지금의 부천, 의정부마냥

경기도에 속한 도시로

바꿔버립니다.

 

(지들이 하던 도쿄도 이걸 한국에 함)

그리고 이름을

민간에서 사용하던

경성을 그대로 사용,

 

대외적인 정식 명칭은

일본어 발음인 케이조로 변경됨.

 

( 서울=경성=케이조 )

 

 

 

 

 

* 독립 이후 대한민국 *

 

해방 직후는

신기한게 서울을

서울, 경성, 한성 등등~

 

부르는 사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네요.

심지어 정부 표기와

서울시 자체 표기가

다를 때도 있었다고...;;

그러다가 1년 후인

1946년 8월 15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 변경!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

 

즉 경기도에서 탈피하여

드디어 대한민국 수도로써

독립을 합니다!

 

그러다가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가 됩니다.

서울 만세!!!!!

 

 

아파트집값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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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고려 병력 20만 이상

요 10만 이상 평야에서

1:1 총력 전투 대회전 입니다.

 

 

###############################

 

* 전투에서 대회전 이란?

 

 

 

특정한 날 두개의 진영이

근접전및 각종 공격으로

이뤄지는 1:1 한타 전면전.

 

둘다 물러서지 않고 1:1로

근접, 기병, 화살 등등 각종

무기로 전투하는것!

 

#############################

 

이 전쟁으로

요나라는 고려에게

10만대군이 거의 전멸하여,

 

다시는 고려를 무시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못했으며,

 

살수 대첩, 행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리우는 전투 입니다.

기마민족으로만 이루어진 오랑캐

거란을 1:1 맞짱으로 대완승을 거둔,

 

"우리나라 최후의 1:1 한타전 전투"

승리라서 더욱 의미있는 전투라고

합니다.

 

고려시대 산성 성문과 산성성벽 강화 건축물 성랑

 

요나라는 왜 고려를

쳐들어 왔을까요?

 

요나라 (거란)은 애초부터 고려와

거리를 둘 수 박에 없었어요.

거란이 발해를 점령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고려한테...

 

계속 땅 내노으라고

처들어 왓거덩요.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로써

고구려 옛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북진 정책이 기본이라서,

거란하고는 당연히

이견이 있을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거란은 슬슬

별 지랄같은 이유로

처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처음 공격은 993년

고려가 방어에 성공,

 

요나라는 1차 이런 시부럴

을 외치며 계속 주구장장~!

 

"협상하자 ㅅㅂ 협상장으로 나오셈!ㅅㅂ"

지럴지럴 시전을 하게 됨미다.

 

거란은 배후를 안정

시키기고 싶어했어요.

 

배후 안정을 위해서

거란의 소손녕이 끈임없이

회담하자 회담하자 시부렁 거렸고,

 

전투 보다는 협상 ㄱㄱ 시그널을

알아챈 고려는 결국 협상을 했어요.

 

 

서희 장군님꼐서 담판을 지으셨고,

결국 담판에서 승리를 거두시며...!!

 

결국 우리 고구려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사실상 고구려의 후예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비하고 악랄한 오랑캐

거란은 협상을 했는데도 계속해서

침공을 하기 시작했어요.

 

1010년에 2차 침입을 했었어요.

 

그러나 우리 고려가

굉장히 방어를 잘해서,

별 소득없이 돌아갔답니다.

​고려가 하도 기세 등등해지고

자기랑 맞먹으려 드니까,

 

제 2차 이런 시부럴을 외치며

고려를 완전히 작살 내야겟다!!!

 

 

라는 목표와 함꼐 미친 거란이 드디어

1019년 드디어 개성으로...

 

소배압이라는 장군과

서열 5위 황제 친위군

우피실 군을 보냅니다.

거기서 드디어

강감찬 장군님이

나서기 시작합니다.

봉정사 극락전 출토 12세기 고려시대 단청을, 그 틀 안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적용해본 고려시대 단청과 문루

 

거란은 귀주대첩전에

가금씩 압록강 근처로

군사를 보내 위협했어요.

 

북쪽 나라들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꾸준히 도발하여,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 것 이지요.

 

더럽고 사악한 것들...!!

 

아무튼,

1014년 요나라 소적렬이

처들어왓지만 방어 성공!

 

그러나 거란은 고려를

확실히 손봐주겠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했기에,

 

압록강 인근에 진지를

구축하여 거기서 합숙을

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근데 그때 고려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거란군이

​아무튼 잘 방어했어요.

 

그래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하여 또 다시 그 카드를

꺼냅니다.

 

"강동 6주 다시 내놔 씹새들아"

 

만주벌판과 평양에 있던​3~5세기 고구려 건축물은 이런 느낌!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고구려 건축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당연히

고구려 후예로 인정받고

다시 영토 회복을 했기 때문에,

 

" 조까 ㅅㅂ ㅗㅗ "

 

하며 당연히 올태면 와봐

모드를 취하고 있었어요.

 

참~~ 염병같은 거란은 협상한걸

다시 조까 ㅅㅂ 모드로

지럴을 떨지 뭡니까!?

 

그러나 저 지랄같은

거란의 대부분의 공격을

아주 ~~

 

잘 막아낸 우리나라

고려는 자신감이 생겨!

 

염병질을 일삼는

거란 외교관을 체포했어요.

 

그래서 벼루고 있던 요나라는

​1015년 9월에 다시 쳐들어왓지만,

 

고려군의 우주 방어로 인하여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 합니다.

 

좆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마민족 거란의 공격을

아주 잘 막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굉장히 강력한

산성 축성 실력 때문 아닐까요?

 

 

고려시대 기록에는 개경성 나성의 성벽 높이는 8.1m,

산성 강화 건물인 6m 정도 높이의 성랑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욱 많은 고려시대 성랑 사진과 건축물을 볼 수 있습니다!

 

 

 

거란은​ 1018년 10월

다시 공격햇지만,

 

고려는 다 막아냇고

드디어 살수대첩이 시작됬고,

결국 우리가 대승을 거둡니다.

 

아무튼 여기서

대승리를 거둔 고려!

 

그러나...

 

 

소배압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황제 직속군을 이끌고 있으니까.....

 

 

소배압은 고려 개경성을

향해 냅다 달려갔어요.

 

산성 파워를 맛본 거란은

최대한 빠른시간안에...

 

전투를 끝내고 후방 안정을 위해

"멀티 무시 본진 밀기 ㄱㄱ"

작전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우리에겐

이런 더럽고 사악한 공격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으므로,

중간중간 강감찬 장군이

별동대를 보내 조금식

기습 작을 펼치고,

내구산에서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부대를 이기고,

평양 근처 미탄진에서

조원도 거란군 한부대를

격파하게 됩니다.

 

 

청야전술과 각종 게릴라전으로

그렇게 거란의 진군을 늦추며...

최대한 막았지만!

 

거란은 꾸역꾸역

고려 영토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진군 속도를 늦춰가며

전투 준비에 시간을 번 고려는,

 

그 사이 동북면의 병사

3천 3백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수비 강화를 했어요.

​즉,

소배압이 이렇게

힘들게 처들어갈때,

 

고려도 사력을 다해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소배압은 계속 타격을 받아도

일단 본진 밀기 ㄱㄱㄱ 를 했는데요,

왜냐면 여요전쟁 처럼 수도만 작살내면

뭐가 어찌됬건 고려가 님들 ㅈㅅ

할거란 생각을 햇기에...

슬픈건 우리

발해도 이렇게 점령당함.

​더러운 거란 오랑캐놈들!!

 

아무튼 그 시각 수도 개경성.

개경성은 전투하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에 써있길 성벽에 성가퀴도 딱히

설치하지 않은, 그런 성 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산성에 성랑을 올려 거의 13~15m급 성벽 높이를 보여줍니다.

 

고려 최고 중심부의

도심이라 그런것도 있고,

또한 평지에 만든 성 입니다!

 

그래서 방어력이

좋을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고려는 그 당시 방어 병력을

불러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북진 시켜서 더 병력이 없었어요.

그걸 알고있는 거란 소배압이

ㅅㅂ 어떻게던 개경만 잡으면 됨

그니까 일단 빨리 ㄱㄱ

 

 

한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란의 그런 속내를

어느정도 알고있었던 고려!!

 

그 뒤를 고려 장수 김종현이

빨리 따라 잡아서 조져야 한다!

 

를 외치며 추격을 하셨읍니다.

 

 

그리고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현종.

 

고려 현종님 꼐서...!!

"두 번 도망은 없다"

 

라는 의지로 각종

청야전술을 준비하며,

 

최후의 방어전,

개경성 방어전을 준비합니다.

전번에 먼저 치뤄진

2차 여요전쟁 에서는...

 

고려 수도 개경성이 한번

작살나고 왕 또한 피난

갈 정도 였습니다.

그런 슬픈 과거가 있기에,

할수있는한 최대한 방어준비를 하고,

 

할수 있는한 최대한의 방어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요나라와 고려가 공존하던 시기의 건축물인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감 실사 건축물

 

 

국내 단 하나, 유일한 고려시대 최대 전성기 건축관련 보물인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감"을 실사화 건축물로 만들어 봤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간송미술관 금동삼존불감 사진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성문 성벽, 산성을

미친듯이 업그레이드 시키고

마을주민도 최대한 대피시켰어요.

 

그리고 드디어 소배압의 공격이 옵니다!

 

그러나...

소배압은 생각 이상의

방어력을 보여주는

고려수도..로 인하여

소배압은 꽤를 냅니다.

고려군에게 우리 철수해요 말 하고

300명의 기습대원을 보내려는거,

 

고려 성문 통덕문으로 가서

그걸 전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고려는...

 

더러운 오랑캐들이

그럴리가 없지!!하고

방어하고 있다가 고려기병 100명이...

 

거란군의 기습대원을 쓸어버립니다!

​무튼...

 

거란은 보급 신경 안쓰고

냅다 ㄱㄱ작전 펼쳐서 ,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보급문제 때문에 빨리

끝내야 됬습니다.

근데 고려가 청야작전및

각종 우수한 방어력을 보여줘서,

 

결국 요나라 군대는 보급까지

애매해지자 결국...

 

고려군을 최대한 피해 우회하며

퇴각, 드디어 귀주성에 이릅니다.

고려는 해안가 통로를 모두

틀어막고 거란을 귀주로

몹몰이 하듯 몹니다.

그때까지

거란 추격대인 김종현 장군님의

1만 기병은 도착못햇는데,

 

도착 전에

귀주대첩이 시작됩니다.

 

귀주산성에 성벽 건축물인 성랑 250여 개소가 있었다고 하며, 성랑을 모두 합친 길이는 2km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1019년 3월 10일 양력!

여튼 ​어거지로 귀주에

몰린 거란은...

귀주성 앞쪽에서 포진하고

있던 고려군 20만이랑

진짜 말그대로!!

 

1:1 맞짱을 뜹니다!

 

필드에서 한타 싸움 제대로

하게 된 것이죠.

한타전 전에 요나라 쪽은

나름대로 전략을 세웁니다.

귀주성 앞쪽은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뒤쪽에

구릉지대가 있는데,

요나라 군대 도감 야율팔가는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하천 2개를 건너

공격하게끔 하자는 의견에 반대하고,

 

배수의 진을 쳐서 최대한의

공격력으로 승부 보자고 했고,

결국 소배압도 야율팔가

말대로 개천 하나를 등진채

전투하게 됩니다.

 

거란은 사실상 스팀팩 빨고

한타 하려고 하는것과 같은

작전을 실행한 것 이지요.

 

드디어 한타 개전!!

​평원에서 한타전을 하는데,

 

고려시대 건축 양식인 쌍하앙을 접목한 고려시대 문루 (2층 뾰족한 2개 부자재가 쌍하앙)

 

 

 

드디어 김종현 장군님의

1만 기습 병력이 하천을 등지고

싸우는 거란군 등뒤로 나옵니다!

 

1:1 전하는데

뒤에서 소환몹 5마리 나온 그런것!

게다가 상당히 추운날씨인데,

 

갑자기

바람 방향이 고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고 소나기가 내렸어요!

전투중에 엄청난

바람으로 인하여...

 

화살 화력도 약해지고

비가 내려 시야 확보도

약화되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만큼

엄청난 소나기와

풍량이었다고 하네요.

 

(스콜인가..?)

 

거란의 10만 정예 기마부대로 이루어진

단단한 전투 진열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이속, 공속감소 디버프

걸린 거란 군대 뒷쪽에,

 

그 상황에 1만 기습 대원들이

뜨든!! 하고 갑자기 나온겁니다!

 

소배압과 거란 병사들은 이렇게 생긴 15m에 근접하는 미친 산성을 통과하고 개성으로 미친듯이 질주했습니다.

 

게다가 1만명은 정예 기습부대,

정예 기마부대로 이루어진...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부대!

정면, 측면이 둘러 쌓이는데 뒤로 강을

끼우고 싸우는 거란, 완전 포위!

이런 운이 따라주는데,

사실 이 전쟁을 준비한

강감찬 장군님은....

 

귀주 대첩이 일어났을 즈음에는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풍량이

전환되는걸 알고 계셧을 거라고 해요.

 

그러니까 평지에서

거란의 정예 기마부대랑 1:1

한타전을 계획할 수 있었을 것이라네요.

 

​참 슬픈 사실은

이 전투에서 발해인들이

거란군으로 투입됫을걸로 보인다네요.ㅠㅜ

 

 

말그대로 중국은 이 시절부터 우리를..;;;

아무튼 온갖 광역기와 기습,

생각 외의 엄청난 공격력으로

요나라 황제 직속 5위 군대를...

 

말그대로 포위 섬멸해버립니다!

말그대로 지금의 미국, 중국급인

거란 5손가락 안에 드는 정예 부대를,

 

평원에서 포위 섬멸하여

작살을 낸 엄청난 성과!!

 

봉정사 극락전 출토 10~12세기 고려시대 단청

 

그로 인하여,

 

26년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투를 종지부를 찍어버립니다.

 

 

거란은 황제 직속군중

큰 축 하나가 완전 섬멸당해서,

 

그 부담감으로

더이상 못처들어왔데요.

 

또한...

이 전투가 평원에서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완전 승리를 성취한,

 

우리 민족의 마지막 1:1

한타전 대승리 전쟁 입니다.

 

거란군은 송나라와 몽골

등등과 짱떠야 되는데,

 

황제 호위하는 큰축인 5위

군대가 전멸하다 싶이 되서...

 

그냥 거란은 어휴

고려야 미안 ㅈㅅㅈㅅ

모드로 가게됩니다.

그 후 동북아시아는 100년 이상의

평화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광화문보다 약 6m 더 높은 성문. 산성 성벽이 8.1m, 성랑이 6m 일때를 기준으로 하면 이 정도의 높이까지 예측 가능합니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개국이 주축을 이루고,

 

그 유명한 송나라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ㅈㄹㅈㄹ 하고 막~

 

엄청 잘나가는 평화의 시대가,

민족 최전성기 시대가 온 것이죠.

 

근데 오랑캐 거란은 정신 못차리고

1033년에 한번 처들어오긴

하는데 고려가 바로 격퇴..!

 

 

​세계 최강 대국 미국과도 같은...

엄청난 공격력의 요나라를 상대하여,

고려는 초기부터 기선제압,

청야 전술, 공성전및 수도 방위,

 

전진하는 거란군 지속적 견제,

포위 유도및 자연을 이용한 공격 등등...

 

그 시절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할수있는건 다 했습니다.

 

 

그 전술 총괄이 강감찬 장군님!!

​강감찬은 구국의 영웅이 되셨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의 12세기 모습은 이럴수도 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고려시대 단청을 적용한 봉정사 극락전 12세기 버전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이후 고려는 개성 주위에

외성을 더 만들고 그 유명한~

 

천리 장성

(고구려 말고 고려 버전)

을 만들어 방어 구축을 더욱 단단히 하며,

이 전투의 완승으로

120년간의 최고 전성기와

평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가끔 나오는

"우리나라 최고 전성기는 언제?"

 

여기서 반드시 거론되는

" 송나라도 ㅈㅅㅈㅅ 연발하는 고려초기 "

 

그게 이 귀주대첩 후 입니다.

 

 

청자 기와, 붉은 주칠, 금으로 만든 어룡 치미로 장식한 고려시대 건물
고려시대 최대 전성기 시절 2층 건축물, 흑유와 우진각지붕 건물

 

고려시대는 흑유와, 청자기와, 붉은 옻칠을 하여 지금과는

꽤나 다른 느낌의 화려한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 많은 고려시대 2층 건축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귀주대첩이

왜 대단한 승리냐면,

거란의 10만군은 대부분이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

거의 대다수가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지금으로 치면 전부다

특수부대 부대원들!!

 

게다가

​거란 황제 친위군 5위의

우피실군도 들어가 있었어요.

​전원 특수부대 출신인데

다련장 로켓에다가,

 

개인별로 소형 레일건

무기 가지고 있는 수준이죠.

 

 

그에 비하면....

고려는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모은 20만명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라를 지키자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쳐 결사항전을

결심한 우리 조상님들 이십니다...!!

 

현종 황제마저 결사항전을

생각했을 정도.

 

 

더 쉽게 볼까요?

 

거란은 모든 전투기가

f-35만 있다고 치면,

고려는 f-35 몇대에 대부분

f-15나 f-16으로 구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 건축물은 이런 모습 입니다.

사진을 더 보시고 싶으시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통일신라 건축물과 단청에 대한 게시물로 이동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초강대국을 육지전으로 작살낸,,,

 

평원에서 1:1 평지 맞짱으로

당대 최강 대국을 작살낸!!

한민족 최고의 대첩!

 

이후 거란은 강동 6주는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려는

동아시아 3대 축으로써,

 

사실상 초 강대국 반열에 올랐으니

참으로 대단한 전투가 아닐수 없지요!

 

더러운 중국의 선빵을 모두

막고 적을 전멸까지 시켜,

 

전쟁 분위기에 휩쓸린 동북아시아를

평화의 땅으로 만든 "귀주대첩"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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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11줄 요약

 

 

- 요나라 ( 거란 )은 배후 안정을

위해 고려를 공격함

 

- 서열 5위 황제 직속군

피실군을 소손녕이 지휘함

 

- 예전에 개경성을 공격해서

승리했었던 거란

 

- 빠른 전쟁 종결을 위해

다시 그 방법을 택함

 

- 그래서 개성 어택땅 본진 달려 하는데

김종현 장군과 고려군이 게릴라 전으로

진군 속도를 늦춤

 

- 1018년 10월 살수대첩으로 거란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고 소손녕은 후퇴

 

- 소손녕은 재정비후 남은 10만 병사로

고려 수도를 치러 어쨋든 ㄱㄱ함

 

- 그때 고려 현종은 "두번 후퇴는 없다"

를 외치며 수도 개성에서 최후의 방어전 준비

 

- 그러나 고려군이 귀주산성으로

거란군을 몹몰이 해서 강제 한타각 만듬.

1019년 3월 10일.

 

- 평야에서 1:1 한타전 펼치는데

우리쪽에 유리한 파워 소나기 + 김종현

장군의 기병대의 기습 배후공격 등등 행운이 따름.

 

- 거란 군대는 거의 전멸하여 ㅌㅌ하고

요나라는 두번 다시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강동 6주 이야기도 더이상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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